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보호막 안에서 지함과 함지는 선택을 했다. 빛나고 있던 토정비결 초판에 서로의 손을 얹고 그 모든 힘을 받아들이기로.
그들이 마음을 먹고 책 위에 손을 올리자, 그 공간이 온통 빛으로 채워지더니 책 안에 있는 모든 궤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몰아치는 태풍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이끌어가듯 공간을 떠돌던 궤들이 다시 책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지함과 함지의 머리에도 모든 궤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그 책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궤들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자 그 공간은 다시 고요해지고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혼과 육신으로 이뤄지듯,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것도 형체와 기운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 이것으로 모든 기운이 그대들에게 담겼고, 지금 남은 이것들은 그저 껍데기가 되었다. 허나 그대들에게는 다시 또 선택의 순간이 남았다. 길성과 흉쇄로 나누었던 그대들의 삶은 이제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질 것이다. 한 이는 오로지 사람들의 과거만 볼 것이며, 다른 이는 사람들의 미래만 볼 것이다. 선택하라. 이제 그대들이 또다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순간, 지함과 함지의 눈빛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다르게 살았던 모든 삶이 서로에게 모두 아픔과 상처였는데, 이제는 또다시 새로운 삶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전과 같은 선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그랬다면, 서로 바꿔 빚을 갚는 기회여서 좋고, 서로 고민해서 새로이 살아볼 수도 있으니. 하지만 다시 또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주 절망적이었다.
함지의 경우는 가장 바라던 것이 있었다. 이 능력을 이 책에 담아두고 모든 능력을 지우고 살아가는 것. 하지만 지금 목소리는 새로운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저 강물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함은 이번 선택만큼은 함지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자신의 삶도 힘들었다고는 말을 해도 함지의 삶과 비교한다면 자신에게는 아무런 불만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함의 마음이 더 슬펐던 것은 자신의 이 마음이 대호가 자신에게 말해주고 나서야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함지에게 양보하고 싶었다.
“야. 네가 선택해. 난 상관없어”
“어떻게 선택해. 내가.”
함지는 지함의 마음은 알고 있었지만, 그 역시도 부담스러웠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었던 삶에서는 누군가를 원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새로운 삶이 과거만큼 괴롭게 되고, 그 고통이 너무 힘들어 누군가에게 원망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 선택마저 본인이라면 정말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함은 함지의 그런 마음마저도 느껴지는 듯했다.
그래서 결국 그가 선택하기로 했다.
“네가 미래를 선택해. 어차피 이제 나쁜 것만 보이는 게 아니니까. 그냥 미래를 선택하고.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그럼 되잖아. 내가 아는데, 좋은 미래가 보이는 건 그래도 나쁘지 않아. 그러니까. 그냥 미래 선택하고 좀 편하게 살아봐.”
“아니에요. 함지 씨.”
그동안 아무 말이 없던 대호가 갑자기 말을 했다. 그는 이미 그녀의 모든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수없이 생각을 했다.
“과거를 선택해요. 그럼 차라리 좀 더 나을 수도 있어요. 비록 나쁜 일이라도, 이미 지나 간 일이잖아요. 아무리 남들의 아픔을 느끼는 것이라고 해도, 이제는 위로를 할 수 있잖아요. 응원을 할 수도 있고요. 힘들면 저희가 도와줄게요.”
대호는 마지막에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민하다 우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함과 함지는 이미 대호의 마음을 알았다. 그리고 대호의 말에 지함도 동의했다.
“맞아. 생각해 보니까. 차라리 과거가 나을 수도 있겠다. 내가 미래를 선택할 테니까. 네가 과거를 해.”
“어. 알았어.”
함지는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고마웠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정말 다행이라고 느꼈던 것은 그녀 역시 대호의 생각과 같았다는 것이다. 함지도 대호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에게 펼쳐질 수많은 아픔들이 느껴졌었다. 그래서 그 아픔들이 그에 대한 마음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그의 미래를 다시 본 적은 없었지만, 앞으로 자신이 무엇인가를 봐야 한다면 그의 미래이고 싶지는 않았다. 왠지 그의 미래를 보게 된다면, 어쩌면 자신이 그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저 대호의 과거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미래, 함지가 과거를 선택할게요.”
“그대들의 선택은 이미 그대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대들의 벗에게 전할 것이 있다. “
대호는 자신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조금 두려웠다. 자신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진다는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었지만, 자신이 살면서 한 번도 운이 좋다고 느낄만한 적이 없어서 무엇인가 이것도 그들에게 안 좋은 영향이 미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은 기운이 어떤 불행을 만드는지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능력은 누군가의 통제 안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그래서 벗에게 그 통제를 부탁한다.”
“예? 뭐라고요?”
“앞으로 그대들의 모든 능력은 벗의 공간에서만 발현된다. 그리고 벗의 공간은 오로지 벗의 의지로만 만들 수 있다. “
“그럼 평소에는 안 보이는 겁니까? 이제 그냥 평범하게 살아도 되는 거예요?”
“그렇다. 단, 저 책도 철갓과 허공의 지팡이도 모두 내가 만든 형체다. 그대들도 그대들의 능력을 담아 둘 새로운 형체를 만들어라. 벗도 역시 그대의 공간을 만들 수 있는 형체를 만들어라. 이제 그대들에게는 마지막 선택만 남았다. 세상의 이치를 보고 세상을 도울 것인지, 세상의 이치를 닫아 세상을 도울 것인지. 그 선택은 그대들이 남은 시간 수없이 고민해야 할 오직 그대들의 선택이니라.”
잠시 후, 토정비결 초판은 함지의 손에 떨어졌고, 보호막은 없어졌다. 그리고 할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