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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멀어져 간다

서른 즈음에 보다 마흔 즈음에

by 박희종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 김광석 "서른 즈음에" 中


나는 참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 가사라고 생각한다. 김광석 님께서 사시던 시대는 어떤 시대인지 모르고, 그 당시 그분의 상황이 어땠는지 몰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적어도 저 가사의 감성은 서른 즈음에 보다는 훨씬 더 뒤의 상황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대는 참 많이 달라졌다. 치열한 취업시장 때문인지 많은 청년들은 20대 끝이 다되어서야 사회생활을 겨우 시작한다. 그러니 지금의 서른 언절이 청년들은 점점 사라지기보다는 치열하게 쫓는 시기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것들을 볼 여유조차도 허락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치열함의 종류도 좀 바뀌고,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치열함의 크기에 그저 익숙해져 가기 때문에 우리의 속도로 인해 멀어져 가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처음 운전대를 잡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길과 자동차의 속도가 겁이 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경치보다는 엑셀과 브레이크, 신호등과 표지판에만 집중하게 되지만 시속 100km가 넘는 속도에서 1시간 넘게 달리다 보면 속도에는 무뎌지고 내 뒤로 멀어지는 경치들이 눈에 들어오고 간혹 정체로 인해 40km 정도로 달리게 되면 느리게 가는 것이 새로운 불편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우리는 치열하다. 누구나 사회에 나와 경쟁을 하는 순간부터 치열하게 살고 있다. 내가 살아가는 나의 삶이기에 비교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다 자신의 자리에서 나름의 치열함으로 살고 있다. 그 치열한 삶의 속도는 결국 뒤로 흘러가는 것들과의 이별을 할 수밖에 없다. 인지하던지 못하던지. 중요한 건 저 가사를 쓸 때 그분은 그 치열함에 충분히 지쳐 있었고, 그래서 멀어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 나이에 따라 시계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24시간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간혹 나는 12시간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 시간에 대한 주체성이 점점 없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을 앞두고 방학 숙제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생활 계획표다. 학교에 간다라는 가장 중요한 스케줄이 빠져버리는 방학 동안 아이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미리 계획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보통 텅 빈 하얀색 원이 제공된다. 잠은 언제 잘 것인지? 얼마나 잘 것인지? 밥은 언제 먹고 숙제나 공부는 언제 하고 친구들과 노는 시간은 언제가 제일 적합한지? 하나부터 열까지 내 마음대로 하얀색 원에 채워 넣으면 된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같은 생활 계획표를 그려보라고 한다면 어떨까? 이미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원이 아닐 것이다. 나의 삶에 고정적으로 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이 이미 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많은 부분을 차지해 있었것이고 내가 마음대로 "자유"롭게 계획할 수 있는 부분은 조각들로 그마저도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며 우리가 점점 점점 멀어져 간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은 바로 그 하얀 원에 내가 채워갔던 수많은 바람들 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 나의 삶 속에 수많은 선택과 계획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미 나의 상황에 의하여 모두 준비된 것들이다. 우리가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내 삶의 주체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몇 시에 잠에서 깰 것인가?


식사는 언제 할 것인가?/무엇을 먹을 것인가?


오늘은 어디를 갈 것인가?/무엇을 할 것인가?


언제 집에 돌아올 것이며, 집에 와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언제 씻고 언제 잠들 것인가?


이 많은 질문에 결정은 내가 하고 있지만, 나의 상황들이 모든 것들을 유도하고 있다. 가장 합리적인 혹은 가장 피해가 적은 선택으로 삶을 이어가도록

어린 시절 우리는 수많은 싸움을 한다. 그 싸움은 아마 나의 의견과 나를 컨트롤하려고 하는 존재와의 기싸움일지도 모른다. 시작은 부모에서 친구, 선생님, 경찰 등.. 우리는 분명한 의지들을 가지고 수많은 규칙과 예절, 법규 안에서 무수히 싸워가며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곤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쾌감들이 그 시절의 기억들을 흐뭇하게 꾸며주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싸우지 않는다. 나의 삶이 다른 누군가 들에게 유도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내가 불만이 있고, 짜증이 난다고 하더라고 어린 시절의 우리처럼 치열하게 싸우지 않는다. 어쩌면 시간이 흘러 사라지는 것은 바로 그 시절의 나의 전투력일지도 모른다.

