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된 마음의 상처 찾기
유년기의 상처를 앓았던 나는 결혼 후 어느 정도의 안정감과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왠지 나는 행복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그런 마음도 들었고, 너무 행복해서 불안하고 아픈 마음도 들었다. 때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너무 행복해서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런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사실, 나는 부모님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유일한 비상구를 결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결혼만 하면, 이유 모를 이 혼란한 인생이 마무리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내 모든 상황을 다 이해하고 받아준 사람, 엄마와는 다르게 한결같이 믿음직한 그 사람이 늘 함께하고 있는데도, 무섭고 불행한 나의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마치 암세포처럼 내 속에서 더 깊고 넓게 퍼져나갔다. 결혼해도 끝나지 않는 이 마음의 고통이 대체 언제 끝나는지 너무 궁금했다. 때로는 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나라는 인간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의 신혼은 남들처럼 즐거운 나날이 아니라, 또다시 새로운 혼란의 나날로 바뀌었다.
신혼기 내내 나는 어린 시절, 살아내기 위해서 부모 때문에 했던 행동을 나의 결혼 속에서 지속해서 되풀이했다.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듯, 남편의 사랑을 의심하고, 마치 그가 언제 떠날지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굴고, 어린애처럼 때도 부려보며 남편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또한, 나도 모르게 남편이 언제 엄마처럼 돌변하는지 시험하고 있었다. 결혼 초의 나는, 남편은 늘 나와 함께 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그는 당연히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단 하나라도 내 바람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그의 사랑은 변한 것으로 생각해서, 그를 옥죄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또한, 나 역시도 아무 모자람이 없는 신혼 내내 스스로 생성한 생각 지옥 속에서 막연히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불안해하며 불행한 삶을 이어나갔다.
그의 사소한 눈빛 하나, 행동 하나하나에 나의 어두운 의미를 담고, 나를 거부하는 메시지라고 확신했다.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이 변했으면, 이제 나는 더는 가치가 없다며, 다시 자신을 미워하다 못해 증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내게 왔다. 제 존재의 의미도 알지 못했던 나는 아이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내가 너무 아파서 아이가 그렇게 이쁘게 배밀이를 하고 기고, 서고, 웃고, 연신 ‘엄 맘마 마마’ 하며 그렇게 엄마라는 인간 주위를 맴돌았는데도, 예쁘다는 생각을 할 여력조차 없었다.
나는 왜 그랬을까? 왜 다 지나간 날의 허상을 놓지 못했을까? 왜 과거의 그 끔찍한 경험을 자꾸 지금, 여기, 내 가정에서 되풀이하려고 했을까? 결혼했는데 왜 더 아팠을까? 이러한 생각이 상처 입은 나에게는 늘 숙제처럼 마음 안에 남아있었다.
나의 어린 마음에 결혼의 환상을 품게 했던 모든 공주와 왕자가 등장하는 동화의 결말은 죄다 거짓이란 말인가?, ‘공주님은 동화 속에서처럼 왕자님과 결혼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산 게 맞을까?’라는 의문도 가졌다. 내가 그토록 희망차게 읽어대던 동화 속의 신데렐라처럼, 결혼=자동 행복의 신화는 현실의 내겐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신데렐라가 동화가 아닌 현실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방임을 일삼고 밖으로 나도는 친아버지와 딸을 노예처럼 부리던 매서운 새엄마,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새언니들의 학대를 견디고 왕자님을 만난 신데렐라 역시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지 못했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이런 나의 의문에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토대로 답해 준 책을 한 권 만났다.
바로. Jon G. Allen의 <애착 외상의 발달과 치료>(박영 스토리, 2020)였다. 이 책에서 보면, 부모와 어린 시절 친밀한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 사람은, 인생의 다양하고 자잘한 삶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채 무시당하고 경멸당하던 그 심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느낌들이 생생히 다시 촉발된다고 한다. 심지어 이 책에서 제시한 여러 연구의 결과를 보면, 아동기의 학대와 방임은 향후 성인기의 정서적ㆍ신체적 건강상태 및 수명과도 부정적인 관련성을 보인다고 한다.
