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똥 따는 게 목표는 아니었지
주말에 요즘 내가 빠져 있는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관두고 나가버린 상사를 찾아가 회사의 목표와 개인의 목표를 이야기하며 가시 돌아오라는 설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덤덤한 상사는 자기는 좋은 조건으로 퇴사를 하게 되었으니 상관없다는 현실적인 대답을 한다. 결국, 누구나 돈 때문에 일을 한다는
그 대화에 충격을 받은 여자 주인공은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거실에서 멸치를 다듬으며 TV를 보고 있는 엄마에게 질문을 한다.
여주인공 : 엄마. 엄마는 삶의 목표가 있었어?
엄마 : 몰라. 너도 와서 멸치 똥이나 따.
여주인공 : 아니 엄마는 목표가 뭐였는데?
엄마 : 아 몰라.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멸치 똥을 따고 있는 건 아니었겠지..
여주인공 : 그럼 왜 이러고 있어?
엄마 : 똥 딴 멸치가 더 비싸니까
여주인공 : 아...
여주인공은 자신의 목표에 대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철없이 들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꿈, 목표, 희망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는 그보다 훨씬 내 앞에 놓여있는 경제적 문제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한다. 아니 어쩌면 이미 스스로가 적당히 타협하고 어느 정도는 포기한 채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현실을 직시하고 금전적인 조건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철이 든 것이라면, 철이 든 것과 꿈을 꾸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 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성장하고 철이 들고 현실에 젖어들면, 꿈이나 목표라는 단어들을 잊고 산다. 그리고 보통 그렇게 철이 들고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시점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갖게 되는 시점이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꿈은 잊어버리고, 자녀의 꿈을 위해 자녀의 미래를 위해 내 모든 걸 쏟아부으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의 아이는 우리를 보고 배운다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를 닮는다. 내가 싫어하던지 좋아하던지 내 몸에는 이미 나의 부모의 선천적인 유전자와 자라면서 배워지는 후천적인 유전자가 모두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미래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는 타고난 선천적 유전자인 재능과 자라면서 보고 배우는 습관이 많은 것들에 영향을 주게 된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아이가 나와는 다르게 큰 꿈을 펼치며 마음껏 날아오르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정작 꿈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보고 배워야 할 대상이 내 주변에는 없는 것이다. 도전하고 성취하고 그래서 만끽하고 그렇게 인생을 주도적이고 의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란다면 아이의 재능에 도전적인 습관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포기하고 희생하는 그래서 견디고 버티는 모습만을 보여준다면, 결국 너무 먼 과거인 위인전이나 과거만큼이나 먼 TV 속 누군가이거나 혹은 요즘 아이들에게 부모보다 더 가까운 유튜버들이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가장 슬픈 현실은 아마 우리의 부모도 우리가 그렇게 날아오르기를 바랐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세대의 부모들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지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희생으로도 맘껏 날아보지 못한 우리는 그 부모들의 희생을 받아서 키운 꿈을 또 잊고는 포기라는 이름으로 다시 자녀의 꿈을 응원한다. 과연 희생과 포기를 먹고 자란 아이들이 맘껏 날아오를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와이프가 일을 하기를 바란다. 본인이 원한다면 본인이 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끝까지 자신의 일을 했으면 한다. 물론 아이를 기르면서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도 않고 수많은 위기도 있겠지만 나는 그래도 일을 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예쁜 딸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와이프도 학창 시절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많은 경험들도 쌓았다. 그리고 출산하기 전까지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을 하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들의 과정이 자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전업주부(모든 전업주부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육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몰려지는 전업주부를 말하는 것이다)로 이어진다면 나는 딸에게 꿈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른이 되었다고, 가장이 되었다고, 부모가 되었다고, 꿈을 지울 필요는 없다.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나의 목표는 무엇인지"
이제와 새삼 꿈과 목표를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고 쑥스럽다고 하더라도 스스로는 잊지 말아야 한다. 철이 든다는 것과 꿈을 잃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 전에 첫 번째 책을 출간했다. 내가 학창 시절부터 꿈꿔오던 문학작품도 아니고, 내가 전공을 했던 희곡이나 영화 시나리오 집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아직도 이어 가고 있는 작가라는 꿈에 또 한걸음 나아간 것 같아서 스스로 대견했다. 나는 그 책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지인들과 동료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정말 많은 축하와 응원의 메시지가 왔다. 그런데 그중에 제일 많이 받은 답글이 "너는 결국 하는구나"였다.
"너는 결국 하는구나"
대부분 나와 비슷한 나이에 나와 비슷한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한 대답이다. 물론 그 글 앞에는 진심 어린 축하와 응원들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쓰여있는 저 한 문장에 그들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도 들리는 듯했다
"나는 이러고 있는데..."
물론 이것이 나의 비약일지는 모르나 누군가의 도전에 부러움을 비치는 경우는 너무도 많기에 나는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랬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모든 걸 버리고 긴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여행 에세이 책을 냈을 때 나 역시 진심으로 응원하면서도 내심 부러웠고, 스스로 부끄러웠다. 그때 그 친구가 나에게 했던 말이 "너도 할 수 있어"였다. 그리고 "너도 할 수 있어"라는 말이 정말 나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당신도 할 수 있다. 그 꿈이 무엇이든, 그 목표가 무엇이든, 잊지만 않는 다면 당신은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