한때 아이들 교육에 유행했던 키워드가 자기 주도였다. "자기 주도 학습" 어쩌면 새로운 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온 이 순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자기 주도 삶" 이어야 한다.

중요한 건 시간은 달라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갑자기 기상시간을 1시간을 당기고, 멍하게 하루를 보낸다고 "자기 주도 삶" 은 아니지 않은가?


" 내일은 늦지 않으려면 (지하철을 놓치지 않으려면) 6시 반에는 일어나야 해 " 가 아니라


" 내일은 월요일이니까 사람이 많을 수도 있어서 6시 반에 일어나야겠다"라는 것이다.


이 마인드의 변화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점점 더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만약, 결과적으로 늦지 않게 되었다면, 후자의 경우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 역시 일찍 일어나길 잘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는 나의 행동에 칭찬이 아닌


" 아 월요일에는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일찍 안 일어났으면 늦을 뻔했네 "


즉, 나의 주도적 선택이 아닌 만큼 그에 따른 긍정적인 결과에도 온전히 기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삶에서 이렇게 나의 사고를 변화시키는 것들은 너무나도 많다. 매일 어쩔 수 없게 먹는 구내식당, 짧은 점심시간으로 인하여 억지로 선택하게 되는 커피 브랜드, 끌려가는 회식과 분위기 때문에 참석하는 모임들, 집에서 해야 하는 수많은 나의 역할들은 자발적이기보다는 상황에 끌려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의 꿈도 생기지 않는다. 나의 새로운 꿈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나의 자발적 의지가 가장 강하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책임지고 버리고 있다. 결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맡게 된 역할이다. 협의도 요청도 없었다. 내가 그냥 하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하기로 하니 난 불만이 없다. 와이프와 협의한 것도 아니고 와이프가 시킨 것도 아니기에 난 내가 하고 싶을 때, 혹은 내가 해야 되겠다고 판단이 될 때 한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재활용 공간에서 만나는 수많은 남편들 보다는 기분 좋게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가득했던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뭔가 시원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 더욱 긍정적인 변화는 내가 재활용 쓰레기를 담당하다 보니 배달음식/포장해오는 것들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너무 싫어졌다. 나도 모르게 사 먹는 음식들을 줄이자고 한다는 것이다.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것이 귀찮아서.


" 시켜 먹지 말고, 가서 먹자 쓰레기 많이 나와 "


" 하하하하하 알았어 "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사소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소함이 나의 짜증을 없애 준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해야 한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행동해야 한다. 지금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도 글래서 같은 결과의 선택이라 하더라도 나의 생각과 논리를 바닥에 깔아보자. 그래야 의미가 생기고 짜증이 사라 진다.


어쩌면 너무 슬픈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멀어지는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치열하게 살아가야만 하고, 어쩔 수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들은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뒤돌아 보며 아쉬워할 시간도 없이 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점점 멀어지는 것들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적으로 능동적으로 보냈으면 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사라지는 열정도 열정이 있어도 감당하지 못하는 체력도 어느새 나도 모르게 없어져 버리는 우리의 자리도 누군가에게 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양보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말장난이고 정신승리라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그 말장난과 정신승리가 우리를 조금 덜 쓸쓸하게 하고 조금 더 의욕적으로 만들어 준다면 좋은 것이 아닐까??

나는 이제 멋진 조명과 신나는 음악이 있는 클럽에 가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클럽을 가고 싶지만 못 간다고 이야기한다면 슬플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의 시간에 우리 만의 공간들을 충분히 즐겼고, 지금의 클럽은 우리의 공간이 아닌 지금의 젊은 친구들의 공간인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시간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양보하는 것이다. 그래도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우리의 공간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우리에게 다가오는 공간. 우리는 결국 가만히 있어도 우리의 공간으로 밀려오게 된다. 그럴 바에는 우리가 먼저 가는 것이다. 이왕이면 일찍 가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그 역시도 좋은 일이 아닌가?


"점점 더 멀어져 간다."는 것은 어쩌면 점점 더 다가오는 것도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슬퍼하지만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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