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장인어른이 운영하시는 과수원에 가서 일을 도와드렸다. 원래 키우시던 포도의 품종을 바꾸시기 위해 기존의 포도나무를 파내고 새로 땅을 고르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파낸 포도나무 중에서 몇 그루는 다시 옮겨심기 위해서 한쪽에다가 잠시 묻어놓았다가 밭을 다 고르고 나면 옮겨심기로 했는데, 아버지께서 포클레인으로 나무를 파내시면 내가 한쪽으로 옮겨서 마르지 않도록 흙으로 뿌리를 덮어놓는 작업을 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옆으로 잘게 나온 이 잔뿌리가 중요해. 이 잔뿌리가 잘 살아 있으면 올해 옮겨 심어도 포도가 다 열려. 그러니까 이 잔뿌리가 생명이야 "
"잔뿌리가 생명이야"
난 왠지 주말 내내 일을 도우면서 저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이 사회의 잔뿌리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언론에 나오고 이름이 알려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를 혹은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을 이끌어가는 굵은 뿌리들이라면, 우리는 그들에 비해서는 눈에 띄지도 않고, 영향력도 없는 잔뿌리들인 것이다. 나는 당연히 이 사회는 큰 뿌리들이 지탱하고 자라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좀 더 굵고 튼튼한 뿌리가 되고 싶었고, 이 사회를 위해, 내 조직을 위해,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더 성장하고 발전시켜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나중에 굵은 뿌리나 줄기가 될 수 있어도 지금 당장은 결국 잔뿌리라는 것이다. 굵은 뿌리들 옆에서 자라고 있는 얇고 짧은 사 잔뿌리.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에 빠지고, 혹은 점점 낮아지는 자존감에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잔뿌리들의 노력이나 영향력은 밖에서 바라보기에 너무 작고 초라하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들을 바꾸고자 한다고 해도 이 사회나 조직은 내 말을 잘 들어주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확신을 갖고 변화에 대한 목소리를 낸다고 해도 결국엔 스스로 지치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잔뿌리들의 존재는 굵은 뿌리들에게 간절하지 않아서 꼭 내가 아니어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나의 힘듦이나 노력 따위는 많이 알고자 하지도 않는 것이다. (실제로는 듣고자 하고 바뀌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정작 당사자 입장에서는 기대하는 만큼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결국 잔뿌리는 결국 잔뿌리일 뿐이고, 이 나무를 지탱하고 있는 굵은 뿌리들과 곧은 줄기 그리고 푸른 잎사귀들로 인해 열매가 열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지, 필요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없다. 혹은 자신이 더 굵고 긴 뿌리라고 뽐내고 다니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그만큼의 자기 역할을 못하는 경우도 많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말처럼 결국 생명의 중심은 잔뿌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땅속 여기저기에 넓게 뻗어있는 잔뿌리들이 그 속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각종 영양가와 수분들을 당겨오면 그것을 모아 줄기를 키우고 잎사귀를 만들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굵은 뿌리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잔뿌리가 없다면 그 어떤 것도 키울 수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많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떤 이유로 갑자기 관두게 되어도 큰 문제가 없는 경우들이 있다. ( 심지어 나는 내 위의 누군가가 나가자 오히려 예전에 비해 일이 훨씬 더 잘 진행되는 결과를 목격한 적도 있다. )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실제로 업무를 하는 실무자가 자리를 비우거나 갑자기 관뒀을 때 더 큰 문제가 발생하고 일이 더 복잡하게 꼬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결국 자기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잘하고 있는 잔뿌리들의 역할이 이 사회나 어떤 조직을 이끌어가는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잔뿌리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결과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경우들도 많고, 그 결과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우리가 하는 일들이 하찮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없이 지겨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작다고 생각하던 작은 일들이 이 사회에 조직을 성장시켜나가고 있었으며, 그 노력의 대가로 우리의 가족의 행복도 커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푸르른 잎과 달콤한 과일들은 누구나 봐도 부러울 만큼 아름답고 탐스럽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계절이 지나면 떨어지고 사라질 화려함들이다. 계절이 지나고 세월이 흘려도 결국 흙속에 남아 새로운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결국 우리 잔뿌리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생명이다."
"우리가 잘 살아야만 이 사회도 조직도 살아남을 수 있다"
지금도 어두운 흙속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있는 수많은 잔뿌리들에게 서로의 존재가 커다란 위로와 응원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