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rrow and pleasure Jun 04. 2021

아이의 사춘기가 끔찍한 너에게

그저 가만히 기다리기

[마음 일기] 

2019년 2월 19일 오후 3시 17분   

                 

마음아! 괜찮아, 너에겐 무한히 너를 믿고 지지하는 따님이 있잖아. 마음아 울지마, 마음아, 괜찮아. 마음아, 떨림을 멈춰줘,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무언가 실수해도 돼. 네가 실수했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때리고 욕하고 쫓아낼 무서운 부모는 더는 없어, 괜찮아. 그들은 이미 늙었고, 너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는데 너는 왜 아직도 무서워하니. 왜 자꾸, 부모의 나쁜 모습을 재연하니. 그럴 필요는 없잖아. 우리 딸은 제 엄마가 정말 훌륭한 사람인 줄 알고 한결같이 매일매일 내 공부와 내 박사학위를 응원하는데, 정작 당사자인 나는 저 바닥에서 하루하루 나의 능력과 끈기를 의심하며, 어처구니없이 그 답답함을 연약한 아이한테 화풀이나 하고 있구나.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하고 강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의지와 달리 요즘 점점 더 내 마음이, 그리고 아이의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 느낀다. 나는 내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걸까? 아이가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의하는 걸 보면,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혹시 내가 우리 아이를 지금의 나처럼, 커서도 아픈 아이 같은 어른으로 만들어 내는 건 아닐까? 왠지 모르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어 너무 두렵다.                         





이 일기를 썼던 시점은, 늪 같은 학위논문을 작성하며, 마음이 답답하고 미칠 것 같던 내가 훈계라는 핑계로 아이에게 화풀이를 한 날이었다. 서서히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던 아이는 엄마의 화풀이, 그 부당함에 대해 처음으로 따져 대들었던 날이었고 말이다.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나이 서른여섯에 공부란 걸 시작하고도 나는 이렇게 때때로 아이 앞에서 종종 무너지고 무너졌다.     


이날 난 박사 논문이 이리 엉키고 저리 엉켜서 이미 화가 나 있었고, 아이가 그때 눈에 띄었다. 난 엄마로서 가르친다는 그 어처구니없는 핑계로 그 화풀이를 아이에게 하였다. 당연히 내가 늘 아이에게 가르쳐왔듯이, 아이는 자신이 당한 부당함에 굉장히 화를 내며 내게 대들었다. 그런데, 나는 안타깝게도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그 용기를 가진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복종하고 공손하지 않은 아이가 이상했다.     


머리로는 모든 걸 이해했지만, 마음이 그걸 거부했다. 이러면 내가 아이를 위해, 나를 위해, 엄마보다 나은 부모가 되기 위해 발버둥 쳐왔던 십여 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나의 이러한 고민은, 결국, 인생이 내주는 문제와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답을 얻게 되었다. 바로 인생이 내준 숙제는 아이의 사춘기였다. 내가 부모로서, 엄마로서 가장 강렬하게 훈련되었던 시기는 바로 아이의 사춘기였다. 이때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아직 스스로 치유하지 못한 나는, 남들보다 더 심각하게 ‘왜 이렇게 나만 고통스러울까?’ 좌절하며, 아이의 사춘기가 무서웠다.     


늘 말 잘 듣고 순종하던 내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엄마를 노려봤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자, 아이는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이게 다 엄마 탓이야!’ 하고 가끔 날 원망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아이는 그동안 이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별말도 않았는데, 내 눈앞에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가며 ‘짜증 나’를 말했다. 나는 이때, 그토록 정성을 다해 키운 내 아이조차 나를 무시한다는 분노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결국 나도 별수 없이 엄마처럼 나쁜 엄마가 되었다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고 내 말을 듣지 않자, 어릴 적 부모로부터 ‘나’ 전체를 거부당했던 그 차가운 칼날 같은 느낌이 세포에서 올라왔다. 엄마에게 어린 시절 학대받고 미움받던 그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무서웠다. 아이에게 미움받을까 봐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그 후부터는, 자라면서 엄마에게 맞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며 살았듯이, 난 나도 모르게 아이의 눈치를 보고 기분을 맞추며 살고 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부모로서 정말 훈육이 필요할 때는 훈육하지 못하고 절절매다가 결국 훈육의 시기를 놓치며 가슴에 답답함을 쌓아두었다.  

