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과 단절
에덴동산 한가운데, 인간의 자유와 한계를 상징하는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 창세기 2장 16–17절
이 명령은 단순한 금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유의 본질이며, 사랑의 조건이었습니다.
사랑은 강요될 수 없습니다. 신뢰는 강제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절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고귀한 선물인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뢰 대신 지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동행의 길보다,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자신의 기준으로 세계를 재편하겠다는 실존적 선언이었습니다.
20세기 대표적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문학가인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1980)는 1945년 발표한 강연을 정리한 저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존재(실존)는 본질에 앞선다."
이 말은 “인간은 미리 정해진 본질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고, 살아가면서 스스로 선택과 행동으로 자기 본질을 만들어간다”는 실존주의의 핵심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떤 ‘고정된 본질’이나 ‘미리 주어진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던져진 이후,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를 만들어 간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 그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자유의 부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진정한 자유란 자신이 한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감당할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정리하면 신이 존재하지 않으니, 인간은 더 이상 "선과 악"에 대한 절대적 기준 없이
스스로 자기 존재를 정의하고,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타락 이후, "내가 선악을 알겠다"는 인간의 선언과 정확히 맞닿아 있는 것이죠. 결국, 신의 부재를 전제하고 스스로 신이 되려는 존재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론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절대적 자율성만을 강조한다는 것이죠.
신앙과는 본질적으로 대치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샤르트르 보다 한 시대 앞선 "실존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키르케고르(1813~1855)가 고민했던 실존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였죠. 키르케고르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문제를 “신 앞에 홀로 선 절망적 인간”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인간이 군중 속에서 자신을 잃고, 타인의 시선에 맞춰 살아가려 하지만, 진정한 자기 발견은 결국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고독한 자리에서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러나 이 절망을 통과하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에 도달할 수 없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절망 속에서 세 가지 선택 앞에 놓인다고 말합니다.
미학적 절망 – 쾌락과 순간적인 즐거움으로 절망을 잊으려는 시도. 하지만 결국 허무만 남습니다.
윤리적 절망 – 도덕적 선행과 책임으로 절망을 극복하려 하지만, 인간의 한계와 실패 앞에 또다시 절 망합니다.
종교적 절망 – 자신의 무능과 절망을 인정하고, “신 앞에 홀로 서는” 절대적 고독 속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만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절망의 깊은 자리에서야 비로소 인간은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을 통해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설명이 모두 멈추는 자리, 이성도 논리도 답을 줄 수 없는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붙들고 전적인 신뢰로 도약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 존재가 절망을 넘어 참된 자유와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그는 선언합니다.
정리하자면:
키르케고르: "신 앞에 홀로 선 인간" → 실존적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도약하라!
사르트르: "신은 없다. 네 인생은 네가 결정한다." → 스스로 신이 되어라!
여러분은 어느 쪽이 신지요?
선악과는 단순한 ‘금지된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를 묻는 실존적 선택의 상징입니다. 초기 교부인 어거스틴은 『고백록』과 『신국론』에서 선악과 사건을 ‘교만의 죄’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숨겨진 욕망— 바로 그 교만이 선악과 앞에서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를 ‘자기 사랑(cupiditas sui)’이라 불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고, 결국 사랑의 질서를 깨뜨린 채, 선악과를 선택했습니다.
칼 바르트는 이 장면을 『교회 교의학』에서 언약적 관계의 위기로 해석합니다. "선악과는 자유의지의 증거이자,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의 시험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절할 자유’까지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을 억지로 복종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자유 속에서만 진실할 수 있기에,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 두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신뢰 대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겠다는 길을 택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것을 『윤리학』에서 '하나님 없이 자신을 정의하려는 시도'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그날,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자신을 끊어내고, 선과 악에 대한 기준조차 스스로 세우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본회퍼는 이것을 현대적 의미의 자기 결정권으로 비판하며, 그 순간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스스로 세상의 중심에 서려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고통과 소외, 그리고 존재의 근거를 상실하는 절망이었습니다.
C.S. 루이스는 이 사건을 『순전한 기독교』와 『고통의 문제』에서 '관계적 질서와 사랑에 대한 신뢰의 붕괴'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 인간과의 사랑의 질서를 유지, 즉 선악과 금지는 arbitrary(임의적)인 금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신뢰를 깨뜨리고, 하나님 없이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그 순간부터 인간은 선과 악을 알게 되었지만, 동산을 잃고, 하나님과의 동행마저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뱀'이라는 존재가 하와를 다음과 같이 유혹하고 도발하죠.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창세기 3장 1절
하나님은 모든 열매를 다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만 먹지 마라고 하셨는데, 뱀은 진리를 비틀고,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 모든 동산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는 즉, 억울하지 않느냐라는 말투로 말이죠.
