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은 됐고, 혼회하는 밤

3월 동해 여행 05|가자미회와 레모네이드

by abcd



묵호항 수산시장, 혼자 먹을 회 뜨러 왔습니다



나의 다음 행선지는 @묵호항활어센터. 애초에 묵호항을 찾은 이유였던 수산시장을 그렇게 찾아갔다.


들어가는 골목 바로 옆에 수협은행 ATM기에 우연히 시선이 닿았는데, '아, 이런 시장에서는 역시 현금이려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평소 아이폰 케이스에 카드 한 장 껴다니는 요즘, 내가 현금이 있을 리가 없다. 들어가서 야심 차게 5만원을 뽑는다.


나 혼자 수산시장이라니! 서른 살이나 먹었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시장에 혼자 가본 적이 없는 나. 현금을 뽑아 들고 들어가며 좀 떨렸다. 이게 뭐라고. 어렸을 적 가짜 화폐 가지고 시장놀이하러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처음 해보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 반, 설렘 반이다. 시장 앞에서 떨렸다니 다시 생각해보면 좀 우습지만. 난 아직 서른 먹은 애가 맞나봐.


내가 들어간 입구 기준으로 오른쪽은 활어, 왼쪽은 죽은 생선(?) 등을 파는 것으로 나눠져 있는 듯했다. @@수산, XX수산, ㅁㅁ수산.. 수많은 선택지. 원래는 다른 분들이 사는 것 좀 구경하고 따라 사려다가, 그냥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던 집 아주머니 쪽으로 향했다.





묵호항활어센터



미리 잠깐 검색해 보았을 때, 묵호항에서는 오징어를 많이 사는 듯했었다. 그래서 나도 물었다.


"안녕하세요. 오징어는 어떻게 하나요?" (뭘 '한단' 말인가. 시장이 처음이 아닌 척하고 싶었나 보다).


아주머니는 뜰채로 오징어 한 마리를 뜨더니, 한 마리에 만원이라고 하신다. 음... 조금 비싼 건가? 감이 없다. 있을 리가 없다. 블로그에서 보았던 글들은 대부분 적어도 2명이 먹을 회를 산 내용이라, 레퍼런스로 삼을만한 글도 딱히 찾지 못하고 들어왔던 터였다. 그저 마음속 예산은 '혼밥 할 거니까 2만원은 넘기지 말아야지!' 정도? 그래도 혼자 먹는다고 또 오징어만 사기는 싫은데... 그래서 다시 여쭈었다.


"음.. 저 혼자 먹을거라 조금만 살 건데요. 혹시 혼자 먹게 추천해주실 다른 건 또 뭐가 있나요?"


아주머니는 잠깐 통에 담긴 물고기들을 보시더니 이름 모를 납작한, 그리 크진 않은 활어 한 마리를 뜰채로 뜨셨다. 네 마리에 2만원이라고 한다. 회알못은 이름을 알리가 없다. 또 여쭈었다.


"이게 무슨 고기인데요?"


"가자미에요"


아, 가자미. 이름은 익히 들어봤지만 이게 가자미인지는 역시 처음 알았다. 응, 지금 다시 구분하라고 해도 못해. 회라고는 광어, 우럭, 방어회 정도 아는 내 기준으로는 많이 들어본 횟감(?)은 아니라 속으로 조금 실망했다. 그치만 뭐 맛있을 수도 있으니까. 다른 데를 더 알아보고 사려다가 그냥 만다. 귀찮아.


"아 4마리는 좀 많은데.. 그러면 혹시 이거랑 오징어 반반 해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여쭈니 (역시 한국인은 반반 아닌가), 아주머니는 조금은 시크하게 뜰채로 가자미 2마리와 오징어 1마리를 바구니에 담으셨다.


"이렇게 해서 만 오천원에 드릴게요".


음 내가 잘 사는 게 맞나.. 생각하며 약간 머뭇거리니, 좀 더 작은 사이즈의 오징어 한 마리를 더 껴주셨다.


"오.. 감사합니다!"


한 마리의 서비스에 사르르. 흥정에 별로 소질이 없는 나는 그렇게 구매를 쉽게 끝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잘 산 건지, 비싸게 산 건지..? 그치만 뭐 내가 생각한 예산 안쪽이었고, 먹어보고 싶었던 오징어와 처음 먹어보는 가자미의 조합으로 샀으니 그래 잘 산거겠지! 결론 내버렸다.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를 닮으셨네요



아주머니는 그렇게 가자미와 오징어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건너편으로 걸어가셨다. 나는 그 걸음을 뒤에서 종종 쫓았다. 아주머니가 향한 곳에는 할머니들이 빙 둘러쌓고 앉아 회를 뜨고 계셨는데, 그중 한 할머니께 바구니를 건네셨다. 두 분이서 파트너십 관계신가..? 할머니는 굽은 등으로 걸어 나오셔서 바구니를 들고 가 다시 본인의 자리에 앉으셨다.


