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학창 시절까지 살았던 동네를 처음 떠났던 건, 첫 번째 취업에 성공하고 나서 3년쯤 후였다. 가족과의 삶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군대를 제외하고는 항상 가족의 울타리에서 살아온 나에게, 독립해서 혼자 살아보는 것에 대한 의지는 꽤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3년 동안 월급을 정말 성실하게 모았다. 출퇴근 시간이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것은부모님에게 독립을 이야기하기에정말 좋은 핑계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독립을 했고, 서울 시내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5년을 살았다. 그사이에 나는 한 번의 이직을 하고, 두 번 근무지가 바뀌었다. 하지만 모두 멀지 않은 곳이었고, 딱히 이사를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5년짜리 적금을 타던 날. 난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통장에 찍힌 꽤 큰 금액의 돈은 그동안 내가 살아온 지루한 삶의 증거였고, 소박한 소비의 보상이었다. 처음에는 근사한 수입차를 생각했다. 예전보다 수입차가 많이 저렴해진 건지, 국산차들의 가격이 많이 올라간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높지 않은 금액으로 나름 근사한 차를 살 수 있었다.
벤츠를 처음 계약하던 날, 젊고 잘생긴 딜러가 나에게 한마디 했다.
"사장님의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저 사장 아니에요"
"어차피 되실 텐데요. 뭐"
순간, 정신이 들었다. 지금 내 삶에 근사한 벤츠가 어떤 변화를 줄 수 있을까? 나의 8년은 이미 소박한 소비의 습관이 들어있었고, 내 주변 관계들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 '근사한 벤츠'는 아닌 듯했다. 나는 며칠을 더 고민하고 계약을 취소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집을 샀다.
서울까지 차로 1시간 10분. 대중교통으로 2시간 반. 다행히 지금 다니는 회사와는 45분. 작은 중고차를 할부로 샀다. 그저 지금까지의 나의 삶과 잘 어울리는 적당히 오래되고 적당히 광이 나는 자동차였다.
처음 이 집의 광고를 보게 된 것은 외근 후 복귀하는 길에 본 현수막이었다.
"당신이 기다리던 그림 같은 타운하우스가 바로 여기!"
어떤 단어가 나의 마음을 움직인 걸까? 무작정 찾아간 모델하우스에서 보았던 근사한 타운하우스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모습이었다. 1층에 딸린 작은 정원과 2층의 테라스는 그들이 말하는 가든파티나 홈파티를 열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 집이다"
계약을 하고 주변 지인들에게 자랑을 했다. 내 명의의 근사한 집을 계약했노라고. 비록 대출이 더 많긴 하지만 충분히 갚을 수 있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넌 속은 거다. 타운하우스는 사는 순간부터 집값이 떨어진다."
"거기서 평생 살 거 아니면 들어갈 곳이 못된다."
"보통은 작은 건설회사라 마감이 안 좋다. 나중에는 다 직접 수리해야 한다."
"은퇴한 노부부들이나 사는 곳을 왜 들어가냐?"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타운하우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처음 알았다.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이 좋았고, 집으로 돈을 벌 욕심이 없었으며, 당장 결혼할 대상도 마음도 없어서, 그들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나에게 내 집이 생긴 것이다.
이사오던 날. 비루한 나의 삶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근사했던 모델하우스는 그들이 잘 세팅해 놓은 가구와 장식품들로 만들어진 이미지였다. 혼자 사는 작은 오피스텔에는 대부분의 가구가 옵션으로 딸려 있었고, 그나마 내가 구매한 것들은 중고나라를 통해 구매한 허름한 것들뿐이었다. 이사를 하기 위해 내놓은 나의 가구들과 다른 사람들이 버리려고 내놓은 폐가구들이 구분이 되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40평대 타운 하우스에 들어간 나의 짐이라고는 허름한 싱글 침대 하나, 중고생이 쓰던 책장 겸 책상 하나, 삐그덕거리는 행거가 다였다. 근사한 소파도 널찍한 식탁도 커다란 TV도 없었다.
이사는 1시간도 안돼서 끝이 났고, 식사를 이야기하기에도 민망한 시간이기에 캔커피 하나로 인사치레를 하고 이삿짐센터 사람들을 보냈다. 사람들을 보낸 나는 텅 빈 집에서 짜장라면 하나를 끊였다.
"이삿날은 역시 짜장면이지."
그리고 책상 의자를 들어다가 2층 테라스에 놓았다. 테이블도 없이 행주로 감싼 양은 냄비를 한 손에 든 채로 나는 짜장라면을 먹었다.
"그래도 내 집이다."
나는 우선 청소를 시작했다. 오피스텔에서야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해도 30분이면 끝나던 청소가 고스란히 한나절이 걸렸다. 힘겨운 청소에 땀을 잔뜩 흘린 후,커튼도 없는 거실에서 창문을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나름 기분이 근사했다.
"그래도 커튼은 해야겠다"
세줄로 구성된 타운하우스는 동마다 가격이 달랐다. 창의 방향은 모두 남쪽이었으나 아무래도 한 면은 숲을 보여주는 양쪽 라인과는 다르게 양면은 다른 집에 막혀있고, 전면에는 공사장이 보이는 이 집만 제일 저렴했다. 대출로 남은 금액을 감당해야 하는 나로서는 5,000만 원이나 비싼 다른 동들을 선택할 수 없었다.
