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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위에 서리가 내린 형국

시간이 흘러 조직개편 시기가 되었을 무렵 갑자기 상무가 나를 불러서 하는 말이 해외 주재원 무조건 나가야 된다고, 안 나가면 퇴사해야 할 거라는 망언을 하시더군요.

남들은 가고 싶어 하는 주재원이었지만 저는 가족 문제도 있고 해서 별로 내키지 않았던 데가 하루 이틀 만에 선택을 강요받아서 정신없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마치 주재원 가는 것이 도살장에 보내는 것처럼 저런 험한 말까지 들어가며 가는 곳인가 싶어 기분은 정말 더러웠었죠.

어쩔 수 없이 안 가면 자른다고 하니 주재원으로 나가기로 하고 부사장님까지 승인이 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조직개편이 되었고 성과도 없었고 내부적으로 평가도 안 좋았던 상무는 직책도 없고 부하직원도 없는 고문 같은 자리로 발령이 나면서 다른 곳으로 갈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이 맞나 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기존 조직들을 그룹이라는 명칭으로 통합하더니 그룹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전무라는 사람이 지주사에서 내려왔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상무가 전무에게 본인이 이 조직에서 전문가이고 중요한 일을 해왔기 때문에 본인에게 일을 맡기면 성과가 날 거라는 말에 전무가 홀랑 넘어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전무가 회사가 뺏었었던 상무의 조직과 일을 다시 주게 되고 내가 모시던 팀장은 다른 팀의 팀장으로 이동하시면서 남은 팀원들은 다시 그 상무와 일을 해야 하는 애매하고 짜증 나는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저야 다른 조직으로 갈 사람이라 크게 신경 안 쓰고 주재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발령 날짜가 다가와도 이상하게도 상무나 새로운 전무가 주재원 파견에 대해 아무런 얘기가 없었었습니다.

제가 나갈 지사에서는 나보고 언제 오냐고 계속 재촉을 하고 있어서 상무, 전무 눈치를 보다가 결국 전 팀장을 통해 전무에게 제가 주재원 언제 나가는지 슬쩍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전무가 자랑스럽게 본인이 저 주재원 못 가게 했다고 얘기했다고 하더군요. (하아... 내 참)


이럴 거면 처음부터 가라고 하지를 말던가 등 떠밀어서 가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가지 말라고 하는 것도 짜증 나고 저에게 막말까지 하면서 주재원 보내려고 했던 상무는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모른 척하면서 출국 이틀 전까지 뭉개고 있다가 주재원 못 가게 됐다고 다른 사람 통해 전하는 건 무슨 경우인가 싶었습니다.

제가 중간에 안 물어본 것도 아니고 중간중간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하고 무시하다가 결국 짐 다 싸고 난 뒤에 못 ‘가게’ 했다는 말을 듣고 정말로 속된 말로 '뚜껑'이 열렸었죠.


그래도 주재원을 못 가게 할 정도면 정말 일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고 좋게 생각하면서 겨우 정신줄 부여잡고 있었는데 전무가 저에게 처음으로 시킨 일이 지난해에 했던 나라별 시장조사를 다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좀 이상했던 게 이미 작년에 그 시장조사를 한 결과로 국가를 정했고 정해진 대상 국가에서 사업을 발굴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만들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걸 처음부터 다시 하자는 얘기였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두 달 동안 전 세계를 대상으로 어느 나라가 사업하기 좋은지 조사하는, 작년에 했던 일을 정말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두 달에 걸친 조사 결과가 작년과 비슷하게 나왔는데 전무는 이렇게 밖에 조사를 못 하냐고 성질을 부리더니 시장조사 결과를 통으로 짬 시켜 버리더군요.


전무는 이전과 다른 결과가 나오길 기대했던 것 같은데 팀에서 하려고 하는 해외사업은 나라에 대한 성장성, 안정성, 정책방향 등을 고려한 시장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대상 국가를 신중히 선정한 다음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해서 기반을 마련하고 사업을 만들어 가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 대한 고려 없이 주식 투자하듯이 해외사업을 개발할 생각으로 사업을 대하는, 전형적으로 책으로 사업을 개발해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전무도 한국에서 일류대학교 나와서 미국에서 유학하고 일류 컨설팅회사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는데 예전에 같이 일했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사업적인 감각은 떨어진다는 얘기를 듣긴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내 위에 팀장도 없이 사업을 전혀 모르는 두 명의 임원을 모시고 사업을 만들어내야 하는 정말로 아득한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상무는 계속 헛발질이었고 전무는 사업을 개발하는 것보다 주식 투자하듯 자산 인수할 생각만 가득했었는데 국내 기업들이 해외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사업 추진의 당위성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금융기관처럼 수익률만 맞으면 사업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저기 얘기하고 다녔습니다.

당연히 이런 방식의 사업방식은 내부적으로 전혀  합의가 되지 않은 내용이라서 그런 사업을 하겠다고 위로 올리면 판판히 깨지기 일쑤였습니다.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보고서만 쓰는, 회사 안에서는 뭐 하는 조직인지 모르겠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어서 어떻게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보려고 상무, 전무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제 위에 팀장도 없었고 제가 팀의 최선임이다 보니 상무와 전무에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저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얘기를 하면 할수록  나만 불만 많은 사람으로 찍히더군요.

그때 느낀 것은 위에 있는 사람이 정말 중요하다는 점, 위에 있는 사람은 조직의 성격, 목표와 딱 맞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말 궁금한 것은 그 사람들은 정말 그 조직에서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요? 개인적 성공 아니면 조직의 성장? 만약 정말로 조직의 성장과 조직에 있던 사람들의 발전을 위해 그런 행동했었다면 그 사람들이 생각한 성장과 발전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회사생활#주재원#전무#상무#리더#사업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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