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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ㅑㅇ May 28. 2023

그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호밀밭의 파수꾼> 걱정 불안 분노 체념 그리고 그리움



매미들을 생각한다.


땅 속에서 애벌레로 7년을 살고, 일주일간 땅 위에서 산다는 그 매미들. 긴 시간 어둠 속에서 기다리다가 마지막 일주일간 마음껏 소리 내며 찬란하게 생을 마무리하는 매미들 말이다. 땅 아래에서 수년을 살았는데, 어느 날 자신들의 거처 위로 도로가 깔리거나, 주차장이 만들어지거나,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곳은 매미 대량학살 현장이 되는가? 매미들이 한여름에 그렇게나 시끄러운 것은 땅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한 애벌레들 몫까지 더해서 울어대는 것일까. 흙 덮인 길과 공터가 아스팔트 길이 되거나 시멘트로 덮이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궁금했다.



오늘처럼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나뭇잎의 벌레들을 생각한다. 저 커다란 나무는 사람뿐 아니라 벌레들에게도 좋은 안식처이다. 알록달록한 광대벌레나 이름 모를 날벌레들도 꽤 많이 산다. 5층 건물 높이만 한 나무가 바람을 맞으며 나뭇잎들을 흔들 때는 뭔가 압도적이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나무가 내는 소리와 그 모습은 거인이 머리채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를 완전히 탈탈 비워내려는 것 같았다. 저렇게 비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날이면, 저기 사는 벌레들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싶다. 나뭇잎 뒤에 붙어 있을 수 있으려나. 걱정 반, 궁금함 반.



참 쓰잘데기 없는 걱정이다. 이런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했다가는 별 멍청한 걱정을 다한다는 핀잔을 받기가 일쑤다. 태풍 부는 날 나뭇가지에 둥지를 튼 새 가족은 어떤지, 비가 많이 오는 날 땅 속에 사는 개미들은 괜찮은지, 몬트리올 강아지와 서울 강아지는 서로 말이 통할 것인지 등등의 얘기를 했다가는 내 걱정이나 하라는 말을 듣기 십상인 것이다. 사실 그렇다. 당장 오늘 처리해야 내 직업의 내일을 보장할 수 있다면, 한가하게 남 생각할 게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이런 생각을 입밖에 내지 않는 법이다. 이런 생각은 각자의 마음 깊숙이 숨겨두거나,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내맡겨버린다.





오리들이 그곳에서
헤엄을 치고 있잖아요? 봄에 말이에요.
그럼 겨울이 되면
그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p.113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민음사.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택시 기사에게 오리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홀든이야말로 지금 오리 걱정 할 때가 아니었다. 고등학교에서 4번째로 쫓겨났고, 부모님께 퇴학통지가 도착하기 전에 학교 기숙사를 먼저 떠나 집 근처에서 방황하는 처지였다. 때는 12월 크리스마스 방학을 며칠 앞둔, 그들의 명절전야. 추운 날이었다. 당장 오늘 저녁 씻고 잘 곳을 찾아야 했고, 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막막했다. 이 순간 오리 걱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낼 수 있을 만큼 내면이 넉넉한 그릇이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가 어쨌든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아직 죽을 만큼 절박하지 않다는 단서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홀든이 세상에 대한 마음앓이를 세게 하는 청춘이란 것이다. 청춘이 그의 마음을 절박하게도 하고, 여유 있게도 만들었다. 그는 성탄절에 의례적으로 행해지는 공연에 거룩한 감동을 받으면서도. 그 공연에 십자가를 들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른 사람들이 어쨌든 배우이고, 그들이 무대 뒤에서 '멍청이처럼' 굴 것에 환멸을 느꼈다. 클럽에서 어니의 끝내주는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면서도, 그가 유명인사에게만 아는척하는 위선적인 속물덩어리란 생각에 몸서리쳤다.


뭐든 너무 잘하면 거들먹거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며, 자신이라면 벽장 속에 들어가 연주할 거라는 등. 부인하긴 어렵지만, 전적으로 공감하기도 어려운. 청춘다운 귀여운 생각들을 쏟아낸다. 하룻밤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벨보이가 주선해 주는 여자 서니를 돈 주고 부르지만, 마음도 몸도 너무 불편했다. 후회하며 돈만 주고 돌려보냈더니 오히려 벨보이에게 삥을 뜯긴다. 청춘은 꼬일 대로 꼬인다.