2층 테라스 옆에 있는 중간방을 침실로 쓰기로 했다. 방이 4개나 있고, 어차피 혼자 사는데 무슨 방을 써도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이 집의 최고의 장점인 테라스를 좀 더 자주 활용하고 싶었다. 아직은 테라스에 테이블도 의자도 없으니, 나가고 싶을 때 의자를 쉽게 옮길 수 있는 이 방이 제일 좋았다. 나름 나머지 공간을 분류하기 위해 행거는 2층의 작은 방에 두기로 했다.
"여기가 드레스 룸이다."
1층 안방에 드레스룸이 딸려 있었지만, 내가 가진 옷을 걸고 보니 너무 많은 공간이 남았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느니 원래 가지고 있던 행거로 새로운 드레스 룸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 중고나라에 좋은 책장이 나오면 하나 사서 큰방에 둬야겠다. 언젠가는 그곳에 근사한 서재를 만들 거니까"
아직도 비어있는 곳이 너무 많은 집이었지만, 앞으로는 적금도 들지 않고, 대출금을 갚으며 조금씩내 공간을 꾸며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커다란 하얀 도화지를 얻은 기분이었다. 설레었다.
타운하우스에서의 첫날밤은 기대와는 다르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싱글 침대를 놓은 침실은 원래 살던 오피스텔의 크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나름 이사를 하고 청소를 하느라 몸을 쓴 탓인지 피곤함이 나의 밤을 깊이 눌렀기 때문이다. 다만, 처음 맞이하는 아침은 조금 달랐다. 기본적으로 집이 너무 넓어진 것이다. 나는 드레스룸과 화장실을 오가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운동이 보충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준비를 했다. 예전보다는 30분 먼저 맞춰놓은 알람 덕에 예상보다 조금 일찍 출근 준비를 마칠 수 있었지만, 오피스텔에서 움직이던 동선과는 너무 많은 차이가 있어서 공간 구성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는 차로 45분이 걸렸다. 예전 오피스텔이 대중교통으로 30분이 걸리던 것을 생각하면 15분 정도 멀어진 것이다. 예상시간보다 10분 정도 먼저 차에 탄 나는, 첫날이니 조금 일찍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오늘은 간부회의가 있는 날이기 때문에 늦지 않게 도착해서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도 있었다.
"자! 출발해볼까? 어? "
헉.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비록 8년이 다돼가는 중고차였지만 3만 km밖에 타지 않은 차였다. 분명히 나에게 차를 판 중고차 딜러는 아무것도 손볼 것 없이 바로 타기만 하면 된다고 자신만만하게 키를 넘겼었다. 그런데 이사한 첫날, 그것도 월요일 아침부터 차가 고장이 나다니. 솔직히 이 상황에는 답이 없다. 이 곳이 차로는 45분 거리이지만 대중교통으로는 2번을 갈아타고 2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이다.내가 만약 대중교통을 선택하게된다면, 나는 강제로 오전 연차를 써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자. 여하튼 당황하지 말고, 보험을 부르자, 긴급출동 서비스로 바로 와주면 어떻게 늦지 않을지도 몰라"
타운하우스의 단점은 여기서 또 나를 공격했다. 시내와 떨어져 있는 타운 하우스에,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안 사는 곳이다 보니, 긴급출동도 30분이 걸린다고 했다. 지금 시간에 30분을 기다려서 수리를 한다고 해도 나는 적어도 한 시간은 지각인 샘이다. 아마 지각인 것을 알면 본부장 성격상 나는 앞으로 한 달 동안 테라스의 야경만 보게 될 수도 있다.
"방전됐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언제부터 나와있었는지 모를, 아침부터 선글라스를 쓴 옆집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째, 어젯밤에 라이트가 켜있더라니"
"예?"
"방전된 거라고! 차 처음 샀어?"
"예? 아. 예. 처음.."
"기다려"
옆집 아저씨는 심상치 않은 실크 샤워가운을 두른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누구였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누군지 떠오르기도 전에 옆 동 주차장에서 구형 벤츠 한 대가 부드럽게 나오고 있었다. 내가 멍하게 보고 있는 사이, 옆집 아저씨는 내 차 앞에 자신의 차를 맞대고는 차에서 내려 트렁크 쪽으로 가며 나에게 말했다.
"본네트 열어"
"예?"
"뭔 말귀를 못 알아들어! 본네트 열라고!"
"아 보닛이요.. 그게 그러니까"
차를 처음 사러 갔을 때도 나는 열어보지 못했다. 같이 가주었던 박 과장님이 두리번거리면 열었던 기억이 나긴 했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큰소리를 내고 있으니 나는 더 헤매고 있었다.
"차 처음 샀어? 왜 이렇게 헤매?"
" 아까 처음 샀다고..."
"아! 비켜봐!"
아침부터 선글라스에 실크 샤워가운을 걸친 옆집 아저씨가 화를 내며 내차에 들어왔다. 그 아저씨는 한 번에 보닛 스위치를 찾아서 열고는 익숙하게 점프선을 들고 배터리에 연결했다. 그리고 나머지 선을 자신의 오래된 벤츠에 연결하고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시동 걸어"
"아. 예."
시동은 쉽게 걸렸고, 아저씨는 아무런 말도 없이 점프선을 정리하더니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나는 시동을 켠 채 잠시 멍하게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본 옆집 아저씨가 차에 타서 크게 클락션을 울리고 나서야 나의 정신이 돌아왔다.
"안 바빠?"
"아! 바빠요."
"시동 꺼먹지 말고 쭉 가. 운전은 할 줄 알지??"
" 아. 예. 운전은... 하..죠.."
그 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아저씨가 누군지 떠오른 건 회사에 거의 도착할 때쯤, 라디오에서 나온 옆집 아저씨의 노래를 듣고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