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데이

14 de febrero

by 이재이

멕시코에서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는 Dia del Amor y la Amistad이라고 부른다. 번역하자면 사랑과 우정의 날이다. 그러니까 발렌타인데이는 연인들만의 날이 아니라, 친구들의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2월 14일에 멕시코 학교에서는 작은 파티를 하기도 한다. 내가 기억하는 멕시코의 2월 14일은 이렇다.


2월이 되면 학교 교실은 핑크와 빨강으로 도배가 된다. 물론 여기저기 하트모양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마니또랑 비슷하게 선물교환도 한다. 먼저 반 전체의 이름을 종이에 적고 모든 학생들이 한 장씩 뽑는다. 그 종이에 적혀있는 이름이 2월 14일에 선물을 줘야 하는 인물이다. 선물 가격은 50페소 이하, 원으로 환율 하면 대략 5천 원 정도였다 (그 당시 환율). 2월 14일이 되면 수업은 일찍 끝나고 남은 시간 동안 파티를 하면서 선물교환이 시작된다. 대부분 초콜릿이나 사탕을 사 왔던 기억이 난다.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이 나와서 정성스럽게 편지도 썼던 친구도 있었고, 조금 싫어하는 친구의 이름이 나와서 대충 검은 비닐봉지에 선물을 사 오는 친구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 선물을 하나씩 받았기에 다들 이 날을 좋아했었다.


발렌타인데이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특별한 기억이 하나 있다.


중학교 1학년까지는 멕시칸 학교를 다니다가, 중학교 2학년 올라가면서 멕시코에 있는 미국 미션스쿨로 전학을 갔다. 그 학교에서는 발렌타인데이가 되면 총 3가지 이벤트를 했는데, 하나는 중고등학생들 전부 참여할 수 있는 일종의 파티였다. 이 파티는 주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계획하는 파티로, 매 해마다 달랐다. (참고로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는 어워드 쇼 테마로 전부 레드카펫 패션으로 오고 실제로 레드카펫도 깔고, 심지어 상도 만들어서 종목별로 학생들이 투표해서 상도 줬었다.)

또 다른 이벤트는 친구들에게 사탕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이것도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진행을 했는데, 친구들에게 전해줄 사탕을 미리 주문을 하고, 카드를 작성해서 2월 14일에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대신 전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날까지 누가 누구한테 몇 개를 받을지는 몰랐다. (이 카드를 통해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하는 친구도 몇 명 있었다.)

마지막 이벤트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벤트였는데, 이틀 동안 진행되는 게임이었다. 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이 게임을 간단하게 "하트 게임 (the Heart Game)"이라고 불렀다. 게임 규칙은 간단했다. 하루동안 이성에게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하루는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다음 날에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혹은 반대로)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말만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체를 하면 안 됐다. 그러니까 몸짓, 손짓 전부 안 되는 것이었다. 등교할 때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 하트 목걸이를 받고, 이성에게 말을 하거나 어떤 제스처를 해서 소통을 하면 그 하트 목걸이를 그 사람한테 줘야 했다. 어찌 보면 마음(heart)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이 게임을 내가 정말 좋아했는데, 좋아했던 이유가 서로 하트를 빼앗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웃겼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도 포함해서. 어떤 학생들은 서로 하트를 얼마나 많이 모을 수 있는지 경쟁하기도 했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하트를 빼앗으려고 온종일 그 한 사람만 따라다니며 말을 걸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부끄럽지만 나도 그랬다.) 물론 수업시간에는 선생님의 재량으로 게임을 멈출 수 있지만, 대부분의 선생님들도 게임을 즐겼기 때문에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수업시간에 장난치면 혼나지 않는가... 그래서 멈출 필요를 못 느꼈을 수도 있다.)

게임을 하면서 재밌는 에피소드들도 참 많았다. 이 게임을 처음 했던 중학교 2학년 때, 어떤 선배 한 명이 비닐봉지에 바람을 넣고 내 귀에 대고 펑! 하고 터트린 적이 있다. 나는 갑작스럽고 큰 소리를 정말 싫어하고 무서워하기 때문에 화가 나서 뒤돌아봤지만, 내 하트를 잃기 싫어서 꾹 참고 무시하고 가버렸다. 그때부터 친구들이 내가 독하고 무섭다고 했다. 또 한 번은, 자신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학생 한 명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게임하고 있는 것을 까먹고 그날 처음 마주쳤으니 "내가 먼저 인사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인사를 하자 자신의 손바닥을 나에게 보이면서 "나한테 말 걸지 마!"라고 하고 지나갔다. 마침 옆에 같이 있었던 여학생이 방금 얘한테 말했으니 하트를 줘야 한다고 해서 얼떨결에 하트를 받았다.

5년 동안 이 게임을 하면서 나는 총 3명의 하트를 받았는데, 전부 얼떨결에 받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 게임에 참여했던 고등학교 3학년 때, 2교시 수업 중간에 화장실을 가던 길에 학교에서 제일 조용한 남자 중학생과 마주쳤는데 목에 하트가 안 보여서, 의아한 마음에 "하트 잃었어?"라고 물었더니, 옷 안에서 꺼내면서, "아니, 여기 있어."라고 대답을 한 것이다. 사실 이 게임의 진행도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하는 거라서 나는 그냥 혹시나 해서 물은 거니 하트 안 줘도 된다고 했지만, 그 친구는 그래도 룰은 룰이라며, 자기도 이래야 마음 편하다면서 하트를 줬다. 화장실 갔다 교실에 돌아왔는데 선생님도 그렇고 다른 친구들도 그렇고 도대체 이 학생의 하트는 어떻게 받은 거냐면서 궁금해했다. 그리고 같은 날, 마지막 교시인 음악수업에서는 간단한 쪽지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우리 학교의 음악수업은 사실 합창단으로, 한 학기에 한 번씩 하는 공연을 위해 수업시간에 음악 이론을 조금 배우고 곡 연습을 했었는데, 그날은 배웠던 음악이론 쪽지 시험이었다. 쪽지시험이 끝나고 나는 피아노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는데, 시험 끝난 다른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듯이 고개를 까딱 했는데, 그 학생이 똑같이 고개를 까딱하지 않나... 까딱하자마자 그 학생을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깨닫고 한숨을 쉬면서 나한테 자신의 하트를 건네주었다. 삼십 분만 지나면 게임이 끝나는 것이었는데... 얼마나 아쉬웠을까... 선생님이 의아하면서 나한테 작은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서 답했더니 선생님도 그 상황이 어이없었는지 웃으셨다.

이렇게 나는 13년 동안 발렌타인데이는 사랑과 우정에 관한 추억들이 많고, 그래서 여전히 발렌타인데이가 되면 남자친구뿐만이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초콜릿이나 사탕 선물을 돌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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