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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row and pleasure Jun 11. 2021

아버지가 너무 밉다는 너에게

다시 써보기

[마음 일기]

2021년 2월 15일 현충원.      


딸이랑, 낭군님이랑 도란도란 아빠에게 다녀왔다. 널따란 궁전 같은 현충원은 볕도 참 잘 들고 바람도 선선하게 잘 통했다. 어느 블로그에서 보니, 봄에는 개나리며 벚꽃도 만발한다고 했다. 아빠의 영혼이나마, 생전에 좋아하시던 꽃을, 봄이면 실컷 풍경처럼 보실 수 있어서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현충원에 도착해서는 매점에 들러, 예쁜 조화 두 묶음을 샀다. 아빠 묘소 앞에 도착해서 돗자리를 펴고, 가져온 간단한 제상을 차렸다. 우리는, 아빠 묘 앞에서, 절도하고 술도 올리고 생전에 무척 귀여워하시던 당신 손녀딸 어릴 적 동영상도 보여 드렸다. 그리고 요즘 당신 손녀딸이 최고로 좋아하는 ‘시크릿 쥬쥬’ 노래도 들려드리고, 딸이랑 함께 노래도 불러드렸다. 이 와중에 따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엄마 할아버지 묘에서 이렇게 막 노래 부르고 그래도 돼?”          

라며 무척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따님 생각에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는 좀 되었어도, 마땅히 슬퍼야 할 자리에서 엄마가 마냥 이렇게 신나게 노래도 부르고 신나도 되는지를 묻는 것이었으리라. 그 걱정 가득한 조그마한 따님의 눈을 보면 그저 너무 기특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한다.      


“아마도 진짜 영혼이 있다면, 할아버지도 우리가 더는 눈물 흘리지 않고 즐겁게 살기를 바라실 거 같아서.”            


라고 딸에게도 그렇게 일러주었다. 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일단 ‘응’하긴 했으나, 진심으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고 귀여운 녀석. 엄마는 네가 있어서 정말 너무나 행복하다.’        


늘 아빠에게 다녀오면 참 이상한 기분이 든다. 분명 난 아빠를 보러 갔는데, 이제 다시는 아빠를 볼 수 없다는 모순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나를 너무 슬프게 한다. 영혼이라도 잠시나마,                         

“우리 딸 왔나, 우리 손녀딸 왔어?”             


하고 인사라도 한 번 해주고 다시 들어가시면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누가 계속 우리랑 살라고 하나. 자연의 섭리가 참 궁금할 뿐이다. 어른이 되었어도, 어떤 것들은 무척이나 생떼가 쓰고 싶은 마음이다. 아니다. 어쩜 어른이 되었기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과학적인 시대에, 왜 영혼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모를 수가 있는지 참, 분한 마음도 든다. 결국, 어른이 되는 것은 이토록 아프고, 고단한 인생의 관문을 홀로 수도 없이 넘는 일인가보다. 아, 어른, 중년은 정말 고단하다.    




                       


이 일기는 현충원에 계신 아버지를 뵙고 온 후에 쓴 일기다. 아이고, 나이가 올해로 마흔다섯이나 되었는데도, 아직도 아빠가 그립다. 그래도 뭐 어떡하나 아빠가 보고 싶은걸. 마음은 아직도 5월 5일 어린이날, 아빠랑 붕붕 타고 놀러 가서 입가에 자장면 한가득 칠갑하며 먹는 그 초등학교 5학년이다. 어느 날 문득, 나와의 앙금을 풀 사이도 없이 돌아가신 아빠를 떠올리다가, 그가 인간으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 지나온 길을, 다시금 되새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인생을 딸로서가 아닌, 객관적인 시각으로 다시 본다면, 이보다는 내가 조금은 덜 슬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기억을 더듬어 글로 구성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 많은 집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했다. 엄마 말에 따르면, 할머니는 무척 장수하셨는데, 놀랍게도 입맛이 없으시다며 늘 막걸리에 밥을 말아서 김치랑 드시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늘 당신의 시어머니와 아빠 사이가 소원했다고 전했다. 아빠에게 어머니에게 가보라고 해도 안 가봤다며 말이다. 아빠와 아빠의 엄마와의 관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어느 날이었다. 다른 날처럼 아빠는 중학교를 파하고 집에 왔다. 중학생 아빠의 눈에는 아수라장의 집이 펼쳐져 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아귀같이 달려들어, 살림살이며 세간이며, 돈도 별로 되지 않을 것들을 죄다 들고 나가느라 난리 북새통이었다고 한다. 집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어머니랑 나이 차이가 나는 형님들, 누님들, 여동생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날로, 가족 전부를 잃었다.        


