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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ㅑㅇ Jul 23. 2023

대도시의 어스름 속에서

<위대한 개츠비> 서른은 오는가

 
 
고전보다는 요즘 소설 같았다.
 
스콧 핏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는 잠들지 않는 도시의 감성이 감각적으로 묻어난다. 파티, 옷, 학력, 이주, 자동차, 연인, 전화, 결핍, 돈, 그리고 서른에 대해 얘기한다. 한반도 일제 강점기였던 1920년대에 미국 뉴욕에서는 이런 감성이 가능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주요 등장인물은 5명 정도. 파티광인 듯 아닌듯한 개츠비, 개츠비와 한 때 연인이었던 데이지, 데이지의 부자 남편이자 운동선수급 몸짱 톰, 데이지의 여자 사촌인 프로골퍼 조던, 그리고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별 볼 일 없는 닉이 나온다. 닉은 데이지의 먼 사촌이며 톰과 예일대 동창으로, 어쩌다 개츠비의 대저택 옆집에 살게 됐다. 이야기는 닉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닉은 이제 막 뉴욕 인근으로 이사 왔다. 데이지와 톰을 제외하면 연고가 없는 도시였다. 막 뜨기 시작한 금융가에서 채권판매업에 합류했다. 점심은 업무 동료들과 혼잡한 식당에서 함께 먹었고, 저녁은 예일클럽에서 혼자 먹었다. 식사 후엔 클럽 도서실에서 업무 관련 서적을 읽었고, 회사 경리 부서 직원과 잠깐 연애를 하기도 했다.

닉의 연애는, 대부분의 별 볼 일 없고 흘러가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흐지부지 끝났다. 딱히 할 일이 없으면 산책을 했다. '날씨가 괜찮으면 달콤한 밤공기를 음미하며 매디슨 애비뉴를 따라 머리힐 호텔을 지나 33번가 너머 펜실베이니아 역까지 걸어가곤 했다.' 뉴욕이라는 활기찬 대도시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고, 간혹 외로움이 몰려왔다. 이 같은 일상은 매우 우울하기도 하고 괜찮기도 했다.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 밤이면 역동적이고 모험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남자와 여자,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며 눈을 어지럽히는 이 도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는 5번가를 걸어 올라가 군중 속에서 신비로운 여자 하나를 찾아내 아무도 모르게,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그 여자의 삶으로 들어가는 나만의 공상을 즐겼다. 상상 속에서 나는 그녀들의 집까지 뒤쫓아가고, 그러면 그녀들은 어두운 거리 모퉁이에서 몸을 돌려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문을 열고 따뜻한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는 것이었다.

대도시의 찬란한 어스름 속에서 (At the enchanted metropolitan twilight) 나는 간혹 저주받은 외로움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들 - 해 질 무렵, 거리를 서성이며 혼자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러면서 자기 인생의 가장 쓰라린 한 순간을 그대로 낭비하고 있는 젊고 가난한 점원들-에게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p.75 <위대한 개츠비> 스콧 핏츠제럴드, 문학동네

 

이 부분을 처음 읽던 때가 오월 하순 저녁 9시, 지하철역 인근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혼자였다.

근처 테이블에는 20~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3~4명이 업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김 대리가 그때 이 정도는 해줘야지." 누군가의 어렴풋한 기대와 실망이 느껴졌다. 테이블 분위기가 험악하진 않았고 다음번에 잘할 것을 가볍게 다짐받는 느낌이었다. 재즈 풍의 음악이 흐르는 그곳에는 몇몇 사람들이 더 있었다. 경쾌하면서도 나른한 음악에 기대어 그 시간 그곳에는 어렴풋한 실망과 기대의 가능성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레는 관계를 시작했을지 모를 저 남녀는 서로에 대한 기대와 실망의 줄다리기 중일 것이다. 혼자 앉아 인터넷 강의를 보며 책에 뭔가 열심히 적고 있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현재에 대한 실망이 점철된 마음일지도 모른다. 이 시간쯤 마주칠지도 모를 누군가를 헛되이 기다리는 이도 카페 어딘가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괜히 마음이 들떠서 '자기 인생의 가장 쓰라린 한 순간을' 부유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늦은 밤 곧 망각 속으로 사라질 이들의 이야기와 흥분을 공유하는 상상을 나 혼자 해봤다.

기억 속 도시가 소환됐다.

반짝이는 도시의 밤은 이런 기대와 공허로 장식되어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빛들이 명멸하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태양에 묻혀버릴 빛들. 해는 이미 졌지만, 오늘 하루의 정점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어렴풋한 기대가 있었다.


극적효과를 위해 술을 마시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감정을 뻥튀기하고, 음악을 크게 틀고 강변도로를 드라이브하거나, 별이 보이지도 않는 길거리를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도시의 밤은 향수 광고에 나올 법한, 화려하지만 실체가 없는 미지의 연인 같았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보이는 1920년대 뉴욕은 비슷한 느낌이다.

