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성장 하기
[마음 일기]
2017년 3월 12일 아침 8시 54분
어제는 대학원 박사과정 첫 수업이었다. 처음으로 지도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3학기 차 선배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 알게 된 사실은 충격적이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박사학위 취득률이 생각보다 낮다는 거였다. 게다가 난 내가 공부를 하더라도 우리 딸을 최대한 덜 외롭게 하려고 일부러 집 근처 최단거리 대학을 선택했는데 교수님께서는 또 일 년에 한 학기는 통학시간이 총 8시간이나 걸리는 저 멀리 분교에 가서 수업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아. 역시, 난, 뭐하나 참 쉽게 되는 일이 없어. 결국, 이렇게 나쁜 엄마가 되고야 마는가 보다’
어제 점심시간 내내 마음으로 울며, 겉으로는 ‘네, 네’ 대답은 했으나 너무 슬퍼서 밥이 코로 가나 입으로 가나 모를 지경이었다. 이제 2학기가 돌아올 때마다 우리 가족은 토요일 내내 통으로 이산가족이구나. 거기다 박사학위도 요원해 보이고, 장거리를 주말마다 다닐 일도 아득하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지만 벌써 휴학하고 싶다.
“엄마가 미안해, 박사 같은 건 왜 한다고 해서….”
어제 집에 오자마자 입은 옷 그대로 대자로 뻗어 누워 아무 생각 없이 한탄하고 있는데, 딸이 매우 심각한 얼굴로 거실로 빠르게 가로질러 오더니만, 내게 말했다.
“엄마 난 괜찮아. 엄마 박사님 되고 싶다고 했잖아! 엄마는 할 수 있어,
우리 엄마, 힘들다고 막 그만두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누가 어미고 누가 딸인가.
그래도 이런 못난 어미 밑에서 이렇게 이 아이라도 잘 커서 정말 다행이다.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으려고 이를 앙다물고 시작한 공부가 헛되지는 않았나 보다. 정말, 참말로 다행이다.
이 일기는 내가 대학원 박사과정 첫 수업을 마치고 다음 날 쓴 일기였다. 이때가 딸이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는데, 이렇게 기특한 말과 위로를 엄마에게 주었다. 나는 아이가 주는 응원을 받으며 늘 조금씩 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아이는, 언제나 엄마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며, 늘 엄마에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 아이에게서 내가 자라며 부모님에게 듣고 싶은 말을 듣곤 했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내 아이를 통해 받고 있었다.
아이는, 언제나 엄마는 괜찮은 사람, 멋진 사람,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시도 때도 없이 오감으로 발산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나는 때론 버겁기도 했다. 아이가 나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내내 상처 가득한 내 마음에 장착되어있는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라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가 곪아 썩도록 덮어놓은 과거의 고통을 들춰냈던 거였다. 아이가 커나가면 커나갈수록, 나는 그 아이를 통해 유년기의 상처 받은 나를 자꾸 비춰보았다.
아이를 키우며, 나의 엄마가 이때 얼마나 나에게 가혹했었는지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아이가 자라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에도 이때쯤의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엄마에게 처음으로 이유도 모른 채 맞고 또 맞던 그 나이가 저토록 작고 연약한 아이일 때였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결혼해서 엄마를 이해하기는커녕, 더욱 미워서 저주했었다. 엄마라는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저렇게 어린아이를 그토록 억세게 쉬지도 않고 때릴 수가 있었나 싶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늘 내 아이를 보며 행복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과거의 상처받은 가여운 나를 보고 괴로워했다. 그래도 아이는 내 곁에서 자라나는 내내 나의 그런 상처를 다 알기라도 하듯이, 늘 엄마에게 사랑한다며, 도리어 자기가 늘 엄마에게 잘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의 상처에 묻혀 아직 엄마가 덜된 나를 내 아이는 이렇게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내면의 상처가 가득했던 나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아이가 마치 내 속에서 나온 나의 소유물처럼 대하며, 내 아이를 손에 쥐고 흔들려고 했다. 아이가 내 마음에 들게 말하고 행동하면, 더 없이 사랑을 표현해 주었고, 아이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날엔, 차갑게 대했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어느새 어린 날의 나처럼, 엄마의 눈치와 표정을 살피며 전전긍긍하는 아이로 커나가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서 어린 날의 나를 보았을 때는 나는 역시 이 세상에 나와서 어미란 게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며, 이 세상에 태어난 걸 다시 한번 더 후회했다. 그래서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아이와 나를 위해 대학교에 편입해 만학을 시작했다. 무지하지 않기 위해, 모르고 아이에게 상처 주는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십수 년을 매일 같이 배우고 또 배워나갔다.
