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멍, 물멍...숲멍?

4월 가평 템플스테이 04 -끝-|하루 반의 완벽한 힐링 스테이

by abcd




크리스마스 위시리스트 17개 적던 그 어린이는 커서...



소원지에 쓴 소원들만 봐도, 그 사람 성격이 나오는 듯싶다. 빽빽하게 종이가 모자라게 꽉 채워 적은 사람, 1.2.3. 착착 일목요연하게 적은 사람, 심플하게 'OO 합격' 하고 굵고 짧은 네 글자를 적은 사람 (심지어 본인 이름도 없다). 나는?


열 글자 이내로 임팩트 있는 한 줄을 쓰고 싶었다. 펜을 자꾸만 고쳐 쥐었다. 첫 글자 떼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 일 줄은. 겨우 열 글자 안에 담기에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이게 내가 적는다고 그대로 나오는 음식 주문지도 아닌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산타할아버지가 진짜 있다고 믿었던 어린이 시절에도 그랬다. 혼자 방에 오도카니 앉아,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은 선물 리스트를 참 고심하며 적었던 기억이 난다. 마찬가지로 내가 거기에 쓴다고 산타할아버지가 다 주실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었던 것인가). 휘양 찬란한 다이어리 속지에 일번, 이번, 삼번... 원래는 세 개까지만 쓰려고 했는데, 빼먹어서는 안 될 것들이 또 생각나서 열일곱 번째까지도 적었던 것 같다. 쓰다가 우선순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고쳐 쓴 속지가 참 많이도 버려졌을 것이다. 그렇게 드디어 완성된 위시리스트를 보며, 눈 꼭 감고 두 손 모아 '산타할아버지, 꼭 부탁드려요' 하고 빌었던. 다소 속물스러운 일곱 살의 기억.


지금은 오히려 주위에서 물욕이 없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때나 지금이나 이런 걸 적을 때는 욕심이 드글드글한 것 같다. 미련이 뚝뚝이다. 사람은 역시 안 변하나 봐 싶어 픽 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말인데요 보살님, 3가지 정도는... 어떻게 안될까요?



오가는 방문객 하나 없이 고요한 아침. 마련된 나무 테이블에 혼자 앉아, 쓸데없이 진지하게도 꽤 오랜 시간 소원지를 썼다.


드디어 완성! 주머니 속 야심 차게 챙겨 온 현금을 하트보살동상 밑 소원함에 넣고, 두 손 모아 기도한다.


고심 고심했지만, 결국 나의 일 순위도 건강이다. 직장이라던지 연애라던지 소원이야 많겠지만 (그래서 안 썼다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꼭 하나만 이뤄진다고 생각하면 그 어느 것도 첫 번째로 올릴 수가 없었다. 이럴 때만 꼭 안 찾던 건강을 찾는다.


어디에 걸어둘까. 알록달록 걸려있는 소원지들 사이 자리를 스캔하다, 마음이 끌리는 한쪽 빈 공간 앞에 선다. '나중에 혹시 다시 방문한다면 이걸 다시 찾아낼 수 있을까' 생각하며 소원지를 조심히 걸었다.


그 자리 꼭 기억해보겠다며 눈도장을 세 번 정도 더 찍고, 발길을 옮긴다.







잣나무숲, 숲멍 타임




가평 백련사 하면 또 핫스팟이 잣나무숲 평상이다. 오기 전부터 봐 뒀다. 그 평상에 누워 멋있게 책을 읽어야겠다고. 숙소 뒷 편의 돌계단을 조금 걸어 올라가니, 누가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 저거구나' 하고 바로 눈에 들어온다.



아직은 이른 아침 시간이라 비어있는 평상은 내 독차지였다. 들이쉬는 이 숨에도 색깔이 있다면 아마 딱 이 잣나무 잎 같은 짙은 초록색이지 않을까? 몇 번이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어본다. 후~~~하.