당시 글도 모르시면서 계주를 맡으셨던 할머니가 운영하던 엄청난 금액의 계가 몇 분의 작당과 도주로 깨지자 그 책임을 할머니가 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난데없이 빚쟁이들이 들이닥치자 할머니는 자식들을 챙기지 않고 홀로 도망을 가셨단다. 형제들도 아빠처럼 하나둘 집에 도착해, 이내 어머니가 자신들을 데리러 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 많던 형제는 각자 뿔뿔이 흩어져 자기 자신 한 몸 누일 곳을 찾아 나섰다고 했다. 열 대여섯쯤 먹었던 아빠도, 배고픔에 떠돌다가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극장에 들어갔단다.     


“오징어 땅콩~ 오징어 땅콩 있어요~”          


그 당시 극장에서는 널따란 엿판 같은 데다 기저귀 같은 명주 천을 꼬아 달아 오갈 데 없는 아이들에게 어깨에 메고 영화상영이 끝날 때까지 돌며 주전부리를 팔게 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 딸 나이 즈음의 어린 아빠는 그렇게 학교를 그만두고 오징어 땅콩을 팔며 극장 숙소에서 커나갔다. 그러다가 열 일고여덟 즈음에 미군 부대 내에 있는 레스토랑(엄마 말로는 레스토랑이라고 했으나, 아마도 구내식당일 것 같다)에서 미군 장교들의 스테이크 서빙을 몇 년간 하며 또 청년으로 커나갔다고 했다.        


청년이 된 아빠는 군에 입대했고, 아주 오래간만에 가족은 아니지만, 군이라는 테두리, 내무반이라는 테두리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테두리에 머무르기 위해 부사관 시험을 치른다. 하사, 중사가 됐고, 마침 이십 대 초반이었던 엄마를 만나고, 장녀인 나를 낳고 결혼을 하게 되어 정말 진짜 ‘가족’을 얻는다.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진짜 가족. 그리고 딸이 여섯 살이 되던 해에는 귀엽고 오동통한 아들도 얻는다.          


아빠가 늘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 했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때쯤, 아빠는 그 당시에 서점에서도 보기 힘들던 영어 회화책을 어디선가 구해서, 집에서 혼자 영어를 공부하곤 했다. 나도 심지어 내 딸까지도 이렇게 공부와 탐구에 대한 집착이 이토록 높은 것은 어쩌면 우리 아빠에서부터 내려온 유전인지도 모른다. 그 당시 그는 늘 재밌고 성실한 아빠였다. 그런데 나중에 엄마에게 들은 바로는, 그때 아빠는 자신의 학력 때문에 무척 방황했다고 한다. 당시 아빠가 ‘준위’로 승급을 하려거든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했는데,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오징어와 땅콩을 팔아야만 했던 아빠는 그 한 장의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서 퍽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아빠의 진급이 계속 밀리자, 급기야는 부하로 부리던 하급자들이 줄줄이 상급자들이 되어 나타나기까지 한다. 아빠는 난데없이 어제까지 부하였던 오늘의 상관에게 복종하고 굽신거려야 하는 처지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아빠는 술만 마시면,        


“우리 엄마가 나 고등학교만 졸업시켜줬어도 내가 이렇게 살진 않았다!”          


라면서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엄마는 지금도 그때 당신도 너무나 힘들어서, 아빠와 나를 버리고 떠나버리려고 했다고, 정말 당신도 너무 힘들었다고 그렇게 하소연을 하곤 한다. 그저 내 아빠로만 생각했던 아빠도 나의 아빠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다는 걸 나는 왜 이전에는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싶다. 인간은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도 사는 내내 인생이 내준 숙제를 치러내느라 참 힘들었겠다 싶어서 애잔한 마음이 왜 이제야 드는 걸까. 아빠는 미지의 세계, 그 어딘가로 가고 이제는 후회해도 늦었는데.   

