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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ㅑㅇ May 09. 2023

전엔 어떻게 살았나 싶을 때가 있다

<빨강머리 앤> 마릴라 그리고 동쪽 다락방



빨강머리 앤 이야기를 보면서 많은 이들이 앤의 생기발랄함과 엉뚱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실하고 바르게 자라나는 모습에 웃고 운다. 말이 좀 지나치게 많다 싶을 때도 있지만. 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의 솔직함, 안드로메다급 상상과 엉뚱함을 캐나다 동부 어느 섬의 자연 속에서 만나는데.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녀다.


앤에 웃고 울던 많은 이들이 나이가 들어서는, 마릴라에 방점을 찍는다. 나도 그랬다. 만화에는 자세히 표현될 길 없었던 마릴라의 속 마음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심히 당돌한 앤을 대하는 그녀의 당혹스러움을 알아봤고. 아이를 키우면서 어떤 때는 져주고 어떤 때는 바르고 대쪽같이 응대하는 그녀의 모습에 공감과 응원을 보내고 있는, 엄마로서의 나를 보았다. 마릴라가 보였고, 그녀를 바라보는 내가 보였다.


이야기의 시작은 실수였다. 고아 앤 셜리가 어른들의 실수로 프린스 에드워드 섬 초록 지붕 집의 마릴라와 매슈에게 맡겨진다. 남자 아이를 원했건만 여자 아이가 도착했다. 오누이인 그들은 착실하게 농장과 과수원을 관리하는 독신 기독교인이다. 불필요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마릴라. 그녀는 앤을 돌려보내려 했지만, 차마 못했다. 감정증폭기 같은 앤을 송곳 같은 블루엣 부인에게 맡기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그녀는 앤과 한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4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초록 지붕 집과 식구들에게 일어난 서로의 스며듦이 책의 주요 골자이다.



마릴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공작부인처럼 교훈을 좋아했고, 아이를 키울 때는 말끝마다 교훈을 덧붙여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앤은 교훈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리고는 기분 좋은 얘기들에만 흠뻑 빠져들었다.

p.112 <빨강머리 앤> 루시드몽고메리, 더모던.


"사과 꽃을 가져가도 돼요?" "안 돼. 꽃 때문에 방이 어질러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 처음부터 나뭇가지에서 꺾으면 안 되는 거였어."

p.115



마릴라는 초보 부모였다. 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긴 했다. 그러나 불경한 이야기에는 웃겨도 참고, 아이에게 본을 보이거나 교훈을 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강박은 빅토리아 시대 끄트머리를 산 마릴라 뿐 아니라 2000년대의 부모 대부분에게도 있다. 셋째나 둘째 보다는 첫째에게 더 그 강박을 투영한다. 아이가 초코 우유나 라면을 접하는 시기는 첫째에서 막내로 내려갈수록 빨라지기 마련이다. 이제 막 태어난, 잘 웃지 않는 아기를 보며, 혹시나 아기가 욕구불만족으로 남의 공포와 슬픔에 공감 못하는 연쇄살인마가 되면 어떡하나 상상 했던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처음 부모가 된 사람들의 책임감과 강박은 대체로 비슷하고, 간혹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의 청교도 마릴라를 능가할 수도 있다.





마릴라는 낭만으로 똘똘 뭉친 앤의 성장과 함께 누그러지고 늙어간다. 그 과정에서 각지고 건조한 말투와 행동이 조금 촉촉해진다. 웃고 울며, 자신의 감정을 알아보고 표현을 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 것은 아니다. 검소하고 성실하고 반듯한 마릴라는 여전하다. 소중한 앤의 사랑스러움이 그녀 마음에 물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변화는 저녁 노을에 사물이 물들 듯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마릴라의 마음에 이는 변화는 그녀의 말과 행동에 드러나기 이전, 초록 지붕 집 한 켠, 앤이 머물던 동쪽 다락 방에서부터 감지된다.



