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가평 템플스테이 03|그래도 아직 AM 08:30
AM 04:30. 절에서의 아침은 보통인들의 새벽부터 시작된다. 스님들의 아침 예불 시간은 4시 30분이라고 했다. 나도 맞춰서 일어나 볼까? 하고 생각했던 건 크나큰 야심이었나 보다. 나는 보통인인데 말이다. 전날 또 12시가 넘어서야 잠에 든 나. 4시 반 알람 소리에 눈은 떴지만, 다시 잔다. 그리고 어찌어찌 5시 반 경에야 안 떠지는 눈을 떴다. 아침 공양 시간이 6시이기 때문이다.
이불속에서 자꾸만 다시 남기는 눈을 비비며, 이백 번쯤 갈등한다. 대충 고양이 세수만 하고 아침을 먹으러 간다 vs. 에라 모르겠다 다시 잔다.
아닌 게 아니라, 전 날 약속을 한 게 있었더랬다. 나와의 약속이면 조용히 무시하고 잤겠지만, 템플스테이 담당자님이랑 한 약속이었다. 오늘 아침 먹고 차나 커피를 한 잔 내어주신다고 해서 아주 좋다고 했다. '아침에 진짜 일어날 수 있겠냐'라고 물으시는 담당자님에게도 '그럼요~' 하고 당당하게 얘기했는데. 평소에는 꽤나 아침잠이 없는 편이니까 당연히 문제없을 줄 알았지. 요즘 부쩍 잠에 드는 시간이 늦어졌다는 사실을 잠깐 잊었다. 아무튼 수백 번 갈등 사이에서 결국 그 포근한 아침 이불을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다 그 약속 덕이었다.
AM 05:57. 방을 나서는 4월 백련사의 아침은 조금 쌀쌀했다. 그래도 이불속 고통스러워 할 때는 언제고, 시원한 아침 새벽 공기에 얼굴을 부딪히는 기분이 꽤나 상쾌하다. 템플복에 후드 잠바 하나를 휙 걸치고, 양 주머니에 손 푹 찔러 넣고 걷는다. 절에서는 보통 밥을 빨리 드시니까 공양 시간은 늦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다시 약간 뛰는 걸음으로 공양간으로 향한다.
공양간에 들어서니 6시 5분쯤. 나름 빨리 온다고 왔는데도 약간 늦어버렸군. 역시나 스님들은 더 일찍 오셔서 반 이상 이미 식사를 하신 것 같아 보였다. 음식 준비해주시는 아주머니께서도 이미 오른쪽 한편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괜히 쫌 죄송스러운 마음에 얼른 걸어가 아침 반찬들을 그릇에 담는다.
왼쪽에 무리 지어 앉아 계신 스님들의 뒷모습을 조금 훔쳐보며 식사를 한다. 어제는 못 뵌 것 같은 스님들, 특히 여자 스님도 한 분 계셨다. 모두 어떤 계기로 스님이 되셨을까 궁금하다.
아, 인증샷도 빼먹을 수 없다. 아침 6시, 무려 '밥'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나라니. 이 역사적인 순간을 가족들에게 사진으로 찍어 보낸다. 스스로가 괜히 좀 멋지다.
사실 걸어오는 중에는 배가 하나도 안 고팠다. 어젯밤 간식을 까먹고 잔 탓(^^)도 있고, 평소에 아침을 안 먹다 보니 그렇다. 그런데 또 먹다 보니 들어가는 매직. 고기 없이도 이렇게 다양한 반찬이 가능하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제저녁 메뉴랑 비슷하겠지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무엇보다, 맛있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친 뒤, 약속한 차담 시간이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바깥에서 기다리시던 템플스테이 담당자님을 따라갔다. 오른쪽 한 켠에 작은 본인의 사무소와 같은 별채로 나를 안내해주셨다. "커피 아니면 차?" 하고 물으심에, 모닝커피의 노예는 1초도 고민 않고 바로 커피를 외친다. 직접 내려주시는 원두커피의 진한 향. 취한다.