       

언젠가 당신 딸은 그렇게 대학에 보내달라고 울고, 배우자는 절대로 대학 같은 덴 안 보내준다며 딸을 내쫓았을 때 아빠의 심정은 어땠을까. 마치 과거의 자신과 부모를 보는 것 같지 않았을까. 그 옛날 당신이 부모를 원망했던 것처럼, 당신 딸도, 막무가내 엄마를 말려주지 않고 늘 방임했다며 평생 원망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고 무기력하셨을까. 역시나 자식은 자신도 모르게 부모의 깊은 내면의 상처를 후벼 파는 도구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아빠도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 준 배우자가 세상 전부였을 수 있었다. 그 배우자는 불운하게도 누구의 말에 귀 기울이거나 배려하는 성격이 아닌 사람이었다. 늘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을 거스르면, 늘 그녀는 이혼하자고 협박하며 짐부터 꾸렸다. 혼자 남는 걸 가장 두려워한 그였다. 매번, 그의 가장 아픈 부분을 후벼팠던 배우자에게 맞서서 딸을 지키는 건, 그에겐 몹시 어려운 일이었을 거다. 그때 나와 엄마의 사이에서 그가 침묵했던 건, 딸인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홀로 남겨지는 게 두려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결과였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그의 삶을 글로 써 다시 보면서 이제 와 새삼, 난 깨닫는다. 난 아빠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아빠를 미워했었다. 그런데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자, 그저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만 났다. 그런데 내 관점에서만 보았던 아빠의 삶을 글로 쓰고 타인이 되어 읽어보니, 이해 못 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그리움과 후회만 남았다.               

아빠가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시니 내 생일날,     


‘우리 딸, 생일 축하해’         


하던 유일한 전화조차 오지 않는다. 그 마지막 전화를 받던 마흔네 살의 생일에도 그것이 아빠가 주신 마지막 선물인지도 모르고, ‘아빠는 뭐 이렇게 쓸데없이 오글거리는 전화를 매년 하는 걸까?’라고 생각했었다. 아빠의 마지막 인사를 마지막인 줄 모르고 매일 아빠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나간 그때의 내가 안타깝다.  

                  

만약, 지금 부모님이 너무 밉다면, 부모님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내용을 전부 글로 써보자. 그동안 부모님에게 자신이 들어왔던 내용이나, 자신이 기억하는 부모님의 모습 등, 기억하는 모든 내용을 자신의 일기장에 검정 볼펜으로 솔직하게 적어보자. 다 쓴 후에는 그 내용을 여러 번 읽고, 그때마다 떠오르는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색 볼펜으로 옆에 적어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쓴 아버지의 인생과 노트 귀퉁이에 쓴 자기 마음을 함께 읽어보자. 그 글을 통해 우리가 막연히 마음속에서 그토록 미워하던 부모님의 삶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의 삶을 적고, 생각하고 또 읽는 동안 부모님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자신의 마음도 읽어보는 거다. 우리는 부모를 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글쓰기를 통해 부모의 삶과 나의 마음을 통합해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정리할 수 없었던 자신의 상처도 결국, 스스로 정리해 나가게 된다. 아버지가 너무 밉다면, 너무 늦기 전에 그를 다시 써 보자. 


우리는 결국, 어찌 되었든 간에 부모라는 그들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모라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그토록 발버둥 치는 이유는, 아마도 먼 훗날 이 사무치는 그리움에 뼛속까지 아픈 후회까지 버무리지 않기 위해서일 거다. 그리움과 후회는 끔찍한 고통이니까 말이다.  




                                                     


[추천 책 & 마음으로 쓴 서평]    

    

<거의 모든 것의 역사>(빌 브라이슨, 까치글방, 2003)     