택시기사는 당연히 면박을 줬다. 겨울철 오리의 행방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어쨌거나 일하는 중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어째서 그런 멍청한 일까지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홀든도 그가 운전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며 불안했다. 택시가 어디 가서 부딪히진 않을까 걱정됐다.


오리의 행방에 대한 질문은 그러나 택시기사 호이트 씨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던 게 틀림없다. 호이트 씨는 화난 말투로, 오리가 아니라 물고기에 대해서 답변을 했다. 오리보다 물고기가 문제라며. 겨울에 얼음이 얼고 사람들이 거기서 스케이트를 타도, 물고기는 얼음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기 마련이라고. 대자연이 어떻게든 돌봐줄 거라고. 홀든은 혹시나 사고가 날까 두려워 그의 답변에 만족하는 척했다.




사람들에게 마음이란 게 들어찬 이래로, 우리는 분명 소소한 것에 마음 쓴다. 어떤 살아있는 것에 그냥 마음이 쓰이는 것. 오래된 언어로 측은지심에 가까우면서도 동시에 순수한 즐거움에도 가까운 그 마음. 철이 들면서 애써 모르는 척해야 할 것 같은 그 마음 말이다.


홀든은 인간에 대해 환멸을 느끼면서도, 보통 주목받지 못하는 것을 살피는 마음, 그 하나에서 희망을 본다. 그에게는 애지중지하는 동생이 있다. 동생 피비는, 그가 또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것을 알아채고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학교마다 사람마다 싫다는데 살아있는 것들 중에서 좋아하는 게 있냐고. 도대체 하고 싶은 게 있긴 하냐고.


홀든이 즉흥적으로 답한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런 마음 하나를 밑천으로 하는 상상의 직업이다. 깎아지른 벼랑 위에 넓게 펼쳐진 호밀밭.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뛰어놀고 어른이라고는 자신 밖에 없을 때.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 역할.



누군가가 벽에다가 '이런, 씹할'이라고 낙서를 해놓은 것이다. 피비나 다른 아이들이 이런 걸 보게 된다고 생각만 해도 정말 사람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이들은 이 말의 뜻을 궁금해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어떤 나쁜 놈이 아이들에게 잘못된 뜻을 가르쳐주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그 생각에 며칠 몇 밤을 걱정 속에서 보내게 될 것이었다. 그런 곳에다가 이런 말을 써놓은 놈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혹시 어떤 변태가 밤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학교에 몰래 들어왔다가 이런 낙서를 해놓은 건 아닐까. 그랬다면 그 자식이 그걸 쓰고 있는 걸 현장에서 덮쳐, 피투성이로 뻗을 때까지, 그놈의 머리를 돌계단에 내리치는 내 모습을 눈에 그려보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기분이 더 나빠져 버렸다.

p.263



홀든은 아무래도 뉴욕을 떠냐야겠다고 결심한다. 출발 전 아끼는 동생 피비의 돈도 돌려주고, 작별인사도 할 겸 그는 그녀의 학교이자 자신의 모교를 찾아갔다. 거기서 벽에 낙서된 f-word를 '호밀밭의 파수꾼' 마음으로 문질러 지웠다. 그는 그러나 학교 안의 다른 계단 벽에서도 같은 내용의 낙서를 본다. 그건 칼 같은 걸로 새겨져 있어서 지울 수도 없다.



낙서에 대해 반쯤 체념하고 피비를 만나기로 한 박물관에 도착한 홀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아이들을 미라의 무덤이 있는 방에 데려다주고, 그 방에서 그는 아늑함과 평화를 느낀다. 그런데. 거기서도 홀든은 아까 것과 같은 낙서를 본다. 빨간 크레용으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닫는다. 지구의 모든 욕을 지우고 다닌다 한들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자기 무덤의 비석도 ‘이런, 씹할 ‘이라고 낙서될 수 있다는 것을.



난 이 장면에서 소리 내 웃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걱정과 불안은 분노와 체념의 길을 통과했다.

이제는 연민과 그리움의 차례다.



