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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ㅑㅇ Jun 09. 2023

누가 이런 아이를
집에 두고 싶어할까?

<빨강머리 앤> 앤에게 사과하다


앤이 못마땅했다.

 

앤은 감수성 넘치고 들뜨기 잘하는 아이였다. 내가 앤을 만난 것은 책 보다 TV시리즈가 한참 먼저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만화는 재미있게 봤는데 캐릭터는 사실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앤의 식탁을 차리고 호들갑 떨며 좋아한 마당에 고백하자면, 그녀 특유의 소란스러움, 수선스러움이 참 불편했다. 앤의 상상 속 새하얀 결혼 드레스에 대한 환상에는 속마저 거북했다. 비교적 모범생인 시절에 TV를 봐서일까. 그 정서적 널뛰기와 아름다움의 추구, 되바라진 말투와 지나친 수다가 만연하는 사회는 지양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런 것은 피해야 할 사회악 중 하나라고 받아들였다. 아마 나는 꽤나 억압된 여자아이였던 것 같다.

 

다 업보다.

 

뒤늦게 결혼하여 태어난 첫째가 엄청난 감정증폭기였다. 성별도 남자인데 사회생활 괜찮을까 걱정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이의 넘치는 감수성과 감정적 공감력은 태어난 지 돌이 될까 말까 했을 때부터 눈에 띄었다. 산부인과에서 둘째 임신 즈음 예방주사를 맞을 일이 있었다. 아이는 엄마인 내가 주사를 맞자 울기 시작했다. 산부인과 의사는 이런 남자 아기 처음 본다고 신기해했다. 그뿐 인가. 화가 이중섭의 인생을 TV에서 어린이 인형극 형식으로 보여줄 때, 이중섭이 아내와 헤어질 때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엄마까투리 책을 볼 때에는 어깨를 들썩이며 곡을 했다. 아뿔싸. 내 아이가 감수성이 넘친다.




그 모습에 마릴라는 전보다 더 언짢아졌다. 이 유별난 아이가 몸은 식탁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저 멀리 하늘나라로 날아가 공상의 세계를 헤매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언짢았다. 누가 이런 아이를 집에 두고 싶어할까?


p.69, <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더 모던


 

 

아이의 감수성은 좀 나이가 든다고 어디가지 않았다. 유치원이 가기 싫을 때면 발이 퉁퉁 붓고, 발표회 전후에는 어깨와 목이 뻣뻣해졌다. 부모 공개수업이나 발표회 전후,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날카로워질 때면 아이는 말을 더듬었다. 헤어지는건 불편해지는 것 보다 싫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너무나 좋아해서 지금도 인형을 끼고 잔다.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면 입이 1인치는 나온다. 어깨도 덩달아 1인치는 처지는 것 같다. 슬프거나 무서운 이야기는 필사적으로 피한다. 기분이 좋아지면 목소리가 커지고, 춤도 춘다. 돌고래 소리도 낸다. 5학년 남자아이인데 앞으로의 한국 사회생활이 가끔 걱정 된다. 앤의 감성으로 군대 괜찮을까.

 

둘째에게서도 내 카르마가 느껴진다. 그래. 다 업이다. 그녀는 돌이 지나자 말을 시작했다. 유난히도 언어가 빨랐다. 생각한 그대로 말하고, 말한대로 행동했다. 유치원생 첫째가 엄마까투리 책을 함께 보며 통곡할 때, 어린이집 원생 둘째는 나를 보며 오빠 왜 이러는 거냐고 물어봤다. 더 어렸을 때 어느 카페에서 개업 축하 화분의 난꽃을 모조리 따고 머리에 꽂고 있어서 그 곳 사장님께 백배 사죄했던 기억이 난다. 잘 먹어야 키 큰다고 하면, 작은 것은 나쁘냐고 되물었다. 긍정적인 것에 어른들이 '예쁘다'하니, 아이는 부정적인 것에 '못생겼다'란 단어를 썼다.

 

무대 위에 서는 것도 좋아하고, 완장차는 것도 참 좋아했다. 지금도 반장은 반드시 하고 싶어한다. 도무지 나를 닮지 않은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유행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다. 앤이 볼록소매 옷을 입고 싶어했던 것처럼,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것을 따라했다. 초등학교 입학 직후 아이들이 핸드폰을 목에 거는 것을 보고, 아이는 자기 신발끈을 풀어서 목에 걸었다. 한 동안 모자 달린 옷만 입더니, 이제는 쫄바지를 찾는다. 아이는 또 자기 논리에 맞지 않으면 불 같이 화를 내고 킥을 날린다. 앤이 길버트의 외모비하 발언에 석판이 깨지도록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을, 아이는 보고 또 봤다. 책의 앞부분에서 앤이 린드 아주머니에게 대드는 장면에서 아이는 이미 책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었던 터다.


