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희종 Jul 07. 2020

빌런의 탄생

결국은 해피엔딩

 나름 북유럽풍의 심플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를 추구했던 우리 집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멋스러웠다. 소소한 소품들과 톤을 맞춘 가구들 덕에 신혼의 집의 느낌이 물씬 나던 집은 들어올 때마다 우리의 기분을 좋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면서 그 모든 인테리어의 콘셉트와 의도는 점점 알록달록한 놀이방 콘셉트로 달라지기 시작했고, 육아에 지친 우리의 체력 덕에 정리도 깔끔하게 하지 못하곤 했다.

아이의 탄생은 집안의 모든 것을 달라지게 만든다. 거실에 깔려있던 신중하게 고르고 산 러그는 푹신한 놀이 매트로 달라져 있었고, 다양한 아이의 장난감이 가득 올라가 있다. 소파 옆에는 아이의 기저귀 받침대가, 주방에는 아이의 분유와 이유식을 위한 온갖 조리도구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우리 부부만의 공간이 있었고, 아이가 침범하지 않는 공간들이 남아있었다. 스크린이 설치된 안방. 항상 문을 닫아두는 옷방 등. 하지만 그 공간들이 점점 좁혀지고 있다.

 누워만 있던 아이가 뒤집기를 시작했고, 조금씩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반경이 넓지 않았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잡고 일어서기 시작했고, 측면 이동이 가능해졌다. 심지어 이번 주에는 그 두 가지를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본인이 원하는 목적지가 생기면 본인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주방 쪽에서 소파 끝에 있는 로션 통이 눈에 들어오면, 아주 빠른 포복으로 소파의 시작점까지 이동하고, 소파를 잡고 일어선 후에는 아주 빠르고 안정적으로 측면 이동을 하며 자신이 원하는 곳까지 순식간에 이동한다. 이 광경은 직접 보고 있어도 아주 빠르지만, 부모가 잠시 한눈을 팔고 있으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순간이동을 하는 느낌이다.

 이렇게 빠르게 이동하는 아이는 점점 관심사가 커지고 위험해져서, 주로 멀티탭, 공기청정기, 선풍기, 태블릿 PC 등 비싸고 위험한 것들만 노리기 시작한다. 우리 아이는 부모가 옆에서 보고 있으면 순하고 착한 아이지만, 부모의 시야만 벗어나면 엄청난 개구쟁이가 되는 것 같다. 심지어 골라도 꼭 위험한 것만 좋아해서 로션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꼭 알루미늄으로 되어서 뾰족한 것들만 만지려고 하고, 꼭 위험한 젓가락이나 전기코드, 지저분한 슬리퍼들에 집착한다.

 게다가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아이가 아직 걷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기는 것과 잡고 옆으로 걷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말썽을 피우기 시작하는데, 아이에게 보행 패치가 업데이트되면 그야말로 이 집은 초토화가 될 것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공격수로 살아왔다. 무엇인가 계획하는 것을 좋아했고, 작당모의하는 것을 좋아했다. 일을 꾸미고, 사고를 치기도 하고, 장난을 치거나, 노는 것도 좋아해서 부모님도 선생님들도 조금은 귀찮게 만들던 아이였다. 그런데 이제 나는 수비수가 되었다. 아이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대비해야 하며, 아이가 일으킬 사고들을 미리 예측하고, 위험을 방지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이의 안전이 가장 큰 우선이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묶어두거나 가둬둘 수는 없다.

 아이에게는 내가 마련하고 가꾸어 논 이 집이 최고의 놀이동산이자, 근사한 유치원이고, 엄청난 호텔이며, 화려한 관광지일 것이다. 아이에게는 스스로 움직여서 들어가는 안방이나 옷방이 새로운 신세계일 것이고, 창고라도 들어가게 된다면 숨겨진 보물섬과 같은지도 모른다. 아이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기에 나는 막을 수는 없다. 아이가 떠나는 새로운 모험에 아빠로서 안전장치들만 만들어 놓을 뿐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아이의 눈빛은 엄청나게 반짝거린다. 그 순간만큼은 엄마도 아빠도 눈에 보이지 않고, 오로지 그것만 보며 직진한다. 그런 아이의 열정이 아이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일 것이다.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이 빌런을 잘 방어해볼 생각이다. 비록 이 집의 인테리어가 망가지고, 우리가 아끼는 장식품들이 고장 나고, 집안이 엉망이 된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좋아한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다치지만 않는다면, 마음껏 말썽을 부릴 수 있도록 쫓아다니며 말리고 치우고 수습할 것이다.

 원래 수많은 히어로 영화들의 결말은 뻔하다. 빌런은 히어로에게 처단을 당하고 결국은 사라지거나 처벌을 받으며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이 꼬마 빌런의 결말은 많이 다를 것이다. 아이는 언제나 승리할 것이고, 그를 막는 엄마 아빠 히어로는 빌런에 끌려다니며,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히어로들은 점점 늙고 약해지지만, 빌런은 점점 더 성장하고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빌런이 건강하게 커가는 것이 이 영화의 해피엔딩이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만의 세계에서 점점 더 커나가는 것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이야 말고 우리 부모들이 느끼는 최고의 행복이기 때문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뭉개진 유기농 바나나 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