동쪽 다락방은 크게 바뀐 게 없었다. 벽은 여전히 하얗고, 바늘꽂이는 딱딱했으며, 의자는 변함없이 노랗고 반듯했다. 하지만 방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새로운 활기와 톡톡 튀는 개성이 방 전체에 스며 있었다. 여학생의 책이나 옷, 리본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이 방의 주인이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꾸는 온갖 꿈이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눈에 보일 듯이 배어 있었다. 휑한 방에 무지개와 달빛으로 엮은 아름다운 얇은 천을 걸어 둔 느낌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릴라가 방금 다린 학교 앞치마를 들고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왔다.

p.288


마릴라의 감정 역시 앤처럼 차차 증폭되기 시작한다.


비탈길을 정신없이 뛰어 내려가면서 마릴라는 앤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리 씨, 앤이 어떻게 된 건가요?" 긴 세월 동안 언제나 자제력 강하고 분별있게 행동했던 마릴라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면서 목멘 소리로 물었다.

P.328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마릴라는 잠깐 모호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나쁜 아이라면 나도 나쁜 사람이구나, 앤. 레이철과 있다 보면 나도 꼭 그럴 때가 있거든. 너도 말했다시피 난 가끔 레이철이 사람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잔소리를 해대지 않으면 훨씬 좋은 영향을 줄거라고 생각한단다. 잔소리를 못하게 하는 다른 계명이 성경에 있으면 좋겠다 싶고.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린드 부인은 훌륭한 기독교인이고, 좋은 마음에서 그러는 거니까. 에이번리에 그녀보다 친절한 사람은 없을 거다. 자기가 맡은 일을 요리조리 피하지도 않고 말이야."

p.434


울음을 터뜨린다.


"세상에, 앤, 언제 이렇게 컸니!" 마릴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말끝에 한숨이 따라 나왔다. 마릴라는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마릴라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어린아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진지한 눈빛을 한 키 큰 열다섯 살 소녀가 사려 싶은 조그마한 얼굴을 당당히 들고 서 있었다. 어린아이를 사랑한 만큼 눈앞의 소녀도 사랑했지만, 마릴라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슬픈 상실감이 밀려왔다.

그날 밤 앤이 다이애나와 함께 기도회에 간 뒤, 마릴라는 겨울날의 쌀쌀한 황혼 속에 혼자 앉아 마음껏 울음을 터뜨렸다.

p.436


동쪽 다락방은 이제 완전히 바뀌었다.


동쪽 다락방은 처음과는 딴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4년 전 그날 밤, 앤이 처음 발을 들였을 때는 사람이 견디기 힘든 텅 빈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방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금씩 바뀌었고, 마릴라가 체념하는 심정으로 모른 척해준 덕에 지금은 여자아이라면 갖고 싶어할 만큼 사랑스럽고 아기자기한 보금자리로 변해 있었다.
 
앤이 처음에 바랐던 분홍 장미를 수놓은 벨벳 양탄자와 분홍 실크 커튼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앤이 자라면서 꿈도 같이 자란 덕에 이제 그런 것쯤은 크게 아쉽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예쁜 깔개가 깔리고, 창문 저 위에 연한 초록색 모슬린 커튼이 부드럽게 드리워져 미풍이 불 때면 한들한들 바람에 날렸다. 앙증맞은 사과꽃 벽지를 바른 벽에는 금색과 은색 명주실로 짠 고급 실크 태피스트리는 없어도 앨런 부인이 선물한 멋진 그림 몇 점이 걸려 있었다. 스테이시 선생님의 사진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고, 선생님 사진 아래 선반에는 앤이 감성적인 마음을 담아 늘 싱싱한 꽃을 두었다. 오늘 밤에는 하얀 백합꽃이 줄지어 달린 긴 백합 한 송이가 꿈결처럼 은은한 향으로 방을 가득 채웠다.

p.456



초록 지붕 집은 다채로워졌다. 앤이 처음 왔을 때에는 꽃을 꺾어서 창가에 두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항상 싱싱한 꽃으로 꾸며져 있다. 벽은 언제부터 사과꽃 벽지였는지. 마릴라의 부모님이 지은 집은 앤을 품었고, 다채로운 빛깔을 내부에 채웠다. 마릴라는 그녀의 감정을 알아보고 때로 앤에게 표현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던 앤은 성적이 우수한 교대생으로 컸다.


'체념하는 심정으로 모르는 척'하면 앤 처럼 나의 아이들도 아름답고 바르게 자라날까. 꿈결처럼 은은한 향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는 백합 같이 피어날까. 빅토리아 시대가 품은 낭만, 마릴라가 품은 앤 처럼. 아이들도 종국에 책임감 있는 선택을 실행할까. 헛웃음이 나는 것을 보니 자신이 없다.