아마도 나이와 자연에 대한 애정이 정비례한다는 것은 나만 봐도 알 수가 있다. 나는 특히 나무에 대한 애정이 더 각별하게 생기는 것 같다. 꽃보다는 나무. 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예전에 한 번은 누가 다음 생에 뭘로 태어나고 싶냐고 물음에, 크고 멋진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대답했다. 물어본 그 지인은 "엥 나무? 왜?"하고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나무에도 첫눈에 반할 수가 있구나' 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3년 전쯤 태국 여행에 갔을 때, 어떤 음식점의 야외 정원에서 이름 모를 크고 신비로운 나무 한 그루에 마음을 뺏겼다. 처음보는 종류의 나무였는데, 양쪽의 가지가 거의 수평으로 뻗어 동화 속 나무 그네를 걸어둬도 될 것 같이 큰 그늘을 만들어냈다. 전생에 저 나무가 나의 연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반쯤 미친 생각까지 들었다. 그 나무 이름을 진짜 꼭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런 짓(?) 잘 안 하는 내가 파파고까지 써가며 저 나무 이름이 뭐냐고 태국인 종업원에게까지 물었다. 이런 걸 돌이켜보면 내가 생각하기에도 의외의 포인트에서 스스로 별나다 싶은 순간들이 있다. 그 나무 이름은 아직도 반 미스터리이지만, 언젠가 그런 '내 나무'를 가지고 싶다고 그때 처음 생각했다. 지금은 집에서 엄마가 키우는 우리 집 고무나무들-무럭이와 초록이-에게 가끔 혼잣말로 덕담을 해주며, 그 이상한 로망을 채우고 있고 말이다.


아무튼. 가만히 있기만 해도 없던 병까지 나을 것 같은 잣나무들 사이에서 멍을 때린다. 불멍, 물멍도 아니고 이건 숲멍...? 멋지게 평상에서 읽으려던 책은 조금 읽다가 그냥 덮어둔다. 평상에 누워서 바라보는 잣나무들이 높고 높다. 그 사이 틈틈이 보이는 하늘이 그림 같구나. 사진으로 담아보려고 했는데, 요리조리 찍어봐도 내 눈앞의 그 모습이 그대로 담기지가 않는다. 아직 사진 기술은 발전할 여지가 충분하다. 고요한 숲에는 새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얼굴에 닿는 옅은 바람은 참 시원하고도 편안하다. 아, 이럴 때 새삼 느끼곤 한다. 진부하지만 역시 행복이 별게 없다고.





하루 반, 힐링하기 충분한 시간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등산객 분들이 하나둘씩 오길래, 나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좀 더 머물기엔 산은 산이라서 그런지 조금 쌀쌀해지기도 하고.


숙소에 들어와 방 정리를 하고, 시간이 남길래 나무 책상에 올려져 있던 책들을 가볍게 훑어본다. 그중 휙휙 넘겨보던 명상집에 마음이 가는 문장들이 꽤나 많아, 사진에 담아보았다.




지금 인생의 폭풍까진 닥치지도 않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제일 눈이 오래 머물었던 문구를 기록. 나무 일러스트도 방금 머물다 온 숲이 생각나 마음에 든다. 혹시나 나중에 벅차다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이 문구를 다시 찾아보렴, 미래의 나야.




점심공양 시간은 11시 30분. 원래는 점심까지 먹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데리러 와준다고 하셔서 점심은 생략하기로 했다. 천천히 짐을 정리하고 나와, 백련사를 다시 한번 돌아본다.



떠나려고 하니 다시 한 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던 하늘. 딱 머무는 그 시간 동안 너무나 좋은 날씨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딱히 한 것은 없지만 또 생각보다 많은걸 했던 백련사에서의 하루 반. 나는 이런 것들에 행복해하는 사람이었지, 나에 대해 사소한 몇 가지를 조금 더 선명하게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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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5-21.04.16

4월의 먼슬리여행노트

가평 백련사 템플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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