서른여섯에 시작했던 한국방송통신대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석박사 과정에서는 오로지 나와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교육학을 전공했다. 그 십수 년의 만학에서 깨달은 건,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도, 나의 분신도 아니란 점이었다. 또한, 부모가 부모로서 얼마나 성장했느냐에 따라, 아이가 성장해 나가는 동안 그 성장을 훌륭하게 더 촉진하기도 하고, 갈기갈기 찢어 망치기도 한다는 거였다. 결국, 난 아이의 성장보다 진짜 중요한 게 바로 부모로서의 정신적 성장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토록 내가 아이가 버거웠던 건, 내가 바로 부모가 되지 않고 아직 과거의 상처 받은 어린 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모인 내가 먼저 달라지기 위해 배운 걸 실천했다. 아이가 아무리 어릴지라도 무엇이든 결정할 일이 있으면, 아이의 의사를 먼저 물었다. 그리고 아이가 어떤 의견을 내든 최대한 존중해 주었다. 내 마음의 상처를 아이를 통해 보지 않으려고, 자꾸만 더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스스로 고통을 녹여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조금씩, 엄마인 내가 엄마로 성장해 가며, 나의 마음보다, 아이의 마음에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랬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의 행동과 표정이 달라졌다. 여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행복한 아이의 모습,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 모습이 되어있었다. 이후로도 아이는 엄마가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무언갈 열심히 하면, 그 작은 아이도 엄마는 할 수 있다며 나를 응원했다. 내가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하지 않고 견뎌내면, 그 작은 아이도 자기의 일은 무엇이든 성실히 끝냈다. 내가 나로 살며, 당당하게 살아나가자 아이도 제 할 일을 척척 알아서 하고 늘 고개를 들고 방긋 웃으며 살아나갔다. 그리고 늘, 엄마처럼 뭐든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내 아이는 크면서 내내 이렇게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정신세계까지 샅샅이 배우고 학습해 나갔다. 이 아이는 아직 제 어미가 마음이 아픈 부모인지 아닌지를 고려할 만큼 사회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아주 어린 아기였을 때도, 늘 부모라는 세계로부터 무언갈 배우며, 체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아서 더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엄마인 나의 모습은 이처럼, 내 아이의 마음, 행동, 학업까지 광범위하게 아주 오래전부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내 아픔에 빠져 헤맬 때도, 아이는 나를 보고 배우고 있었다.
십수 년의 공부를 견뎌내며, 내가 부모로서 성장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도 노력했더니, 어느 날 갑자기 그토록 버겁고 어려웠던 아이와의 관계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관계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부모라면, 꼭 부모로서 성장하기 위한 지속적인 배움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아이를 낳아서 그저 생물학적인 부모가 되어 아이의 육체만 성장시킬 것인가 아니면 아이의 육체는 물론 마음도 크게 성장시킬 것인가는 부모의 정신적인 성숙과 성장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다.
우리가 더 나은 부모가 되고자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 아이도 그만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크게 성장하는데 유리한 환경에서 커나가게 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도 정신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며, 아이를 대하는 일이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아이가 아직도 나를 버겁게만 하는 거처럼 느껴진다면, 노트에 내가 아이에게 주로 내뱉는 말 딱 열 문장만 적어보자. 아마 그 글 속에 내 부모님이 우리를 상처입힌 그 놀라운 칼날 같은 언어들이 재생되고 있을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라고 거짓말하지 말자. 지금 내가 진짜 버거운 이유도 모르면서 괜스레 아이 핑계 대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버겁다고 하지 말자. 그래서 부모인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하며, 아이를 키우는 내내 우리의 마음이 조금은 덜 버거워지도록 매일 더 성숙해져야만 한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나처럼 늦은 나이에도 아이와 나를 알기 위한 만학을 시작할 수도 있다. 사실 배우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 오늘 배운 지식이 내일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을 만큼 지식의 전환이 빠른 시대이기에 나이가 많음은 새로운 배움을 시작하지 못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선, 내가 처음 만학을 시작했던 한국방송통신대를 예로 보면, 여기에도 아이와 나를 기르기 위한 다양한 학과가 있는데, 유아교육학과, 청소년교육학과, 교육학과, 평생교육학과 등 다양하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주로 사이버 강의를 수강하고 시험 때만 출석하기 때문에 아이를 보는 주부도, 직장을 다니는 워킹맘도 누구나 시작할 수 있다. 다만, 과목에 따라 한 학기에 2~3일 정도 출석을 해야 할 수도 있는데, 일정이 학기 초에 나오므로 얼마든지, 대비를 할 수 있다. 이도 여의치 않으면, 출석 대체 시험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하루 출석해서 잠깐 이 시험만 보고 오면 출석으로 인정해 준다. 심지어 국립대학이라서 학비도 3~4십만 원대로 저렴하며, 이마저도 성적이 우수하면 감면해 준다.