벽면 책장에는 빼곡히 책들이 꽂혀있다. 제목에서부터 심오하고 어려워 보이는 책들도 많이 보인다. 꽂혀있는 책들의 두께만큼이나 깊이 있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책도 많이 읽으시고, 다양한 공부를 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련사 안에 정자도 지으시고, 나무도 심고, 돌부처상 조각도 하셨다 했다. 최근 읽었던 <폴리매스>에서 말하던 다재다능 인간상이 떠오른다.
그 중에 이상하게도 제일 기억에 남는 말은 이거였다. 누가 보던, 보지 않던 늘 아침 이부자리부터 잘 갤 것. 자기계발 서적에서 혹은 성공한 사람들의 강연에서 이미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 기는 하다. 그런데 동시에 결국 제일 중요한 것들은 변치 않나 보다. 멋들어진 명언들 많고 많지만, 관통하는 핵심은 같은가 보다 싶다.
한 한 시간쯤 지났을까? 대화를 마치고 숙소로 다시 걸어가는데, 아침에 뒷모습으로 훔쳐보던 여자 스님께서 나를 부르신다. 차를 한 잔 주시겠다고! 앗 방금 커피를 한 잔 하기는 했는데 말이죠. 또 일부러 차를 내어주신다는 게 감사해서, 그렇게 2차를 하러 스님을 따라 들어갔다.
들어간 곳은 사무실 같아 보였다. 아마도 주지스님이라고 소개하셨던 분이 한 분 더 앉아계셨다. 들어가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신다. 눈이 참 예쁜 여자 스님께서는 차를 내어주셨다. 보이차였는데, 조금 씁쓸한듯 구수한 맛이 좋았다. 보이차 하면 나는 그렇게나 홍콩 살던 시절이 떠오른다. 딤섬집에서 특히나 많이 마셨는데 말이다. 나에게는 치킨-맥주와 같은 보이차-딤섬 간의 연상 관계. 오랜만에 보이차를 들이켜니, 마음은 홍콩에서 자주 가던 로컬 딤섬집에까지 가버린다.
아무튼 두 분께서는 차를 같이 하며, 가볍게 여러 가지를 물으셨다. 어떻게 백련사를 알게 됐고, 와서 뭘 했는지. 평일엔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편안한 대화였다. 알고 보니 코로나 때문에 요즘엔 여럿이서 모여서 하는 차담도 못한다고 한다. 다 같이 모여서 하던 건데, 누군 하고 누군 못하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고 말이다. 나는 혼자 와서 또 이렇게 오붓한 차담에 불러주시니 운이 좋았다.
백련사는 아주 오래되고 큰 절은 아니지만, 조용하고 예쁜 절이라 두 분께서도 자부심이 있어 보였다. 끄덕끄덕. 저도 하루 있기는 했지만 동의합니다.
특히 소원 맛집으로 유명한데 소원지는 썼냐고 물어보셨다. 사실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다른 분들이 쓰고 가신 것들 구경만 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어떻게 하는 건지도 알려주셨다 (나는 거기 바로 앞에 소원지가 있었는데, 눈앞에 두고 그걸 몰랐었다고 한다...). 남자친구 생기게 해 달라는 소원을 쓰고 진짜 커플이 되어 그 남자친구와 함께 다시 템플스테이를 오신 분도 있었다고. 영험한 소원 맛집 스토리를 들으며, 귀가 솔깃해진다.
또 잣나무숲 평상은 가봤는지, 템플스테이 숙소 2층에 다도하는 곳은 가봤는지도 물어보셨다. 차를 다 마시면 하나하나씩 백련사 핫스팟을 다 찍고 가리라 마음먹는다.
아니, 소원지도 하나 안 써보고 소원맛집에 와봤다 말할 뻔했다!
AM 08:30. 커피와 보이차 두 잔을 때렸는데도 아직 8시 반인, 뿌듯한 얼리 모닝의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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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5-21.04.16
4월의 먼슬리여행노트
가평 백련사 템플스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