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전하지 않기에 시작될 수 있었던 이야기
세상의 시작은 완전함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세상이 처음부터 질서 정연하게 세팅된 공간으로 출발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토후 보후, tohu wa-bohu)과 공허, 깊은 흑암 위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 창세기 1장 1–2절
이 두 구절은 단순한 ‘기원 보고서’가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미 잘 짜인 세상의 틀 위에 무엇인가를 추가하신 분이 아니라,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무질서와 공허, 오히려 저항하고 반항하듯 거친 공간 속에서 ‘있으라’ 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잠깐, 이 장면을 특별하게 해석한 신학자가 한 명 있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개혁신학자로 불리는 칼 바르트(Karl Barth)라는 인물입니다. 1886년 5월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1968년 12월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개혁신학자라 불리는 동시에 히틀러에 맞선 행동하는 신학자라는 별명으로도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신학자이지요. 1930년대 독일,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나치즘이 독일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갑니다. 심지어 교회조차도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고, 히틀러를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처럼 떠받들었습니다. 이걸 "독일 국가교회"라고 부르는데, 히틀러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예수님도 "아리안적 영웅"처럼 포장하기 시작했던 때입니다. 교회 강단에서는 복음 대신 "독일 민족주의"와 "나치이념" 이 선포되었었죠.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르멘 선언"(1934년 5월)입니다. 칼 바르트, 디트리히 본회퍼, 마르틴 니묄러 같은 진짜 "영적 깡패" 들이 독일 도시 바르멘(Barmen)에 다 모였였죠. 여기서 선포된 것이 "교회는 히틀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건데, 주요 선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 과 같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 만이 교회의 유일한 주님이시다. (히틀러나 어떤 권력도 교회를 지배할 수 없다.)
2. 국가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국가 권력이 교회를 휘두르면 안 된다.)
3. 복음은 인간의 생각이나 정치 이념에 종속되지 않는다. (민족주의, 인종주의로 복음을 왜곡하지 마라.)
4. 참된 교회는 정치적 충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신앙은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교회의 주인은 히틀러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복음을 정치에 팔지 마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정도 되겠네요. 바르멘 선언에 서명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본회퍼는 처형당하고 칼 바르트는 독일에서 쫓겨나 스위스로 추방당하고, 니묄러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죠. 교회가 권력에 휘둘릴 때마다 바르멘 선언이 인용되는 역사를 많이 봤습니다.
그런 배경을 가진 칼 바르트가 창조의 이 장면을 보고 『교회 교의학』 제3권 1부에서 바르트는 창조를 "기계적 작동"이나 "이미 준비된 무대 세팅"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능동적이고 주권적인 ‘말씀 사건’(event of the Word)으로 설명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창조는 이미 준비된 세계를 다듬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無)의 깊은 저항 속에서 그분의 주권적 말씀이 폭발하듯 터진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멋진 수사라기보다 하나님은 '편안한 상황'에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무질서, 저항, 가능성 없는 자리, 절망적인 혼돈의 심연 속에서 말씀 하나로 질서를 세우신 겁니다.
우리는 종종 삶에서 모든 조건이 갖춰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오히려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자리에서 "빛이 있으라"라고 외치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창조의 리듬을 반복하십니다. 그리고 매 순간 "보시기에 좋았더라(토브)"라고 하십니다. 이 "좋음"은 히브리어로 ‘토브(טוֹב)’, ‘완전함’이 아니라 조화와 가능성의 방향성을 의미합니다.
(“토브(טוֹב)”의 의미와 용례는 Blue Letter Bible의 브라운-드라이버-브릭스 히브리어 사전(BDB)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blueletterbible.org/lexicon/h2896/kjv/wlc/0-1/
다시 말해, “칼 바르트의 창조론에 따르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선언은 상태의 완벽함을 의미하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동행의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약에서도 확인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하노라.” (고후 5:7)
완벽히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 창조는 그렇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욱 믿음과 동행이 필요한 세계로 열려 있는 것이지요.