옷도, 음식도, 멋진 것도, 맛있는 것도 많다. 즐길거리는 풍족하다. 그러나 가게에 가득한 물건이, 길거리에 즐비한 사람들이 전부 인연은 아니다. 사람들마다 결핍이 있다. 스스로는 그게 뭔지 잘 모른다. 희미하지만 간절한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현재에 필사적이다. 톰은 대학 운동선수시절 이후 다시 오지 않을 흥분상태를 찾아 떠돌았다. 개츠비는 군입대하면서 헤어진 부자 연인 데이지를 찾아 나아갔다. 조던은 거짓말할 필요 없는 절대 유리한 고지를 찾아다녔다. 데이지는... 멋진 셔츠가 부족했었나.
 
술도 많이 마신다. 당시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시행되었다지만, 사람들은 집이나 호텔에서 부어라 마셔라 했다. 개츠비의 저택으로는 금요일 저녁마다 칵테일용 레몬이 궤짝으로 들어갔고, 월요일마다 쓰레기가 되어 나왔다. 나의 기억 속 도시도 술을 진탕 마셨다. 너도 나도 이번 한 주의 정점을 향해, 혹은 취해서 웃기 위해, 혹은 망가지기 위해, 경쟁적으로 마셔댔다.
 
술, 음악이나 드라이브 같은 것에 심취해서, 그러니까 들뜬 상태로 젊음은 서른을 꿈꾼다. 서른. 막상 되어보면 별 것도 아닌데, 현재의 들뜬 불안함이 해소될 것만 같은 좌표가 30, 서른이었다. 서른쯤 되면 인생이 어떤 형태나 루틴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마흔이 넘어서 돌이켜보니 우습고 우습다.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인생은, 부유하는 것이 운명이다.
 
군입대한 개츠비를 기다리던 어린 데이지도 아직 몰랐다. 형태를 갖춘 서른의 삶이 그저 당장 자신 앞에 나타나길 바랐다.


 

그녀는 자기 인생이 당장 그럴듯한 모습으로 자기 앞에 나타났으면 하고 바랐다. 결정은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내려주어야 했다. 사랑, 돈, 재고의 여지가 없는 현실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었고, 그것들은 모두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다.

She wanted her life shaped now, immediately - and the decision made by some force - of love, of money, of unquestionable practicality - that was close at hand.


p.151 <The Great Gatsby> F.Scott Fitzgerald, scribner / p.187 문학동네



그래서. 그렇게. 돈 많고 묵직한 현실감이 느껴지는 톰과 결혼했지만, 그 삶에도 결핍이 있긴 마찬가지.


톰은 바람둥이였다. 딸을 낳는 순간에도 다른 여자를 만났다. 마음 정착할 곳 없던 데이지는 5년 뒤 조던과 닉을 통해 개츠비와 재회했다. 그가 멋진 셔츠를 한가득 소유한 부자가 되어 돌아왔지만, 행복도 잠시였다. 그녀 인생에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사람이 죽는 뺑소니 사고를 냈다. 개츠비의 희생으로 사고는 덮였다. 하지만 알 수 없다. 언제까지 묻혀있을지.
 


몸과 마음의 정착을 위해 모험을 기대하는 마음은 책 속이나 책 밖이나 시대불문 만국 20대 공통 희망사항 같다. 아니, 솔직히 40대도 바란다. 설레는 모험과 안정적인 정착. 그런 게 동시에 가능하긴 한 걸까. 이제 여기에 정착했다는 안정감이 드는 순간은 도대체 언제일까. 인정, 안정, 모험. 이런 결핍이라면 개인과 감정의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을 것 같다. 집이 있고 직장이 있어도, 마음 한켠에선 언제나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먹고살 것인지를 생각한다. 내게 자극이 될 것도 탐색한다. 지금도 여전히 끊임없이.

 

<위대한 개츠비>는 뉴욕에서 벌어진 일을 담고 있지만, 그 속에 뉴욕 토박이는 없다.


개츠비는 미네소타, 톰과 닉은 시카고, 데이지와 조던은 루이빌 출신이다. 닉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뉴욕을 동경하면서도 낯설어했다. 그가 동부지역 주민임을 확신하는 순간이 기억난다. 그의 집이 있는 뉴욕 인근의 웨스트 에그에서 누군가가 길을 물었던 때다. 닉이 길을 알려줬고, 그는 비로소 시민권을 부여받은 기분이었다. 이사해 본 사람은 잘 알지 않을까. 이 기분, 나도 경험한 바 있다.

 
닉은 서른이 된 후 고향으로 돌아간다.


동부의 여름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그가 중서부의 겨울로 돌아간 후 마무리된다. 그는 추운 고향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자신을 스스로 증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아주는 고향의 분위기가 두 다리를 땅에 딛고 서게 했나 보다. 개츠비 이야기를 집필했으니까 말이다.





 
그 오월 하순의 따뜻하고 서늘한 밤. <위대한 개츠비>를 보다가 카페에서 나와 집 가는 길에 술 취한 남자가 거리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봤다.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그는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저 사람은 무슨 일로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밤거리를 절룩거리며 쏘다니고 있는 것일까.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같은 밤을 서성이는 걸까 싶었다. 그러나 금방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잊어버렸었다. 그의 서른도 스쳐 지나갔었겠지.


늦은 밤 도시.
따뜻한 어둠의 장막에는
이런 이야기쯤 수두룩하게 스쳐간다.  


Edward Hopper - Automat (1927) / Automat은 무인카페 같은 곳. <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표지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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