방송대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와 같은 배움의 열정을 가진 만학도가 잔뜩 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수업에 가보면, 이곳이 노인 대학인지, 일반 대학인지 모를 정도로, 나이 드신 분들도 아주 많은데, 늦게라도 배우고자 하는 그분들의 열정이 눈부시다. 그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배우고 웃는 과정 또한 큰 기쁨이 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100%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하는 사이버 대학 교육 관련 학과에 진학하는 방법도 있다. 이 과정은 시험도 온라인으로 치루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 출석할 필요가 없는 장점이 있으나 수업료가 수백만 원대라는 단점이 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든, 일반 사이버 대학교든 각자 자신의 상황을 고려하여 선택하면 된다.
반면, 아이와 나를 성장 시키고는 싶지만, 꼭 대학까지 가서 배우고 싶진 않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이가 다니는 곳을 잘 활용하면 된다. 아이가 교육기관에 다니기 시작하면, 그 기관이나 각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강연을 만날 수 있다. 이때,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거다. 우리 아이의 유치원 때를 생각해 보면, 이런 유명 육아 강사의 강연이 거의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씩 있다는 가정 통신문을 받았다. 그 강연에 가보면 우리가 실제로는 만나 뵈기 힘든 훌륭한 육아 전문가들이 왔다. 교육기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강연을 꼼꼼히 듣고, 집에 와서는 그 강연자의 저서를 사서 다시 한번 읽었다. 읽으면서, 꼼꼼히 읽고 메모하고 발췌하여 아이와 함께 실천해나갔더니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교사의 말로는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강연자를 모셔도 어머님들이 자발적 참석을 하지 않아서 안타깝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질 높은 무료 강연을 활용하는 거다. 아이의 교육기관에서 권하는 강연에는 꼭 가자. 혼자 가도 좋고, 아이 친구들 엄마와 놀이 삼아 가도 좋다. 난 될 수 있으면 남편과 함께 시간을 맞추어 함께 가서 들었는데, 내가 아는 지식을 남편도 알게 되니, 육아할 때 서로 의견이 달라지거나 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육아 전문가, 여성 전문가들의 다양한 강연을 듣고 그들의 저서를 사서 다시 한번 꼼꼼히 읽는 걸 잊지 말자. 그리고 아이와 나 사이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지침들은 밑줄을 긋고 발췌를 해 잘 보이는데 붙여두자. 그걸 보며 매일 직접 실천해 보는 거다. 꼭, 밑줄도 치고 메모도 남기면서 여러 번 숙지하고 어색해도 그들이 하라는 걸 자꾸만 해보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변하고자 하면,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 1mm라도 더 나은 부모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조금씩 부모가 되어가 보자. 아이와 함께 부모로 성장해 보는 거다.
"네가 진짜 버거운 것은 아이가 아니야. 그건 바로 부모가 덜된 너 자신이야."
[추천 책 & 마음으로 쓴 서평]
<하버드 상위 1%의 비밀>(정주영, 한국경제신문, 2018)
:평범한 아이들은 물론, 우리가 열등생 혹은 문제아로 구분 짓는 아이들까지도 만약 누군가에게 인생을 바꿀만한 믿음의 신호를 받으면, 성적이나 업적 등에서 점점 더 상승하는 결과를 보인다고 한다. 반면 지속해서 할 수 없다는 단정적이고 부정적인 신호를 받는 아이들은 아무리 우수한 집단이라도 점점 학습력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더 하락하는 양상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 책의 마지막으로 가보면, 저자가 이러한 부정적인 신호에 관심을 가진 계기를 기술하였는데, 저자는 대대로 교사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수학에 관심도 크고 점수도 잘 받던 아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과도한 학업지도에 학습에 대한 흥미를 잃고 이내 부모로부터 폭언과 무시를 당하며 커나갔다고 한다. 이후 저자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사는 내내 삶에서 계속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로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의식적으로 지속해서 아이에게 전달하는 부정적인 신호나 모욕적인 행동들이 아이의 미래를 얼마나 망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시사하고 있다.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문은희, 예담프렌드, 2011)
:이 책은 엄마와 나의 관계를 돌아보고, 나와 딸의 관계를 동시에 돌아보게 했던 책이다. 이 책에서는 아이를 부모에게 포함된 하나의 종속된 존재로 보는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아무리 작은 아이일지라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며, 명령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아이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보고 그 아이의 생각과 말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거다. 또 부모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부모가 아이를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인정해 주고 존중해 줄 때 내 아이가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도 했다. 이 책을 통해서는 부모가 휘두르는 사랑이란 이름의 통제와 구속이 얼마나 아이의 마음을 병들게 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