부모-자녀 간에 맺어진 과거가 단지 과거일 수 없는 이유였다. 우리가 풀어내지 못한 과거의 고통은, 언제나 다시 현재의 문제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옛날 그 작고 어린 내가 느꼈던 외롭고 적막한 그 고통의 감각도 결혼하고 엄마가 된 나를 비웃는 거처럼, 때때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늘 슬프고 불행했던 거였다. 이렇게 내가 외면하고 묻어 둔, 과거의 상처는 묻어 둘수록 더 끔찍한 모습으로 나에게 돌아왔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어린 시절 학대와 방임을 당하며 노예처럼 살던 신데렐라 역시 멋진 왕자님을 만나 호화찬란한 성으로 들어갔을지라도, 내면적으로는 평생을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리며 매우 짧고 불행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따라서 ‘공주님은 왕자님과 결혼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동화 결말의 진실은, 그 공주님이 어떤 공주님이냐에 따라 참 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즉, 어릴 적 부모와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엉킨 실타래를 그대로 안고 와서, 평생 그것을 풀지 못한 공주님은 왕자님과 결혼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지 못하고 평생을 자책하며 짧은 생을 마감했을 것이며,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받는, 좋은 환경의 가정에서 자라난 공주님들은 왕자님과 결혼하여 우리가 익히 아는 동화의 결말처럼 정말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라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생은 틀렸다고 포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도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누구든 자기가 가진 이 엉망진창 실타래를 차근히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실타래는 마음 저 깊은 곳에, 심지어 나조차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내밀한 곳에 있어서 아무도 이 실타래 풀기를 대신해 줄 수 없다. 왕자님이 나를 아무리 사랑한다 하여도, 결코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게 할 수 없는 거처럼 말이다.
자라는 내내 나를 돌보지 못하고, 부모의 눈치만 살피며 전전긍긍하던 나는 내 마음을 해독하고 이해할 틀이 뭔지 몰랐다. 사실 나는 부모로부터 존중받고 사랑받으며 나로 사는 법을 전혀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나 자신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없는 건 당연지사고, 사회 속, 사람 간의 관계에서 촉발되는 여러 문제에서 늘 한없이 무너졌고 다시 또 홀로 마음에 숨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형식적인 사회화 능력을 습득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신뢰와 친밀감을 쌓으며 익히는 인간관계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생기고 조금씩 커나가는 걸 보며, 이런 나의 고통을 딸에게는 절대로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방법은 몰랐지만, 과거의 학대받던 어린 내가 아닌, 현재의 나, 아내, 엄마로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러던 어느 날, 나 외의 사람은 아무도 믿지 못했던 난, 도서관의 책을 믿고 의지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읽었다. 뜻을 몰라도 읽고 지루해도 읽었다. 활자를 읽는 내내 마음에 평화가 왔다. 난독증이 있어서 한 문장을 네 번, 다섯 번 반복해 읽어야 이해가 갔지만, 아주 천천히 그저 매일 읽고 또 읽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어느새 난, 나만 바라봐 달라며 가족들을 들볶는, 차가운 어미, 나쁜 아내가 되어있었다.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엄마처럼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내가 너무 끔찍해서, 늘 스스로 깨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 책을 읽고 내 마음을 돌아보는 글을 쓰고 나의 삶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길렀다. 그렇게 나는 책을 통해 나아갔다.
책을 읽고, 마음을 쓰는 나날이 수년이 지나자, 지금까지 부모와 나 사이의 일어난 모든 일은 그냥 운 나쁜 사고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모든 고통은, 내가 원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았으니, 그저 사고일 뿐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교통사고와 달리, 이 내면의 ‘정서적 사고’는 내가 속으로 아무리 철철 피를 흘리고 있어도 아무도 날 도와줄 수 없었다. 결혼이 더없이 행복할지라도, 끊임없이 불안정하고 아팠던 건 내 몸은 여기에 있으나 마음은 현재의 나를 보지 못하고 현재의 삶을 살지도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계속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나 홀로 과거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던 거였다. 그때, 현실의 나는 그저 영혼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돌아보며, 나 자신을 자책하고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작고 나약했던 나'가 뭘 어찌할 수 없었던 일인데 소처럼 되새김질하며, 무력했던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동시에 미워하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게 해준 게 바로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내 마음을 깨닫게 해준 내면 독서였다. 나는 내면 독서를 통해 내 마음이 어떤지를 알게 된 후부터는,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상황과 상처들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으며, 더는 과거의 나를 증오하지 않게 되었다.
내면 독서란, 바로 자신의 고통 및 문제와 관련된 책을 선택해 읽고 그 과정에서 촉발되는 자신의 마음을 쓰고,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며, 객관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망하는 독서방법이다. 바로 책과 글을 활용해 독자가 과거, 현재, 미래의 나와 지속해서 대화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독서방법이다. 내면 독서로 자신의 마음과 소통하는 독서를 하면 누구나 스스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또한, 내면 독서를 오랜 기간 지속하면 타인의 시선과 삶을 의식하는 마음의 눈이 '나'로 돌아온다. 즉, 내면 독서를 하는 사람은 삶을 사는 현재 자신의 마음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며, 그 마음의 소리를 읽음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지금보다 자신을 좀 더 행복하게 할 꿈을 찾아 나가게 된다.
