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남자들의 수다

봄날은 간다

by 옥곡재

여자들이 전화로 두세 시간 수다를 떨고, 중요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고 한다는데, 이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남자들의 수다 또한 만만하지 않다. 특히 퇴직한 60대에게는 더욱 그렇다.


L은 나와 현재의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 본인은 퇴직했으나 아내는 매일 출근한다. 또한 자식 농사가 늦어 환갑이 지나서도 자식 뒷바라지도 해야 한다. 아내가 출근하니 집안일이 하나둘씩 넘어오고, 언젠가부터는 거의 전담이 되다시피 했다.


꽃피는 봄날, 소낙비가 쏟아지는 여름날, 가을 향기 가득한 날, 햇볕이 따뜻한 겨울날 오후 가끔씩 만나 커피 한 잔 하다가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저녁 할 시간이야." 하고는 급히 일어나 집으로 달려간다.

이제 전업주부로서의 노하우를 공유한다. 싱크대 배수가 잘 안 될 때는 이렇게 하면 해결되고, 냄비의 오랜 때는 저렇게 하면 지워지고, 어디를 가면 뭐가 싸고, 김장에는 뭘 넣고 해야 맛있고....... 끝이 없다.


L이 꽤나 진지하게 물었다.

"요즘 식구들 입맛이 없다는데, 무슨 반찬을 하면 좋아?"

"글쎄,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니 뭐가 맛있다 단정할 순 없지만, 입맛이 없을 땐 들기름김치찜이 딱이지."

"그래? 어떻게 하는데?"

"간단해. 뚝배기에에 국물멸치 몇 마리 깔고, 냉장고에 김장 배추김치 남은 거 적당한 크기로 썰어 멸치 위에 얹어. 그리고 물을 자박자박하게 붓고 센 불로 한번 끓인 다음 불을 약하게 줄이고, 들기름을 넉넉하게 넣고 김치가 들기름을 먹을 때까지 끓여주면 끝, 쉽지? "


L은 들기름김치찜을 만들어 먹은 다음날, "신김치 넣고 멸치랑, 들기름만 넣고 졸였는데 신기하게도 맛있네. 마누라도 아이들도 개 맛있다고 잘 먹더라고." 하고는 웃는다.


어느 날은 L이 "식구들 순댓국 좋아해?" 물었다.

"우리 식구는 많이는 안 먹어도 음식은 안 가리지. 왜? 집에서 만들려고?"

"만들긴? 순댓국은 사 먹는 거지. 우리 처갓집 마을에 5일장이 서는데, 장날마다 순댓국 장사가 오거든. 한 번 먹으면 다른 순댓국은 못 먹어. 끝내주거든. 마침 내일 장날인데 처가에 갈 일이 있으니 사다 줄게."


이튿날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아침부터 순댓국을 핑계로 만나 점심으로 국수 한 사발하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왔다. 이런 날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저녁거리를 손에 들고 가니 부담이 없다.


포장을 열어보니, 굴물 따로 순대와 고기 따로 양념장도 모두 따로다. 고기 양은 어찌나 많은지 여느 순댓국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직도 장날 인심은 옛날 그대로 인가보다. 국물을 먼저 팔팔 끓이고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 후 순대와 고기를 넣고 다시 한번 끓였다. 원래는 토렴을 해야 제맛인데.


아들과 아내도 순댓국 맛에 만족한 표정이다. 순댓국은 현장에서 먹을 때는 냄새가 나는 줄 모르고 먹지만 사다가 집에서 먹으면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희한하게도 이 순댓국은 냄새도 없고 자극적이지도 않다. 고기도 얼마나 많은지 2인분을 셋이 먹고 남아 다음날 점심으로 혼자 나머지를 다 먹었는데도 질리지 않았다.


L에게 전화를 걸어 순댓국 맛이 대박이라고 시작한 수다가 김장 고춧가루로 마무리될 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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