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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종 Feb 24. 2020

상대방을 조금만 미안하게 만들어라

사회생활 노하우

 나에게는 평사원으로 입사하셔서 대기업의 임원으로 한 계열사의 CEO까지 올라가신 작은 아버지가 있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할 때쯤 임원이 되셨던 것 같은데 결국에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시는 것을 보며 친척들 사이에서는 전설 같은 존재였다. 특히, 내가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그 자리까지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더 실감하게 되기도 했다.
 언젠가 명절 때 작은아버지를 뵙는데 장난 삼아 여쭤봤던 게 있다.

"작은 아버지 사회생활의 노하우가 뭘까요?"

"상대방을 조금만 미안하게 만들어 "

" 예?"

" 동등한 관계에서는 일이 잘 안 풀리는 경우가 많아. 그런데 상대방이 나에게 조금만 미안한 마음이 있으면 의외로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많아. "

"아 진짜요?"

" 예를 들면 밥을 먹어도 상대방이 2번 샀으면 내가 3번 사면되고, 한 번씩 번갈아 낼 때는 상대방이 2만 원짜리 사면 나는 25000원짜리를 사주는 거야. 그러면 많이는 아니어도 살짝 미안한 마음이 있거든 그때 어떤 협의든 협조든 잘 되는 경우가 많아 "

" 아... 우와"

" 대신 그렇다고 너무 많이 베풀거나 오버하면 안 돼. 그럼 또 상대방이 나를 피하거나 혹은 만만하게 보기도 해. 그러니까 상대방이 조금만 미안하게 만들어"

 나는 나름 큰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게 알고 있는 사소한 팁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참 많이 느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작은 배려를 제공했을 때 그 작은 배려가 얼마나 많은 것들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정말 많이 경험했었다.
 회사라는 곳은 정말 수많은 이해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치열한 눈치싸움과 힘겨루기 밀당이 오고 간다. 기본적으로는 나에게 주어진일을 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직급과 직책이 올라갈수록 그리고 조직 안에서도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늘어날수록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가 그리 심플하지는 않다. 그때마다 내 머릿속에 맴도는 말이 저 말이다.


"상대방을 조금만 미안하게 만들어라."

 나는 회사에서 팀장을 조금 일찍 달았다. 그리고 우리 부서는 어쩌다 보니 팀원들도 많다. 나는 항상 나보다 직급이 높은 팀장들 사이에서 더 많은 팀원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한다. (지킨다는 것은 수많은 짬 공격과 일 넘기기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커버를 해주는 것을 말하는데 짬 없는 어린 팀장에게는 가장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항상 직책자들 사이에서는 징징대야만 하고, 후배들 앞에서는 부탁해야만 했다.

" 내가 이러려고 팀장이 되었나 자괴감이 드네 "

몇 번이나 이런 생각들을 했는지. 하지만 계속 자괴감만 들고 있을 수 없으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바로 그것이 작은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우선 팀원들의 단속은 힘든 일은 내가 먼저 하는 것이었다. 우리 회사는 가끔 회사에서 주최하는 이벤트 행사들이 있는데 그 행사가 며칠 동안 그 행사장에 있으면서 주말에도 행사를 지원해야 하는 부분이라 많은 사람들이 꺼려한다. 나는 팀장이기 때문에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제일 먼저 가겠다고 하고, 가장 많이 다녀왔다.
 특히, 협조 요청이 와서 눈치싸움이 시작되는 시점에는 모두의 의사를 물은 뒤에 내가 다녀오곤 했다. 당연히 모두가 개인의 사정이 있고, 주말의 약속들도 있으니 싫은 것이라서 내가 간다고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은 하겠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팀원들은 내가 당시에 와이프가 임신했다는 사실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미안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그들은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왜 부담스럽게 팀장이 저러냐고 욕을 했을 수도 있다. ) 그리고 나보다 직급이 높은 팀장들과 일을 할 때는 일반적인 협의는 자연스럽게 진행 하지만 상대방이 조금 곤란한 상황의 경우에는 오히려 내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도와주려고 했다. 즉, 그들이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은 생각보다 기억에 더 많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쿨하게 도와주기보다는 나에게 발생되는 리스크나 내 손해를 명확하게 인지 시키고 미안함을 심어주는 것은 기본이었다. 예를 들면 해당부서 입장에서 너무 급하게 필요한 교육인 경우 우리의 규정에 따르면 진행하기 어렵지만 내가 따로 부서장께 보고 드린 후 직접 나가서 교육을 진행하게 되면 해당부서의 면도 서도 나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도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탁을 많이 들어주려고 하는 편이다. 내 업무의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주 명확하게 생색을 낸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