:이 책의 원자의 윤회와 관련된 이야기 부분에 따르면,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우리 몸의 세포(분자)를 구성하는 원자는 모두 윤회하고 있다고 한다. 즉, 우리가 죽으면, 우리 몸의 원자들이 모두 흙이나 바람이나 그 무엇인가로 흩어지고 다른 곳에서 식물이든 뭐든지 되어 계속 윤회를 거듭하며 살아남고 있다고 한다. 결국, 분자들의 거대한 뭉치인 한 사람의 기억이나 큰 육체는 사라지지만, 그 뭉치를 구성했던 최초의 물질은 다시 어딘가에 무엇으로든 구성되어 거의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누린다는 거다. 이러한 이야기로 보면 오래전의 베토벤, 칭기즈칸, 모차르트 등 그 옛 선인들의 최초의 구성물질조차 원자 형태로 흩어졌다가 다시 다른 분자 뭉치를 구성하고 오늘날의 인간들 세포의 어딘가에 새로운 구성원으로 존재하며 윤회하고 있는 셈이라고 한다.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지금의 나 '전체'로는 윤회할 수 없지만, 아주 작은 최초의 원자 상태의 개별적인 '나의 조각들'은 지속해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했던 이들도 분명히 어딘가에 소중한 자연의 한 부분이 된다는 뜻일 터다. 비록 우리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심지어, 우리 모두를 잊었을지라도. 그렇지만, 다시 태어날지라도, 지금의 삶과 영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흩어진다면, 온전한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문점도 들었다. 그저 원자 수준의 최초 조각으로 다시 윤회하는 것은 어쩐지 조금은 서글픈 일인 것 같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조차 식구들 걱정, 집안 빚 걱정하느라 차가운 경비실의 화장실 바닥에서 두 눈을 감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아빠를 생각하면, 차라리 모든 걸 잊는 건, 다행인지도 모른다. 역시 우주 만물의 원리가 우리를 전생의 기억을 온전히 가진 전체의 존재로 윤회시키지 않는 데는 다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아빠는 이제 그토록 좋아하시던 꽃이 되셨을까?         


“아빠 사랑해요.”       


생전에 단 한 번도 못 해 드린 말, 지금이나마, 늦었지만 적어보고 읽어본다. 부끄럽다고 미룬 말, 이제 사 가슴에서 뛰논다.                           



    

<과거여행사 히라이스>(고호, 델피노, 2021)     

:히라이스란, 본문에 보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란다. 이 책 속에서는 누구나, 히라이스라는 여행사를 선택하기만 하면 과거의 그립거나, 아쉬웠던 지점으로 여행을 갈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아무리 과거로 가봤자 큰 흐름의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런데도 히라이스의 고객들은 간절히 과거로 가고 싶어 했다. 그들이 지나온 그곳이 그리워서, 그저 추억을 되새기려고 가기도 하고 과거의 누군가에게 힘내라고 응원하기 위해서도 간다. 간혹, 힘들게 산 엄마의 일생을 생각하며, 아빠 같은 인간이랑 결혼하지 말라며, 미래의 딸이 과거의 엄마에게 가서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미래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미래에서 과거까지 와서 나를 생각해줄 딸도 없는 거 아니냐면서 엄마는, 기어이 같은 선택을 하고야 마니까 말이다. 이 책 속 어느 장의 도입부에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평가하지 말라고, 과거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거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 부분이 퍽 마음에 와닿았다. 그건 요즘 내가 내 부모님과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수도 없이 쓰던 말이었는데, 이 말을 소설책에서 보게 될 줄 몰랐다. 이 책은 참 재밌었는데도, 왠지 내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봤다. 내게도 히라이스 명함이 온다면, 나는 어디로 어느 지점으로 가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 하는 생각이었다. 여러 생각이 교차했지만, 결론은 딱 2년 전 오늘로 가고 싶다는 거였다. 아빠도, 딸보다도 날 더 아껴주시던 우리 어머님도 모두 살아 계시던 그 날 말이다. 그날로 돌아가서 맨날 박사 논문 쓴다고 미루고 미뤘던 아빠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 그 약속은 매번 다음에 다음에 하며 미루던 아빠와의 식사 약속이었다. 아빠랑 함께 그분이 그토록 좋아하던 짬뽕 한 그릇을 즐겁게 먹고 오고 싶다. 그리고 어머님 집에 가서 어머님을 더도 말고 딱 한 번만이라도 진심으로 꽉 안아드리고 오고 싶다. 그동안 늘 블로그에서 제공하는 2년 전 오늘, 3년 전 오늘, 5년 전 오늘의 내가 썼던 글들을 보면서 늘, '아, 이때로 딱 한 번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글을 볼 때마다 이때는 어머님도 계시고, 아빠도 있을 때라며 아쉽기가 그지없었다. 어느 날엔가 과학이 발달하고, 타임머신이 나올 그때, 꼭 이 소망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한다. 과학아 너만 믿는다 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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