하와는 뱀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 창세기 3장 2~3절
여기에 흥미로운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만지지도 말라"는 원래 하나님의 말씀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장 17절에서 "먹지 말라"고만하셨지, "만지지 말라"고는 안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와는 하나님 말씀에 자신의 해석이나 과장을 덧붙인 것이죠. 다 먹어도 되는데 딱 한 가지,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한 가지 못 먹는 것이 억울했나 봅니다.
두 번째는 하와가 답한 마지막 부분에 "죽을까 하노라"인데, 그것은 확신 없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는데, 하와는 "죽을지도 몰라요" 하면서 확신을 약화시켜 버리죠.
하와는 이미 뱀의 질문에 휘둘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과장하고(만지지도 말라), 약화시키며(죽을까 하노라)
혼란에 빠진 상태였던 겁니다. 이게 바로 유혹의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말씀을 더하고, 빼고, 흐리게 만드는 것.
당시 고대 근동 문화에서 뱀은 혼돈, 위험, 죽음, 지혜를 상징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벨론 신화에선 혼돈의 신 ‘티아마트’가 거대한 뱀으로 묘사되고, 이집트에선 태양신 라를 위협하는 혼돈의 뱀 ‘아펩(Apep)’ 이 있었죠.
그런데 성경은 이 뱀을 그냥 문화적 상징으로만 두지 않고, 영적 실체인 ‘사탄’과 연결해서 해석합니다.
초대교부들과 많은 신학자들은 뱀 자체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사탄이 뱀의 형상을 빌려 등장했거나, 사탄이 뱀 속에 들어가 역사했다고 봅니다.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모두 이런 해석을 따랐죠. 뱀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고, 인간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을 부추기는 사탄의 상징적 형상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유혹과 거짓의 화신으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1)와 같이 진리를 비틀고,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요. 질서 파괴와 혼돈을 유발하여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교묘하게 깨뜨리려 하는 존재요. 마지막으로 독립적 존재 선언을 유도하여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창 3:5)라고 말하며, 인간 스스로 신이 되게 하려는 존재입니다.
이런 격변의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은혜를 베푸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 창세기 3장 21절
가죽옷의 신학적 상징과 해석을 해 보겠습니다.
첫째, 은혜의 시작이며 최초의 희생입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희생’이 필요합니다. 동물이 죽어야 가죽이 나오니까요.
이것은 인류 최초의 ‘피 흘림’이 동반된 희생 제사적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훗날 구약의 희생제도,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까지 연결되는 속죄의 그림자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 히브리서 9장 22절
선악과 사건 직후, 하나님은 이미 구속사의 첫 장을 열고 계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부끄러움의 가림, 인간 조건에 대한 자비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나자 인간은 처음으로 수치심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리지만, 그건 임시적이고 불완전하겠죠.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어설픈 자기 해결 방식을 넘어서, 더 깊은 차원의 가림과 보호, 은혜의 손길로 가죽옷을 주신 겁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문제는 인간의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삶의 시작, 존재의 전환입니다. 가죽옷은 단순히 물리적 보호가 아니라,
이제 낙원 밖, 새로운 현실에서 살아가야 할 인간 존재에 대한 대비였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심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추운 현실, 고통과 노동의 땅에서도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신 거라고 봅니다.
타락한 인간을 철저히 버리지 않으시고, 새로운 삶의 자리에서도 은혜로 동행하시겠다는 배려의 상징입니다.
정리하면, 가죽옷은 희생을 통한 속죄, 수치의 은혜로운 가림, 그리고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라는
세 가지 은혜의 깊은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선악과 사건은 단순한 불순종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자기 존재를 독립적으로 세우려 했던 실존적 반역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끝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분도 역시 하나님이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가죽옷이라는 은혜의 상징을 통해 다시 은혜의 이야기를 시작하신 분 말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2014)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실패와 죄의 역사 한복판에서, 다시 시작되는 은혜의 이야기로 드러난다.”
우리가 스스로 신이 되려다 상처 입고, 선악과 앞에서 영원히 방황할 것 같았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미 ‘피 흘림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구속의 법을 세우시고, 가죽옷으로 인간의 수치를 덮으시며 새로운 삶을 준비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선악과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선과 악을 정의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다시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믿음의 도약으로 그분의 은혜를 입을 것인지, 그 선택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