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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다 포기하지 마

by 박희종



난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뭐 누구나 그렇겠지만 꿈도 참 다양한 장르의 꿈들을 꾸기 때문에 어떤 날은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현실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야한 꿈을 꾸기도 하고, 키가 더 크려는 건지 어디선가 떨어지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 꿈을 꾸고 일어났는데 멍한 날들이 있다. 꿈이 너무 생생해서 지금 내가 꿈을 꾼 건지 현실인지 아주 잠깐이지만 헷갈리는 순간들. 꿈과 현실이 모호했던 순간.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길게 가지는 않는다. 곧 현실을 인지하고 그날의 일정을 위해서 습관적인 동작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지나간 삶을 돌아보면 이 순간과 비슷한 시간들이 있지 않나? 어린 시절 야심 차게 꾸었던 꿈이 현실과 만나는 순간, 내가 히어로나 영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거나 나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그 순간들을 철이 든다고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철이 드는 순간들. 누군가는 그 철이 너무 일찍 들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는 그 철이 너무 늦게 들어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시기를 지나쳐버리는 경우도 있다.

나는 경제력이 다소 부족한 아버지와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큰 꿈과 현실적인 계산을 함께 가지고 있던 아이였다. 내가 어린 시절 백일장에서 상을 받고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받았을 때 국문과를 나오셨던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작가"가 되겠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문과를 선택했을 때도 아버지는 작가나 법조인이 되는 걸 생각하셨다. 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작가라는 직업의 고정관념이 있었다. 어느 드라마에서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작가라는 이미지는 등단을 위해 골방에서 하루 종일 퀴퀴하게 생활하며 가족을 고생시키는 이미지 었다. 법조인 역시 관심도 없었지만 사법고시를 위해 누군가가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나는 그런 미래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말을 안 했지만 작가도 법조인도 되기 싫었다. 하지만 조금 더 성장을 하고 대학에 가서 연극을 접하게 된 순간부터 새벽마다 희곡을 쓰고 있었고, 공모전이 뜰 때마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글을 쓰고 무대에 오르고 작가와 배우라는 꿈을 갖게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어릴 적 그렇게 싫어하던 모습으로 이어지는 길을 보게 되었다. 꿈을 향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던 어느 날 문뜩 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어쩌면 그 순간 어머니에게 받은 생활력이 작용하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 이렇게 내 욕심으로 꿈만 좇아 가다가는 나 때문에 내 주변의 가족들이 힘들어질 수도 있겠구나. 나는 다행히도 사회적 책임이나 나의 역할을 무시하고 꿈을 좇을 만큼 모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30살까지 작가로서, 배우로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관두자"


스스로 다짐을 했다. 기한 없이 미련하게 꿈만 좇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지노선을 정해서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목표한 것보다 1년 이른 29살에 연극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했고, 취업을 선택했다. 난 지금도 그 선택에 아주 작은 후회도 없다. 다만, 그 당시에는 무대를 떠나 평범하게 살아갈 내 모습이 너무 두렵고 힘들었다.


"이대로 지루한 직장인이 되면 어떡하지?"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난 비록 현실 속에서도 새로운 꿈을 찾아 열심히 살아갔지만 내가 살던 세상보다는 지루했다. 그리고 그 지루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지루함으로 내 삶에 뭐가 쌓이고 있었는지를 아는데 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과연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이었을까? 아니 조금 더 독하게 말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혹시 내가 싫어했던 삶은 아니었을까? 지금의 내 삶을 만족하느냐의 문제와는 다르게 내가 원하던 삶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철없던 시절, 아직은 세상을 모르던 시절, 내가 너무 싫었던 지루한 선배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욜로"라는 말이 비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욜로의 가치도 각 사람마다 다르게 의미를 두겠지만,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욜로는 결국 한 번뿐인 인생 즐기면서 살자는 것이다. 좋은 의미지만 즐기면서에 오직 소비(시간/돈/인간관계)의 모습만 보인다면 나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이나 역할보다는 나의 소비에만 집중하겠다는 뜻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글을 20대가 읽는다면 날 꼰대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조금은 다른 욜로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 정해져 있는 우리에게 모든 걸 벗어던지고 즐기며 살자는 것은 상황에 따라 법적인 문제로 이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욜로"는 "누리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던 것, 내가 즐거웠던 것, 아직도 자꾸 떠오르는 것, 그래서 가끔 내 몸을 근질근질하게 하는 것, 시간이 여건이 체력이 안된다고 미뤄두었던 것들을 잊지 않는 것, 나의 즐거움과 기쁨을 아직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에서부터 시작인 것이다.

나는 나와 함께 무대를 누비던 친구들과 1년에 한 번씩은 만난다. 매년 같은 이야기와 같은 에피소드로 웃고 떠들지만 매년 모인다. 그리고 얘기하곤 한다. 언제쯤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을지 언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시작이라고 하기에는 단 한 번의 무대일지 몰라도 다시 하자고 한다. 주변에는 동호회로 자신은 어린 시절 꿈을 취미로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멋진 나의 친구는 과감하게 회사를 때려치우고 세계일주를 떠나서 멋진 작가로 돌아온 친구도 있다. 그 친구가 쓴 책의 제목이 " 우린 시간이 아주 많아서" 였는데 나는 그 책을 읽고 친구에게 이렇게 얘기했었다.


"나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그랬더니 그 친구가 나에게 했던 대답은 이랬다


"용기를 내. 그럼 시간은 많아져"


나는 그 대답이 충격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무엇인가를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용기가 없는 것일지 모른다. 하고는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 것들 우리는 드라마에서 이런 상황이나 대사들을 많이 듣는다.


" 나는 결코 아빠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드라마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나 역시 그러리라 다짐했던 말들 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가?


"나는 정말 아빠/엄마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나처럼 살라고 나의 자녀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용기 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의 삶도 나의 삶과 닮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잊지 않고 있다. 우리가 설레던 밤들, 우리를 밤새게 했던 일들. 그리고 아직도 떠올리면 미소 짓게 되는 기억들. 어릴 적 우리의 모습과 참 많이 달라져 있는 우리기에 이제는 조금은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야심 차게 말고, 너무 의욕적이게 말고, 그저 즐겁게 마냥 재미있게, 내 삶을 그저 조금 더 신나게 만들어 줄 잊고 있던 꿈들. 이제는 조금 꺼내서 시작해 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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