내면 독서를 시작하는 건 아주 쉽다. 먼저, 향기가 좋은 헤이즐넛 원두커피를 한잔 내려놓고 매일 한두 쪽의 책을 읽는 거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리곤 매일 지속해서 읽어나갈 수 있는 분량을 목표로 하고 시간을 규칙적으로 할애해 보는 거다. 그러나 단순히 많이 읽고 책 탑을 쌓는 거보다는 적은 양을 읽더라도 꼼꼼히 읽고 그때 떠오르는 마음을 쓰며 그때, 그 순간 자신의 마음을 느껴 보는 게 중요하다. 시간은 언제라도 좋다. 다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내가 가장 편안히 조용히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어야 한다.
자 이제, 오늘부터 마음이 가는 책을 골라 매일 꾸준히 읽고, 책으로 인해 떠오르는 마음의 생각들을 책 귀퉁이나 노트에 매일 깨알같이 적어보자.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을 곱씹어 읽어보며, 과거의 아팠던 마음속 내가 현재의 나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자.
‘과거의 아픈 나야, 이제 더는 숨지 않아도 돼, 이제 내가 매일 너에게 말을 건넬게.’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배르벨 바르데츠키, 걷는나무, 2013)
:저자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다는 건, 느닷없이 모두 앞에서 따귀를 맞는 것과 다른 바 없는 아픔이라고 했다. 몸에 있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고 마음의 상처도 깊고 길게, 영원토록 아플 수 있다고도 했다. 그렇기에 우리까지 의미 없는 남들의 말을 곱씹으며, 자신에게 또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상황에서 울컥울컥 이유 없이 과격해지고 이성을 잃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이 바로 마음속 깊이 봉인된 자신만의 상처라고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마음속에 봉인된 나의 상처를 하나 끄집어내 바라보았다. 사실 나는 모두 앞에서 따귀를 맞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무렵부터, 엄마와 나만 있을 때, 특히 엄마가 화가 나거나 속상할 때면 이유도 모른 채, 맞았던 상처가 있다. 내 맘에 봉인된 상처의 원인은 그래서 항상 엄마였다. 그리고 그 병을 낫게 할 약도 엄마인데, 늘 엄마는 내 상처를 보고 싶지 않아 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내 상처를 이야기하면 되레 내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아주 가끔은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그러나 보다 했었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가 된 지 40년이 넘었어도 늘 같았다. 대체 엄마의 그 숙련 과정은 언제 끝나는지 정말 알고 싶기도 했다. 나는 엄마와 다른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종종 그 옛날 차갑고 냉정했던 엄마 같이 행동하곤 했다. 그런 날은 스스로 무척 놀라고 퍽 울적했다. 나에겐 왜 좋은 부모가 없었을까. 나는 왜 이런 나쁜 걸 가르친 부모에게 태어났을까 하며 나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했다.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한 게 어찌 내 탓이었을까. 그땐 그런데도 차마 부모를 원망할 수 없어 나 자신을 증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으로 내면을 읽는 독서를 하게 되었고, 나는 내 부모와의 관계에서 배우지 못한 좋은 부모, 좋은 모녀 관계를 활자로 배워나갔다. 그리고 이제 나는 바뀔 리 없는 엄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대신 내가 원하고 그리워했던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때론 잘 안되고, 때론 또 엄마 같은 나쁜 모습들이 나올지라도 그저 오늘 또 안되면 내일 또 시도하며 계속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 오늘의 나는 아이를 대하는 매 순간에 집중하며, 내 현재의 삶에 몰입한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허지원, 홍익출판사, 2018)
: 이 책에서 삶은 매일 '나'라는 사람에 조금씩 더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완벽하게 모든 걸 잘 해내야만, 무슨 큰 의미가 있어야만 삶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고 한다. 또한, 모든 걸 빈틈없이 처리하며, 행복하게 잘 사는 거처럼 보이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구나 혼자만의 고통을 견디며 살아간다고 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혼자 감당해야 할 인생의 시련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저자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게 되면, 어릴 적 받았던 모든 애정결핍이 해소될 것 같고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존재할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 상대방 역시 나에게 그런 기대를 하기 때문이란다. 결국, 우리의 애정결핍이나 과거의 불행은 애인이나, 남편 등의 나 외의 사람이 채워줄 수 없고 회복해 줄 수 없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에게 나의 회복과 안녕을 위로해 달라고 하지 말고 그저 나 스스로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날마다 그냥 살아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사람들 속에 있어도 늘 외롭고 불행하다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