나는 아주머니께는 현금 이만원을 드리고 오천원을 거슬러 받았다. 그리고 내가 산 물고기들을 가져가신 할머니 앞에 얌전히 섰다. '이런 시스템이구나..' 별건 아니지만, 이런 낯선 과정을 혼자 경험하고 있다는 느낌 자체로 이상하게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빠글거리는 파마를 하시고, 왜소한 몸집으로 자리에 앉으신 할머니는 아주 능숙하게 회를 뜨기 시작하셨다.


그러고는 한참 회를 뜨시다가, 나를 보시더니 뭐라고 질문하신다.


"네..?"

못 알아들었다. 다시 말씀하신다.


"..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귀를 할머니 쪽으로 들이밀었지만 이런, 못 알아듣겠다. 마스크가 있어서 더 해..

내가 계속 "네?!"만 외치고 있으니 할머니가 답답함에 폭발하셨다 ㅋㅋ ㅜㅜ


"아이고 환장하겄네.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어."


앞에 문장은 세 번을 들어도 못 알아들었는데, 그 문장만큼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들으니 처음 물으신 말도 다행히 조금 캐치가 되었다. '혼자 먹으려고 샀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아~~~ 네. 제가 먹으려고요."

ㅎㅎㅎ 휴... 제발 내가 이번엔 말을 알아듣길 바랬던 그 찰나의 순간.


할머니는 또다시 회를 뜨시더니 물으신다. 얼마 주고 샀냐고. 내가 "만 오천 원이요- 비싸게 산건가요?!" 하니 "이..그럼 괜차녀" 라고 하신다. 다행히 할머니께 잘 산거라고 인정받았다. 아직도 진실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할머니는 물고기가 작은 편이고, 양도 얼마 안 되니 물으셨던 것 같다. 아니면 단순히 회 뜨는 비용을 계산하시기 위해서였거나? (참고로, 회 뜨는 비용은 2천원이었다)


뭐 아무튼. 이번에 처음 안거지만, 원래도 그리 큰 사이즈의 가자미가 아니었지만 회 뜨니 정말 째끄매지더라. 그래도 막상 나중에 오징어랑 같이 담으니, 작은 스티로폼 용기가 거의 꽉 차서 혼자 먹기엔 조금 남을 정도로 충분했지만 말이다.





굽은 등, 작은 체구, 뽀글 파마, 약간은 부은 듯 내려앉은 선한 눈매의 두 눈. 보면 볼수록 앉아 계신 모습에서도, 얼굴에서도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나서 회를 떠주시는 할머니를 바라보는 내내 기분이 묘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도 3-4년은 되었을까 벌써? 어쩔 수 없이 아들 선호 사상이 있었던 어르신 정서에, 할머니의 최고 관심은 늘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아들인 내 동생을 향해있었다. 그게 어렸을 적에는 조금 서운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할머니가 나도 참 예뻐하셨었는데.


오랜 투석으로 많이 상했던 할머니 손등도 생각나고, 바짓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 주시던 만원 짜리도, 할머니가 자주 드시던 스카치 캔디랑 양갱도. 우리가 언제 도착하든, 그게 밥시간을 한참 지난 대낮이건 한밤 중이건 배가 부르대도 극구 차려주시던 따뜻한 밥도 생각이 났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산 것 까진 아니니 아주 각별한 정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나 보다. 굳이 따지자면 할머니가 '보고싶다'라는 감정보다는 '그립다'라는 단어가 좀 더 어울리는 감정이었다. 진짜 단어 뜻 차이가 어떤지는 모르겠고, 그냥 내 느낌이다.





혼술은 됐고, 혼회하는 밤



할머니는 초고추장은 샀냐고 물어보셨다. 내가 아니라고 하니, 바로 나가서 왼쪽에서 2천원 주고 살 수 있다며 친절히 알려주셨다. 거기서 젓가락도 하나 달라고 하라고 (이 말들 알아듣는데도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ㅎㅎ 그 순간은 영어나 중국어 듣기 능력 테스트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그렇게 초고추장과 젓가락까지 레디. 바로 앞 편의점에서 과자와 음료수도 좀 사서 택시를 타고 저녁 6시도 안돼서 일찍 들어왔다. 나는 술도 잘 안 마시니, 오늘의 음료는 레모네이드. 참 건전한 여행이다.


가자미회와 오징어회

고작 회 뜬게 뭐라고 돌아오는 길이 너무 뿌듯했다. 낯선 경험에서 느껴지는 묘한 카타르시스. 아 이런 게 여행하는 맛인가? 하며 참 소소한 것에 진하기도 진한 감상을 남겨본다.


들어오니 급 피곤이 몰려와 한 시간 정도 내 마음대로 1층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아주 뜨끈한 바닥에 앉아, 그렇게 혼술 말고 혼회를 했다 (어감이 좀 어색하지만).


술 없어도 아주 맛있다. 기대 이상으로 가자미회가 참 맛있었다. 잠시 잠깐 잘 모르는 고기 종류라고 속으로 무시했던 가자미야, 미안. 선입관을 경계하자.


여유롭게 혼회 하는 밤. 이런 게 찐 행복이구나.





가자미회도, 돌아가신 친할머니를 닮았던 할머니도. 모두 다 전혀 계획 없이 마주했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동해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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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0-21.03.21

3월의 먼슬리여행노트

동해/묵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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