 


 깡마르고 못생겼다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하세요?
주근깨가 많고 머리가 빨갛다니요?
아주머니는 예의 없고 무례하고
인정도 없는 사람이에요!

p.125, <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더 모던


 

 

 

사실 둘째의 은근히 되바라진 말투 때문에 예의 없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었다. 한 때 이 부분을 소재로 상담도 했으나, 상담선생님은 아이가 지극히 이성적이고 눈치있고 바르며 잔소리를 싫어하니, 부모는 신경끄는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풍부한 감정이 충분히 표현되지 못하는 첫째 아이에게 더 많이 공감해주라고 덧붙였다. 하아. 피하고 싶었던 앤의 과도한 감성 뿐 아니라 똑부러진 이성과 관종기를 나는 아이들을 통해 속절없이 마주하고 있다. 평생 도망다닐 수 없는 노릇. 이것은 어찌되었건 나의 업인가 보다.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대처할 것이 없다. 아이는 아이의 생을 살아갈 것이다. 첫째는 첫째대로 감정의 널뛰기 속에서 더 먼 곳과 더 내밀한 곳을 볼 것이다. 둘째는 둘째대로 이성의 극단 속에서 자기 유리한 고지를 찾고 남 유리한 고지도 알아볼 것이다. 내가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데. 그냥 받아들이고 지원해주면 된다. 그들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비판과 그들이 겪을 괴로움과 성취를 같이 공감해줄 수 있으면 아주 좋겠지만. 그 부분에 솔직히 자신은 없다. 나의 카르마 수용체를 단련해야겠다. 이것은 다 내 업보이다. 앤의 별난 이성과 감성 인정해주기. 반사회적인 것도 사회적인 것 안에 존재함을 알아보기. 어쩐지 불교 신자가 된 기분이다.

 

 

최근 가까운 어르신이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도파민 수용체가 작아지면서 생기는 흔한 노인성 질병이라고 한다. 한국인에게 유난히 흔하다고 한다. 도파민 수용체가 작아졌다는 말이 내게는 기쁜 것에도 슬픈 것에도 흥분이 덜 될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느껴진다. 감정의 진폭이 작아지는 노인성 질병으로 통역된다. 아직 초기 단계인데도 어르신은 '늙음'이라는 현실 앞에 의기소침해졌다. 심한 잠꼬대, 건망증의 진행, 미세한 손떨림이 수반되긴 했다. 그러나 이 진단을 통해 내게 가장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은. 평소 다소 무표정한 단정한 모습, 절대 버럭하지 않는 편안한 모습, 매사 잘 정리된. 그러니까 군자다운 모습이 전조증상이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개인보다 전체가 훨씬 더 중요했다. 개인의 기분, 취향을 내세우면 몰상식한 것이었다. 지금은 좀 달라진 것 같다. 감정을 중시하는 시대가 됐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조직, 전체는 꽤 유의미하고,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기업이나 종교단체, 국가 단위의 조직, 전체가 중요한 곳이 존재한다. 철없이 앤처럼 내 개인의 감정과 상상을 내세웠다가는 아침이슬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여전히. 그러나 AI가 득세하고 인간다움에 대한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시대가 도래한다면. 정말 앤 같은 성향은 귀한 가치가 되지 않을까. 앤은 진짜 미래형 인재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군자다운 모습을 기대하지 말아야겠다. 지금은 너무 쉽게 울고 웃어서 걱정이지만, 지나치게 되바라지고 불같아서 걱정이지만. 언젠가 그 성향이 너무나 귀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어쩌면 너무 점잖아져서 걱정되는 날도 올 수 있는 것이다. 파킨슨 병 진단받은 그 어르신도 개인의 감정보다 조직의 효율이 훨씬 중요한 사회를 살아왔다. 어르신에게도 앤의 감성과 이성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그 어르신이 지금이라도 더 많이 울고 더 웃고 더 화내고 더 따졌으면 좋겠다. 나와 가까운 이들이 우리집 아이들처럼, 앤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 뒤늦게라도 감정적으로 성장하고. 이제라도 다양한 표정을 지었으면 한다. 괜히 못마땅한 시선 줬던 내 어린 시절의 앤에게 사과한다. 앤 셜리 미안.

 


Unsplash - Steve Joh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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