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은 여기저기 참 많이 놀러 다닌 것 같습니다. 여름이 되면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들고, 계곡으로 물놀이 다녔던 기억이 많으니까요. 특히, 그 당시에는 어디나 취사가 허용되던 시기여서 아이들이 열심히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으면, 엄마는 항상 찌개를 끓이고 밥을 하고, 아버지는 고기를 굽고는 하셨죠. 세세하게 생각은 나지 않아도, 그때의 기억들은 항상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보니 그 모든 과정이, 참 고단하고 번거로운 일이었겠다 생각도 들지만, 아이일 때는 마냥 행복한 시간들이니까요.
우리는 어릴 적에 그렇게 많이 놀러를 다녔는데도, 바다로 휴가를 간 기억은 없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디론가 휴가를 가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한 대부분의 놀러 다녔던 기억은 당일치기였고, 우리 가족은 친척집을 제외하고는 어디 가서 자고 왔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도 몰랐고, 그게 특별히 문제가 되지도 않았지만, 이제와 추측해보면 며칠씩 휴가를 갈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그렇게 여유 있는 집이 아니었고, 특히 제가 어린 시절에는 항상 장사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가게를 오래 비우면서 휴가를 간다는 것은 아예 경우의 수에서 제외되었을 테니까요.
그러다 보니 저는 어린 시절 바다를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아이는 부모가 데려가지 않으면 바다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의 첫 바다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이었습니다.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간 우리 학교 수학여행 코스로 경포대를 들렸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그 당시에 처음으로 본 바다는 정말 거대했고, 엄청났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수평선에 넘실거리는 파도는 TV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그때 친구들에게 바다를 처음 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웠으니까요. 그래서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그저 오랜만에 바다를 봐서 좋은 것처럼 행동을 했었죠.
이번 휴가는 아이와 함께 그 강릉 바다에 왔습니다. 이미 우리 아이에게는 여러 번의 바다 경험이 있었고,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바닷가에 파라솔과 평상을 잡고, 캠핑의자까지 세팅을 해서 오래 놀았는데, 아이와 함께 하는 바다놀이는 아이와 고래 튜브에 몸을 실어 파도를 타기도 했고, 모래에 아이를 묻어서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잠수를 해서 아이에게 조개를 잡아주기도 했는데, 아이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아이의 또! 또!라는 말에 숙소에서 조개탕을 한솥이나 끊여 먹을 만큼 많이도 잡았습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놀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얼굴과 목과 팔이 빨갛게 타고야 말았습니다.
아이가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참 기분이 묘했습니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 고단함 삶을 살아오시면서도 우리 남매를 위해 나들이도 참 많이 데려가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와 바다를 함께 간 적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도 함께 가고 싶었던 마음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여건이 허락한 것이 서울 근교의 계곡들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뭔가 더 쓸쓸했습니다. 어머니와는 제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단둘이 해외여행도 많이 다녔고, 아이가 생긴 이후에도 제주도도 여러 번 갔었지만, 아버지와는 계곡에서의 추억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우리 아이가 이번 바다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기억을 못 할 확률이 높겠죠. 하지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여행을 다닐 것이고, 수많은 바다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이에게는 행복한 기억으로 가득 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마도 매번 아이와 바다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떠올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왠지 아버지도 제가 자꾸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을 더 좋아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저의 첫 바다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본 강릉바다입니다. 그런데 그 덕에 저에게 강릉바다는 더 진하게 남아있고, 그래서 조금은 더 쓸쓸하게 기억됩니다. 아버지와는 한 번도 함께 하진 못한 바다지만, 그 대신 더 자주 아이와 함께 와서 아버지의 생각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시간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