             

그리곤 그 답답함을 내 일이 뭔가 안되거나 아이와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마음이 힘들 때, 난데없이 아이 앞에서 폭발시켰다. 내가 그간 교육학을 전공하며 배웠던 바에 의하면, 이런 나의 태도는 부모가 부모로서 기능하지 못하며 아이를 망치는 전형적인 나쁜 부모의 양육 형태였다. 왜 나는, 바람직한 부모의 길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제대로 행동하지 못했을까. 아이는 왜, 왜 안 그래도 힘든 나를 왜 이렇게 더 힘들게 하는가, 왜 나는 그렇게 배우고도 내 아이 하나도 내 맘대로 하지 못할까 하고 또 자책했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얻은 상처가 깊었고, 그걸 미제 사건처럼 가슴에 누르고 살아왔던 나는,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한 인간이라 나를 정하고 또 아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집착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기필코 좋은 부모가 되겠다는 미친 내 욕망과 집착을 키웠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더 지혜롭게 잘 자란 내 아이는 그것이 과하게 좋은 부모가 되고자 하는 엄마의 미친 욕심이라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과거의 내 엄마가 어린 나를 때리고 욕하면서도 ‘이게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는 말로 포장할 때마다, 그건 그냥 엄마의 화풀이였다는 걸 그 어린 내가 이미 알았던 거처럼 말이다.    

                 

사실, 아이의 사춘기에 내가 자꾸 아이와 대치했던 건, 바로 나 때문이었다. 내가 아이를 지켜봐 주며 묵묵히 기다려야 할 때, 자꾸 이 아이를 좋은 부모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리저리 통제하고 감독했기 때문이었다. 사춘기에 들어선 내 아이는 모든 걸 스스로 해 보겠다고 주장했다. 이제 엄마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스스로 알아서 할 테니 엄마는 엄마 할 일이나 하라는 말을 하고 또 했다. 근데, 난 이 아이의 독립이 마음에서는 싫었던 거다. 내 집착인 좋은 부모 되기를 아직 난 더해야 하는데, 이 아이가 정서적으로 나를 버려두고 혼자 서려고 하는 걸 견딜 수가 없었던 거였다. 그랬다. 난 사춘기가 되어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서, 마음이 성장해 가는 아이를 두고 보기가 괴로웠던 거였다.    

                 

그래서 아이의 이전과 다른 행동 변화를 볼 때마다 앞뒤 없이 그저 화가 치밀어 올랐던 거고 말이다. 부모로부터, 그런 이해를 받아 본 적이 없는 내 마음은 사춘기가 된 이 아이의 마음을 어찌 배려할지 몰랐다. 중년의 나이에 늦공부를 시작하고 내가 교육공학박사가 된 이유도, 나 자신은 물론, 내가 낳은 내 아이조차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교육학 박사가 된 나 또한 머리로는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지만, 이제 저는 다 컸다며, 엄마가 뭘 물을 때마다 도끼눈을 뜨고! '아니, 싫어'부터 하고 나서 싫은지 아닌지를 다시 생각하는 우리 따님을 보면, 어떨 땐 아직도 고장 난 내 안의 음향장치가 나에게 나쁜 생각을 속삭이곤 했다. 

                    

‘이렇게 그냥 둬도 되나, 얘가 지금 날 무시하나, 굴복시키고 싶다. 누르고 싶다.’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마음에 떠오르는 비뚤어진 마음을, 글로 써보며, 다른 말로 바꿔본다.   

             

‘너도 혼란스럽지? 혼란스럽겠지. 너도 크느라 참 애쓰는구나, 힘내 우리 딸, 엄마는 언제나 여기서 너를 지켜볼게. ’라고 말이다.     