목마가 돌기 시작했고, 나는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피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애 말고 목마를 타고 있는 아이들은 대여섯 명 정도밖에 없었다. 지금 나오고 있는 곡목은 '흐려진 그대 눈동자'였는데, 재즈풍으로 신나게 연주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다 공짜로 한번 더 타기 위해황금의 링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피비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하고 있었는데, 목마에서 떨어질까 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황금의 링을 잡으려고 할 때는 아무 말도 하면 안 된다. 그러다가 떨어져도 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p.276



홀든에게 사랑스러운 동생 피비가 있었기에 다행이다. 자식 문제에 대해선 제정신이 아닌 엄마와 부질없이 걱정해 주는 아빠, 글 잘 쓰는 형, 죽고 없지만 시를 좋아하던 영특한 동생 앨리가 없었다면. 소소하게 일상적으로 걱정해 주는 이가 없었다면. 홀든은 이 책을 쥐고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들처럼 되었을지도 모른다. 묵묵히 살아가기보다 장렬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살아남았고, 이야기를 전하는 쪽을 택했다.



피비 덕에 홀든은 부질없지만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소리 내 말할 수 있었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스펜서 선생, 애클리, 스트라드레이터, 엄마들, 수녀들, 서니와 벨보이, 샐리, 앤톨리니 선생, 아이들, 그리고 택시기사들 모두를 홀든은 훗날 그리워한다. 회전목마처럼 같은 원을 반복해서 도는 삶들을 직시한 그때. 홀든 마음의 고통, 염증이 배출되고 씻겼다. 나도 시원해졌다.



내게도 쓰잘데기 없이 마음 써주는 이가 있던가.

내가 마음 쓰는 이가 있던가.



갑자기 비가 엄청나게 퍼붓기 시작했다. 누가 하늘에서 물통으로 물을 붓기라도 하는 듯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전부 비를 피하기 위해 회전목마의 지붕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참 동안 난 그냥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완전히 젖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목 근처와 팬티가 많이 젖었다. 그나마 사냥 모자가 도움이 되긴 했지만, 흠뻑 젖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피비가 목마를 타고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며, 불현듯 난 행복감을 느꼈으므로. 너무 행복해서 큰 소리를 마구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피비가 파란 코트를 입고 회전목마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정말이다. 누구한테라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p.277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다보니. 쓸데없는 생각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학교 때 나를 스쳐간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떨떠름한 그리움도 함께.





언젠가의 여름을 기억한다.


서울시청 인근 미술관이었다. 며칠간 비가 많이 내린 직후였고, 그날도 비가 오락가락, 해가 나왔다 말았다 했다. 빌딩이 가득 들어찬 서울 한복판의 작은 미술관 마당에서 나는 봤다. 나무 둥치마다 빼곡하게 달려있던 엄청나게 많은 매미의 허물을.


매미는 비가 온 후 땅이 부드러워지면 기어올라와 그렇게 탈피를 하고 날개를 달았다. 땅 속에서도 비에 젖은 흙밭을 찾아 여행을 했던 걸까. 누군가 길을 알려준 걸까. 어떤 매미 애벌레는 흙 위에 아스팔트에 막혀 죽었을지 몰라도, 묵묵히 살아남은 매미도 있다. 아스팔트로 거의 뒤덮인 도심에서도 살아남았고 지금도 살아간다. 도로의 소음보다 시끄럽게 소리 내며, 올여름도 살아갈 것이다.


벌레들도 살아간다. 비바람이 지나가도 나무 주변에는 온갖 생명체들이 바글거린다. 사람도, 벌레도. 사람이나 벌레나 이들의 기세는 참 대단해서, 지구가 얼어붙지 않는 한 줄 것 같지 않다. 혹시 지구에 빙하기가 온다 하더라도 인간보다 벌레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지구가 리셋되는 그 순간이 올 때까지도 날벌레나 오리를 걱정하는 인간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인간을 걱정해 주는 벌레도 있으려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은 끝이 없다. J.D샐린저는 작고했지만, 쓰잘데기 없는 것 같은 그의 문학은 살았다. 심지어 좋다. 홀든이 목마 앞에서 흠뻑 맞았던 비만큼 좋다. 그가 남긴 오리 행방에 대한 소소한 마음은 바다를 건너와서도 생을 이어간다.


멸종할 것 같지 않은 F 단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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