여섯째 날 흙에 불과했던 인간은 하나님의 숨결로 살아나는 존재가 됩니다. '아담(사람)은 '아다마(흙)'에서 왔습니다. 하나님의 숨결(루아흐) 없이는 그는 여전히 흙에 불과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창세기 2장 7절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돼, 그 자유 안에 반드시 ‘선택의 한계’를 설정하셨습니다.
그 한계는 선악과로 상징됩니다. 이것은 금지가 아니라,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치였습니다.
사랑은 강요될 수 없고, 신뢰는 강제할 수 없으니까요.
현대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간은 자유라는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권위와 동화를 추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왜 인간은 그렇게 어렵게 얻은 자유를 두려워하고, 스스로 포기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같은 책에서 던집니다. 결론은 "자유는 축복인 동시에 고통" 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정엔 책임이 따르죠. 책임엔 불안을 동반하고요. 에리히 프롬이 말한 3가지 도피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권위에 복종입니다. "나는 모르겠고, 저 사람 말만 따르면 돼."
두 번째는 파괴적 충동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으니, 차라리 다 부숴버리겠다." 관계에서 일부러 망쳐버리는 행동, 삶을 파괴하는 중독(알코올, 마약) 그리고 심지어 전쟁이죠.
마지막으로 자동적 동화입니다. "나는 그냥 사회가 하라는 대로, 유행하는 대로 살래." 광고가 시키는 대로 소비하고, 남들 하는 대로 직업을 고르고, 유행에 따라 사고하는 것이죠. 남들과 똑같으니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을 종속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실패할 수도 있는 위험한 자유를 선물하셨죠. 그분은 완벽하게 설계된 프로그램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완성되어 가는 관계를 원하셨습니다.
이 신학적 통찰은 신약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엡 4:13)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루어져 가는’ 존재. 불완전함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가능성이었고,
그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프롬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짜 자유는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가 선택한 길의 결과를 책임질 용기를 갖는 것이다.” 여담으로 에리히 프롬은 유대인 랍비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후에 종교적 율법주의를 비판하면서 휴머니즘 심리학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죠. 그래서 종교적 전통과 인간 자유 문제에 아주 예민했었습니다. 처음 언급한 칼 바르트보다 정확히 한 세대 뒤 인물입니다. 시대적 고민은 비슷했지만 바르트는 “하나님 중심에서 자유를 말한 사람”, 프롬은 “인간 중심에서 자유를 고민한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시 창조 이야기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동화된 인간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애초에 ‘선악과’라는 위험한 선택지를 둠으로써, 스스로 선택하고, 그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세우셨지요. 쉽게 말해, 하나님은 인간을 ‘순종 로봇’으로 만들지 않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하나님과 동행하길 원한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늘 선택의 여지가 남겨져 있고, 그 결정은 불안과 두려움, 책임을 동반하게 되었죠.
완전함은 하나님 곁에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완성되어 가는 과정’ 그 자체가 완전함의 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완전함은 동행 속에 완성되지만, 선택은 언제나 단절의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정교하게 설계된 프로그램처럼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순종만 하도록 코드에 새겨 넣지 않으셨고, 실패할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는 위험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사랑은 강요될 수 없고, 진짜 신뢰는 반드시 선택 속에서만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의 한가운데에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완전한 동행의 정원 한복판에, 언제든 하나님 없이 살겠다고 선택할 수 있는 ‘결정적 문’을 열어 두신 것이지요. 인간은 그 문 앞에서 자유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고, 그 단절은 곧 타락이라 불리게 됩니다. 선택의 자유는 은혜였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인간 스스로 책임져야 할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단절된 자리에서 다시 찾아오셨고, 숨은 인간을 향해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9)
그 질문은 지금도 울리고 있습니다. 완전함은 이미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 속에서 끊임없이 완성되어 가야 할 여정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그 선악과 앞에 서 있습니다. 동행의 길을 선택할지, 단절의 길로 걸어갈지. 그 결정은 오늘도, 우리의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