가끔은 내가 지금의 따님 나이 즈음이었을 때를 생각해 본다. 그러면, 지금의 따님은 그 나이 때의 나보다 훨씬 훌륭한 열다섯을 지나가고 있는데도 자꾸 내가 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부모라는 이유로, 내 부모보다 기필코 더 좋은 부모가 되고 말겠다는 쓸데없는 열망으로 말도 안 되게 더 많은 훈계와 조언을 쏟아붓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제는 나도 내 마음을 믿을 수 없어서 아이에게 미리 엄마를 제어할 장치를 주었다.                

"아가, 엄마가 이렇게 많이 배웠어도, 아직도 엄마 마음을 맘대로 못할 때가 있어. 그래서 어쩌면, 아주 가끔은 네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또 이전처럼 너한테 화내고 억울한 소리를 할지도 몰라. 그런데 엄마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알아챌 수가 없어. 그러니까 네가 그때마다, 엄마에게 꼭 알려줘. 그러면, 엄마가 아무리 화가 난 상태라도 무조건 멈추고 너의 말을 들으려고 노력할게. 약속해."라고 말이다. 그 후부터 내가 가끔 딸에게 이유 없는 화풀이를 할 때마다 아이는 내 턱밑에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 아까 아빠랑 싸워서 지금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지?”      

              

아무리 의식하고 노력해도 자꾸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드는 내 실수를 이제는 아이가 나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늘 이렇게 아이는 화를 주체못하는 한심한 부모로 돌변한 나를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럴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내 마음은, 당장 저 버르장머리를 혼내주라고 한다. 사실,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 데도 말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교육공학박사로서 최고의 치부를 들킨 굴욕감에 엄마라는 권위로 누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턱밑에서 꼬치꼬치 대드는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아이를 보며 생각한다.      

         

‘저 아이가 엄마에게 당한 부당한 일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게 참 대견하다. 저 아이가 엄마라는 사람의 권위에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아이로 자라나서 참 다행이다. 앞으로 내 아이는 이 험난한 세상의 어떤 역경에서도 자신이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고 존중받을 만한 사람임을 잊지 않겠구나. 이 아이는 늘 타인의 눈을 의식하며 전전긍긍하던 나와는 달리 늘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겠구나.’라고.    

           

오늘도 난, 자꾸만 비뚤어지는 부모가 되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 마음을 매일 글로 옮겨 다시 바른말로 바꿔쓰고 내 마음을 스스로 자꾸만 학습시키고 또 학습시킨다.      


‘이 아이가 내 마음 아픈 곳을 예고도 없이 치고 들어와 따지고 항의해도 엄마의 권위를 내세우면 안 된다고, 아이의 말에 늘 귀를 열어두라고, 이 아이가 아무리 미숙해 보여도 이 아이가 어떤 것이든 선택하고 스스로 해나갈 수 있도록 기다려줘야 한다고, 어미인 내가 그렇게 해야만 이 아이가 세상에 나가서도 자신이 존중받을 존재라고 생각하며, 내 엄마보다,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나간다.’라고 말이다.    

           

이러한 노력 끝에, 난 내가 그동안 아이의 사춘기를 그토록 끔찍하게 느꼈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아이에게 저질렀던 잘못들이 아이의 사춘기를 통해 내 눈앞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가 사춘기가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내가 이 아이를 얼마나 억압하고 통제하며, 휘두르고 살았는지를 아이의 목소리로 듣게 되었다. 반항이 아니었다. 아이가 그동안은 어려서 잘 표현하지 못한 여러 가지 부당한 것들을 이제 내게 당당히 캐묻고 따질 수 있는 시기가 되었던 거였다.     


아이의 그 소리를 사춘기의 반항으로만 보지 않고 마음을 제대로 들어보았더니, 내 아이가 진정으로 내게 원했던 건, 엄마의 미친 좋은 부모 집착이나 통제가 아니라 어리고 미숙할지라도 늘 곁에서 자기를 믿고 묵묵히 기다려주는 부모가 되어주는 거뿐이었다. 사실 그저 난 부모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면 되었던 거였다. 이 아이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스스로 헤쳐나가며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나가는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나는 그저 가만히 기다리면 되었던 거였다.  

