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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종 Oct 13. 2020

우울함에 담겨있는 그대에게

육아에 지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오늘 아침 문득 우리가 처음 호감을 느끼던 시기가 생각이 났어요. 정말 딱 이맘때였던 것 같아요. 인간관계에 참 많이 지쳐있던 내게 당신과의 시간은 기대와는 다르게 너무 재미있었고, 따뜻했고, 많은 위안이 되었어요. 그렇게 수줍게 시작된 우리의 만남은 가을 하늘에 노을이 번지듯이 금세 진하게 물들어 갔지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내가 그맘때 당신에게 주었던 시구절이에요. 기억나죠? 그 뒤로도 우리는 참 잘 익어서, 근사한 사랑이 되어 갔어요.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인연을 알아봤고,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함께 살아갈 집부터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죠. 그렇게 순서가 좀 바뀌기는 했어도 우리는 부모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결혼식을 할 예쁜 성당도 알아보고, 제일 기대가 되던 신혼여행도 준비했어요.

 그 시기에 다른 커플들은 많이도 싸운다는데, 우리는 단 한 번의 다툼도 없이 우리의 미래를 하나하나 기쁜 마음으로 준비해 갔었죠. 유독 알아보는 것을 잘하는 나는 열심히 이것저것 알아보고, 안목이 좋은 당신은 내가 골라 온 것들 중에서 제일 좋은 것들을 골라주었어요. 우리의 시작은 훈훈하고 소소하게 시작되었어요.

"나 임신했어"

운전 중에 들은 당신의 말을 나는 한동안 장난인 줄만 알았죠. 그저 속이 좀 안 좋아 불편한 줄 알았지, 우리의 소중한 아이가 배 속에 있는 줄은 정말 몰랐으니까요.

처음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던 날.
첫 번째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며 두근대던 밤.
입덧이 심해서 매일매일 점점 말라가던 당신을 보던 시간들.
밤마다 아이를 위해 당신의 배에 손을 얹고 책을 읽던 나.

나는 단 한순간도 당신이 빛나지 않던 날이 없었어요.

 양수가 터지던 날 새벽. 어리바리하게 허둥대던 나와 다르게 당신은 아주 차분하고 대범하게 밥도 먹고, 짐도 싸고, 조심히 병원으로 향했죠. 두 손을 잡고 함께 호흡하고 당신의 힘을 줄 때마다, 나도 같이 힘이 들어가던 8시간의 진통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예쁜 우리 아이를 만날 수 있었어요.  

 정말 작은 아이를 안고 조리원으로 가던 날. 처음으로 우리 방에 데려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1시간 동안 바라만 보던 그 순간. 그렇게 시작된 육아는 2시간마다 모유를 먹여야 하는 큰 숙제를 주었어요. 밤새 잠을 설치며, 모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너무 작아서 어떻게 안아야 할지도 모르는 아이를 당신과 둘이서 쩔쩔매며 길러냈죠.

그런 아이가 이제는 혼자 걸음도 걷기 시작하고, 혼자 어린이집에도 있어요. 우리는 여전히 아이를 볼 때마다 웃음이 가시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 예쁜 아이가 우리에게 왔는지 매 순간 고맙고 신기할 뿐이죠.

그런데 그런 당신이 우울함에 담겨 있어요.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나 함께 외출하는 시간에는 여전히 밝고 행복한 당신을 만나지만, 아이가 잠이 들고 당신과 나의 시간이 되면, 당신은 우울함에 들어가 말이 없어지죠.

누구도 당신을 탓할 수는 없어요. 당신은 언제나 빛나던 사람이었고, 여전히 빛이 나는 사람이에요. 나에게는 둘도 없는 사랑이고, 가장 큰 축복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더 가슴이 아프고 미안해요. 내가 당신을 우울함에서 꺼내 주고 싶은데, 그래서 나와 당신의 시간에도 행복하게 웃게 하고 싶은데, 내가 너무 부족해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나는 당신이어서 좋아요. 내 삶의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이 당신이어서.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달라지고, 어떤 걸 이뤄낼 당신이 아니라, 그냥 어느 날 나에게 뚝 떨어진 당신이어서 좋아요.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시작하던 그때의 당신이나, 입덧이 심해서 수척해진 당신이나, 아이를 낳아서 달라진 모습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당신이나, 나에게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고, 나에게 주셔서 너무 감사한 사람이고,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인 사람이에요.

 우리가 처음 만나던 시간에 우리 이런 이야기를 했죠? 우리가 서로를 만난 건 너무 감사한 일이니 좋은 일을 하며 살아가자고. 그리고 천사 같은 우리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도 우리는 항상 이야기했어요. 이렇게 예쁜 아이를 주셨으니 우리가 더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나는 좀 더 착하게 살아야 할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내가 남들에게 했던 행동들이 돌아 돌아 당신에게 우울함으로 갔을까 봐 걱정이 되거든요.  

내가 더 잘할게요. 더 아끼고, 더 사랑하고, 더 감사한 마음으로 더 착하게 살아볼게요.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당신아. 내 손을 잡고 그만 그 우울함에서 나왔으면 해요. 나는 언제나 당신의 손을 잡아줄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내가 제일 행복한 순간들을 당신은 잘 알잖아요.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 순간들. 그리고 그 시간들이 당신에게도 큰 행복인 걸 알아요. 그만 나와요. 우리 같이 손잡고 걸으면서 조금 힘들고, 지쳐도 서로 기대며 살아가요.

우울함에 담겨있는 그대에게 항상 손 내밀고 있는 남펴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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