아이들이 앤 처럼 커가면서 공부를 잘 한다면. 나도 마릴라 처럼 관대하고 지혜로워지기가 수월할 것 같긴 하다. 현실과 책의 거리감이 있다. 더욱이 내게는 매슈처럼 무뚝뚝하지만 자상한 오라버니 대신, 별도의 감정 소모 및 돌봄, 애정까지 필요한 남편이 있다. 나 자신도 마릴라만큼 안정되어 있지도, 부지런하지도 않다. 아. 마릴라와 나의 사이는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초록 지붕 집과 대한민국 수도권의 어느 아파트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릴라를 계속 바라보게 된다. 경직됐던 그녀의 일상이 앤을 기점으로 다채로워진 것 처럼 내게도 어떤 변화의 스며듦이 감지된다. 내 안에 방치된 다락방이 있었는데, 알게 모르게 조금씩 이것 저것 채워지고 있는 것 같다. 마릴라라면 그것을 알아보지 않을까. 눈인사 한 번 해줄 것 같다. 내가 그거 알지하는 눈빛으로.



마릴라는 가끔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오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나 싶을 때가 있다.

 p.290





요즘 나는 도대체 고전 읽고 쓰기 하기 전에는 뭐하고 살았나 싶을 때가 있다.


나의 하루가 이 읽고 쓰기로 정점을 찍는다. 초등학교 재학중인 아이들 일, 가족 대소사, 짧게 일하는 회사생활로만 어떻게 살아왔는지 과거의 시간들이 아득하다. 옛날 이야기 읽고 쓰잘데기 없이 쓰는 것이 이렇게나 재미있다니 놀랍다. 읽고, 쓰기를 지속하는 내 모습이 신기하고 기분도 꽤 좋다. 읽어서 뭐하나, 써서 뭣에 쓰나 싶던 막연한 막막함도 점차 희미해진다. 읽어주는 이 몇 안되는 끄적거림인데. 이렇게 소소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상이 주는 충족감, 그 파장이 스며드는 삶이 보인다.


아이가 처음 생겼을 때에도 그랬던가.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그것은 꽤 강제적이고 강압적이서 변화로 인한 즐거움보다 충격과 후폭풍이 컸다. 저녁 외출, 프라이빗한 샤워 시간, 4시간 이상 이어지는 평범한 수면 같은 것들이 불가능 했었으니까. 그 평범한 일상의 요소들이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수유 루틴은 내가 유전자 전달 도구에 불과하다는 자괴감도 줬다. 어느 순간, 부모의 부모의 부모 세대로부터 이어진 고대의 시간, 삶의 경이를 체험하는 찰나를 경험하긴 했다. 그 때의 변화는 완전히 나를 장악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변화는 강압, 장악과 거리가 멀다. 천천히 자발적으로 번져간다. 초록 지붕 집의 동쪽 다락방도 서서히 달라졌다. 셀 수 없이 많은 노을에 물들었고, 앤의 언어와 웃음과 눈물로 채워졌다. 그렇게 그 곳은 초록 지붕 집의 심장이 되었다. 나의 일상에도 그 중심에 읽고 쓰기가 자리잡았다. 같은 곳에서 같은 가족과 회사에 머무르고 있지만. 내부에서 뭔가 달라지고 있음을 안다. 느낀다. 내게도 앤이?


마음에 창문이 난 다락을 만들어 본다. 글쎄 꼭 다락이 아니어도 될 것 같다. 언제든 이를 수 있으면 좋겠고. 창문이 있고, 나무가 보이면 좋지 않을까. 샘이 가까운 숲속 동굴이나 아늑한 땅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조용히 앉아서 끄적일 수 있는 책상과 의자, 멋진 펜이 있으면 더 좋겠다. 내 끄적임이 머무는 브런치나 블로그가 그 공간이 될 수도 있겠다. 이왕이면 창문이나 출입구 저 쪽에 가끔 신호를 주고받는 누군가가 있으면 더 더 좋겠다. 앤과 다이애나가 그리 한 것 처럼.






Unsplash - Anthony T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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