 교육팀에서 근무하다 보니 선의로 진행했던 수많은 활동들이 자연스럽게 교육팀의 업무로 넘어오게 된 적도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부탁은 무리되지 않는 선에서 들어주되 원래는 안 되는 부분을 특별히 해주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중요한데, 거절의 경우는 승낙의 경우보다 더 많은 정성을 쏟아서 정중하게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승낙의 경우는

"팀장님 이거는 원래 내부 일정상 도저히 안 되는 건데, 이번만 스케줄 조정해서 진행해 보겠습니다. 일정 정리 잘해볼 테니까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이렇게 커뮤니케이션한다면, 거절의 경우는 더욱 신경 써야 한다.

"팀장님 제가 말씀 주신 거는 검토해봤는데 이 달에는 저희가 일정이 도저히 안 나온다고 합니다. 원래 OOOO교육을 미루고 시간은 좀 조정해보면 가능할 듯했는데. 그걸 조정해도 그 다음 주에 OO교육이 또 시작한다고 하네요. 그러다 보니 도저히 저희가 물리적으로 진행이 안되더라고요. 제가 혹시라도 해서 저희 본부장님께 OO교육 일정을 조정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여쭤도 봤는데 이미 결제가 떨어진 부분이라서 어쩔 수가 없다고 합니다. 도와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무슨 거절을 그렇게 까지 하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도 모두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하는 부탁은 아주 간절할 때 많이 망설이다가 하는 경우가 많다. 비록 쉽게 하는 부탁이라고 할지라도 눈치를 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그 부탁의 결과가 거절인 경우에는 거절 자체로도 이미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그 이유마저 명확하게 모른다면,

"혹시 알아보지도 않은 거 아니야??"

"혹시 해주기 싫어서 연기하나?

이렇게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거절에 더 많은 정성을 담아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거절은 결국 안된 거다. 그의 부탁대로 도와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도와주기 위해서 했던 모든 노력도 사라진다. 하지만 아무리 거절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그 도움을 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알려준다면 결국,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은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을 조금만 미안하게 만드는 이 팁은 꼭 회사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족 간의 관계이거나 친구와의 관계, 혹은 내가 고객으로 방문하는 수많은 쇼핑 공간에서도 이 팀은 유용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얼마 전에 한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구매한 적이 있다. 사 온 음식을 반이나 먹고 났는데 다시 보니 유통기한이 한 달이나 지난 것이다. 나는 바로 컴플레인을 걸었고, 점장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이미 약속을 잡기로 한 연락에서부터 아이가 아파서 바로 찾아뵙지 못하다는 점에 대해 사과를 하고 양해를 구하시는 점장님에게 나는 쿨하게 주말에 보자고 했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했지만 실제로 모유수유를 하고 있던 와이프가 많이 먹었었기 때문에 실제 상황은 그리 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주말에 만나게 된 점장님께서는 이미 정중히 사과를 몇 번이나 하신 상황이었고, 그 자리에서도 사과하는 마음으로 선물세트까지 챙겨서 오셨었다. 나로서는 무엇인가 더 요구할 마음도 그럴 상황도 아니어서 사과를 받고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보통의 컴플레인을 건 고객과 점장의 사이와는 다른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점장님께서는 죄송하고 감사하다며, 쇼핑하러 오시면 직원 할인을 해드리겠다고 하고, 본인이 주말 부부라서 동네에 지인이 없는데 가끔 술이나 한잔 하시자는 말씀도 하신다. 심지어 최근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마스크를 구하기 힘들었을 때 우리 가족의 마스크를 따로 챙겨 주시기도 했다.

 공과사를 구분해야 한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특히 직책자로서 조직을 이끄는데 합리적이고 명확한 의사결정과 관계 형성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하지만 직장생활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맺고 끊는 것만큼이나 인간적인 감정들도 너무나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다 보니 합리적인 관계만큼이나 인간적으로 이어지는 관계도 좋게 만들어 놔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내 정치에 재능도 없고 관심도 없다. 심지어 술자리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결정적으로 사람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할 기회가 적다.(비 흡연자이다 보니 흡연실에서 나누는 우정도 없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상대방보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이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제 겨우 삐약 소리를 땐 영계 수준의 직장인이라 내가 하는 말이 절대 경험치를 자랑하는 선배님들에게는 귀여워 보일지 모르지만, 이제 삐약거리는 사회 초년생들에게는 좁쌀만 한 도움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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