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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종 Jul 03. 2020

뭉개진 유기농 바나나 하나

그건 아빠 거야

 아내는 요즘 요리에 푹 빠져 있다. 원래 요리하는 것을 싫어하지도 않았고, 실력도 나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신기한 일은 아니다. 다만, 요리하는 것은 내가 더 좋아하기도 하고, 솔직히 내가 만든 요리가 더 맛있는 편이기 때문에, 나보다 아내가 요리하는 것이 우리 집에서는 조금 덜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했다. 그런데 그러던 아내는 아이가 이유식을 먹기 시작하자 주방에 본격적으로 드나들기 시작했고, 아이의 이유식을 넘어 가끔 나의 퇴근 시간에 맞춰 밥을 차려주기도 한다.

 아내의 열의가 얼마나 대단하냐면, 자주 도서관에 들러 이유식에 관련된 책을 빌려와서 꼼꼼하게 읽기도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각종 블로그나 유튜브를 보며 연구하기도 한다. 그런 정보들을 참고로 매일매일 아이에게 먹일 이유식의 식단을 짜곤 하는데, 어찌나 다양한 방법들을 고민하는지, 처갓댁에 있던 오쿠까지 가져와서 아이를 위한 요리들을 만든다.

 실력은 날로 늘어가고 있어서, 간이 없는 것만 빼면 어른이 내가 먹어도 맛있는 이유식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아이가 성장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점점 더 맛있게 잘 먹고 있다. 아내가 아이를 위해 준비하는 것은 꼭 조리된 이유식 만은 아니어서, 다양한 과일이나 야채들을 시기에 맞게 주기도 하고, 가끔 응가를 잘하지 못하는 경우 때문에, 유산균이나 요거트를 주기도 한다.

 아이는 엄마의 마음을 잘 아는지, 주는 것마다 아주 맛있게 그리고 너무 귀엽게 잘 받아먹는다. 아마 아내는 그 모습이 이뻐서 더 자꾸 그렇게 다양한 것들을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주는 것 같다.

 물론, 모두 만들어 먹이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긴 해서, 가끔 마트에서 기성 제품을 사 먹이기도 했고, 배달시켜 먹는 이유식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결국은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아내가 직접 만들고 준비한 것으로 대부분 먹이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 가정과 냉장고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발생한다.

"우리 아기 때문에 열심히 장을 보긴 하는데, 애가 먹는 건 진짜 다 코딱지만큼이라서 남는 게 너무 많아."

 아이를 위해 다양한 식재료들을 사고는 있는데, 사는 양에 비하면 우리 아이는 아직 너무 조금 먹는다. 그렇다면 그 모든 식재료는 냉장고에서 점점 신선함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차라리 만들고 남는 것들을 부모가 바로바로 먹으면 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연히 우리가 아이를 위해 사는 것들은 유기농, 무항생제, 친환경, 무농약 등.. 딱 봐도 더 비싼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막 먹지 못한다. 심지어 이유식이라는 것이 되도록 다양하게 골고루 먹이는 것이 좋기 때문에, 거의 항상 많지 않은 양을 자주 만들게 된다. 그러다 보면 꼭 내가 미리 먹었던 것들을 찾게 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신선한 상태의 남은 식재료들은 먹을 수 없게 된다.

 요즘 우리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바나나와 블루베리인데, 그중에 바나나 같은 경우는 일반 마트에서 유기농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마트를 들릴 때마다 과일코너에 가서 꼭 바나나를 살펴보곤 하는데 반갑게 발견한다고 해도 보관이 쉽지 않은 과일이다 보니 많이 사 오지도 못한다. 다행히 요즘에는 인터넷 구매가 용이해서 대형마트에서 배송을 신청할 때, 있다면 유기농 바나나를 한 송이씩 주문하곤 한다. 보통 한송이를 사면 1주일 정도는 아이에게 간식으로 줄 수 있는데, 그 기간 동안은 내가 바나나가 먹고 싶어도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물론 아내는 먹으라고 하고, 먹어도 된다고 이야기 하지만 정작 본인도 그 기간에는 잘 먹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바나나가 있어도 잘 안 먹게 되는데, 그래도 그 바나나를 내가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온다.

 "우와 이거는 아빠가 먹어야겠다."  

 보통은 시간이 지나서 바나나의 상태가 조금씩 안 좋아지고 있을 때 그 기회가 찾아온다. 물론, 절대 먹을 수 없는 상태이거나 상한 것은 아니다. 다만 아이에게 주기에는 조금 꺼려지는 순간. 즉, 어쩌면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나 판매는 하지 못하지만, 폐기하기에는 아까운 제품들을 직원이나 편의점 가족들이 먹는 시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점에야 나는 유기농 바나나를 먹을 수 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절대 나는 그런 상황이 싫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다행히도 음식에 까다롭게 구는 성격도 아니고, 음식을 먹고 탈이 잘 나는 스타일도 아니다. 원체 건강한 체질이다 보니 뭐든지 잘 먹고, 소화도 잘 시킨다. 그래서 결혼 전에 집에서 유통기한 제품들이 있어도 크게 개의치 않고  먹곤 했었다.

다만,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는 것뿐이다. 아이를 위해 고르고 골라서 산 많은 식재료들을 아끼고 아꼈다가 상태가 안 좋아지면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어버리는 것이.

"자식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

 이 말이 이제는 이해가 된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아이의 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많이 행복하다. 아이에게 더 맛있는 것을 주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내가 더 행복한 일이 되어버렸다. 비록, 유기농 바나나 한 송이 중에 뭉개진 바나나 하나가  내 몫이라고 하더라도, 나머지 9송이가 우리 아이의 입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선 대가리, 과일 꼬다리, 먹다 남은 찌개, 조금 탄 밥, 유통기한 지난 우유, 말라버린 빵, 살짝 쉰내가 나는 김밥, 내가 골라 놓은 콩, 먹기 싫어했던 삼겹살 오돌뼈

 생각해보면 내가 성장하면서 먹지 않았던 수많은 음식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음식들은 어김없이 우리 아버지의 입으로, 어머니의 입으로 모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우리 부모님들이 내가 남긴 음식을 싫어하면서 드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의 부모님도 그러셨겠지?"

 나는 오늘도 아이가 좋아할 만한 유기농, 친환경, 무항생제, 무농약 과일들과 간식들을 구매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유난스럽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작작 하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해주고 싶어 하는 아내의 마음도 알고, 그렇게 만들어서 잘 먹는 아이를 보며 즐거워하는 아내의 모습도 좋다. 물론 나도 더 좋은 것을 사줄 수 있는 것이 좋다. 조금 더 비싸다면 내가 조금 더 노력해서 더 벌면 되는 것이고, 사놓은 것들이 남으면, 내가 맛있게 싹싹 비워내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줄 음식을 준비하고 만들며 느끼는 행복, 아이가 먹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 그리고 그 모습을 함께 나누며 함께 즐거워하는 공감. 이 모든 것이 우리 부부에게는 제일 소중한 순간이고, 추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뭉개진 마지막 바나나를 먹는 것이 제일 좋다. 내가 마지막 바나나를 먹는다는 것은 우리 아이가 맛있는 바나나를 많이 먹었다는 뜻이고, 우리 아이에게 새로운 바나나 한 송이를 또 사줄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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