                  

아이의 사춘기가 너무 끔찍하다면, 부모인 우리도 함께 계속 배우고 성장해 나가며 그저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 그게 정말 우리가 우리의 부모보다 더 좋은 부모가 되는 길이다. 우리는, 육체적 성장이 끝난 후에는 당연히, 우리가 정신적으로도 ‘어른’이라는 완성품이 된 줄 알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아이를 키우며 그때야 진짜 어른으로 성장해 간다. 아이들이 부족한 우리에게 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제야 돌아보면, 아이는 언제나, 인생의 스승이었다.                                                            






[추천 책  & 마음으로 쓴 서펑]          



<아무것도 안 한다고요? 드러누워 자라는 중입니다>(엘리자베트 라파우프, 갈매나무, 2020)     

:이 책은 심리학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가족 상담사이자 심리치료사로 현장에 있는 엘리자베트 라파우프가 쓴 책이다. 저자는 이전 세대 부모들보다는 더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우리의 과도한 열망이 습관적으로 사춘기의 아이들을 통제하고 더 고통받게 한다고 한다. 이러한 부모의 과도한 통제는 사춘기 아이들에게 폭발적인 반항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저자는 사춘기의 아이들은 이제까지 겪어본 적 없는 정말 폭풍 같은 신체적ㆍ정신적 성장이라는 과업을 치르는데, 이건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고 한다. 아이 스스로 내면적, 육체적으로 더 성장하고, 더 커나가게 두어야 한다고도 했다. 결국, 사춘기의 우리 아이의 이유 없는 행동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어서가 아니며 단지, 커나가느라 그런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아이의 사춘기를 이해하고, 이때 부모가 해야 할 바람직한 역할을 알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오은영의 사춘기 터널 통과법 세트>(오은영, 녹색지팡이, 2015)     

:이 책은 아동 정신상담 분야에서 유명한 오은영 박사님이 쓴 책이다. 세트의 구성은 아이와 부모 용 책, 각각 한 권씩과 노트 한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모 편 책에서는 사춘기의 우리 아이들을 어찌하면 조금 더 이해하고 잘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한 실용적인 내용 들이 있었다. 이 책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우리가 아이의 사춘기에 특히 더 아이를 힘들게 느끼는 이유는, 우리 아이들의 사춘기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한다. 부모가 이 시기의 아이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고자 어른으로서의 아량을 좀 보여주라고 내내 부탁하고 있다. 사춘기엔 당연히 아이가 자기주장을 하고 부모에게 맞선다고도 했다. 그게 우리 아이들이 부모 밑에서 서서히 자기 자신의 정체성, 주체성을 찾아 성장해 나가고 있는 정상적인 과정이라고도 했다. 다만, 그 맞섬이 가출, 비행 등의 탈선에 해당한다면, 아이를 나무라기 전에 부모 자신을 먼저 좀 돌아봐야 한다고도 했다. 이 세트를 나는 아이와 함께 취침 전에 읽었다. 아이는 아이 편을 읽고, 나는 부모 편을 읽고 말이다. 그러면서 거기에 포함된 노트로 마음 교환일기도 내가 먼저 써서 주고 앞으로 엄마에게 하고 싶은데 말로 하기 힘든 말은 여기에다 써달라며 주었더니, 아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함께 책을 읽던 아이도 내내 재밌다며 금방 읽어내길래 난 소감을 물었다. 아이는, 이 책을 통해서 자기가 평소에 궁금했던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특히 가끔 등장했던, 오은영 선생님의 어릴 적 일화가 무척 재밌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이 책을 아이와 함께 읽고 각자 읽은 책의 소감을 나누며, 서로가 생각하는 사춘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것만으로도 며칠의 이야깃거리가 되어 즐거웠다. 이 책은 아이와 엄마가 함께 사춘기를 이해하고 서로의 위치에서 이 시기를 현명하게 지나가는 방법을 알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이전 04화 아이가 너무 버겁다는 너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