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가인과 아벨

- 비교의 죄

by 이한

1장에서 창조는 질서였습니다. 2장에서 타락은 하나님과의 단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3장에서 가인은 그 단절을 인간에게 투사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은 각자 자신만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립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 창세기 4장 4–5절


하나님은 제물보다 그 사람을 먼저 보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와 아벨을 비교했죠. 그 비교는 제물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과 결핍의 감정이었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 창세기 4장 8절


창세기 4장 8절을 통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무엇으로 죽였는지는 성경에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고대 유대 전통 문헌 중에 미드라쉬(Midrash) 라고 있습니다.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뜻을 끄집어내고, 때로는 상상력을 더해 빈틈을 메우는 유대식 ‘해석 예술’을 모아 놓은 문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미드라쉬 베레쉬트 라바(Bereshit Rabbah 22:8)에 보면 이에 관련해서 재미있는 구절이 보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어떻게 죽이는지를 알지 못하여, 그의 몸을 여기저기 찔렀다. 결국 목을 찔러 죽였다.” — Bereshit Rabbah 22:8


미드라쉬는 왜 중요할까요? 성경은 말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가인이 어떻게 아벨을 죽였는가? 왜 가인의 제물은 안 받아졌는가? 유대인들은 그 침묵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미드라쉬는 그 공백에 질문을 던지고, 스토리를 확장하고, 도덕적·영적 교훈을 찾아냅니다. 그렇다보니 유대인들은 토론을 많이 할 수 밖에 없겠죠.

영어 번역본들은 많이 나와 있는데, 한국어 번역본은 많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정리하면 미드라쉬는 하나의 책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쓰인 유대교의 성경 해석 문헌들의 집합이자, ‘말 걸기’ 방식이 담긴 전통입니다.


결국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원인은 '질투와 비교'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 중 비교는 관계를 위협합니다.

비교는 자신을 누군가보다 덜 받은 자, 덜 사랑받은 자, 덜 인정받은 자로 만들며 결국 사랑을 해치는 분노의 문을 엽니다.


가인의 죄는 단순한 살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교로 인해 생긴 정체성의 붕괴, 그 붕괴가 낳은 분노,
그 분노가 외부로 흘러나간 폭력의 결과였습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말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위협당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게 되고, 결국 타인도 파괴하게 된다.” 가인은 비교로 인해 자기 존재가 무너졌고, 그 무너짐이 타인을 제거함으로써 회복될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존재의 회복은 언제나 관계의 회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신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창세기의 신학』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연속된 파괴”라고 봅니다. 그가 말한 것을 정리하면,


"가인의 이야기는 인간 존재가 타자 앞에서 느끼는 불안의 구조를 드러낸다. 그 불안이 제대로 응답받지 못할 때, 인간은 타자를 제거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회복하려 하지만, 그 순간 죄는 오히려 더 깊어진다.”


결국 죄는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비극은 제물을 잘못 드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시선을 형제에게로 돌렸고, 그 형제의 존재가 자기 존재를 위협하는 것처럼 느꼈고,

결국 비교가 만든 내면의 결핍이 폭력이라는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의 피를 들으십니다.


“네 아우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 창세기 4장 10절


저는 하나님은 죽음 속에서도 응답하시는 분, 침묵 속의 기도마저 들으시는 분이라 믿습니다.


1952년 발표된 존 스타인벡의 유명한 소설『에덴의 동쪽 (East of Eden)』이 있습니다.

시대 배경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캘리포니아이고, 주제는 인간의 선택, 자유의지, 죄와 구원입니다.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도 두 형제 이야기입니다. 찰스와 아담, 그리고 다음 세대의 캘과 아론이
반복적으로 ‘가인과 아벨’ 구조를 따라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형은 질투와 분노에 흔들리고, 동생은 ‘순수함’과 ‘사랑받는 자’의 위치에 있죠. 반복적으로 “왜 형은 선택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죄는 되풀이되는가, 벗어날 수 있는가”가 질문으로 던져집니다. 소설의 핵심어는 히브리어 ‘티므쉘’(Timshēl, תִּמְשָׁל), 창세기 4:7에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다스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단어를 두고 소설 내에서 등장인물들이 깊은 토론을 하죠. 결국 인간은 “죄를 다스릴 수 있다”, 다시 말해 운명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선언합니다.


이 작품이 중요한 이유는 가인-아벨 서사가 반복되는 가족사이고, 세대 간의 비극을 죄의 유전이라는 형식으로 끌고 옵니다. 그리고 성경을 단순히 재현하는 게 아니라, “과연 인간은 자기 안의 죄와 비교, 증오를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요약하면 『에덴의 동쪽』은 “너는 죄를 다스릴 수 있다”는

성경 창세기 4장 7절의 한 구절을 중심축으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현대적 인간 내면의 싸움으로 변주한
실존적 서사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그것을 다스릴지니라.” — 창세기 4장 7절


이제 정말 중요한 이 3장의 결론 성경은 인간에게 ‘죄를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하는가? 를 얘기해 보도록 하죠.

창세기 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그것을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가인에게 주신 경고이자 기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명령은 인간의 타락후에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이미 죄로 기울어 있는 존재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도덕적 책임을 묻고, 선택할 여지를 주셨다는 겁니다.


신약의 관점에서 우리는 죄를 다스릴 수 있는가? 로 넘어가 보죠.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로마서 8:1-2


이 말씀은 죄가 사라졌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도 그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즉 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죄 아래에 있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말한 핵심은 이겁니다. “죄와 싸울 수 있는 능력이 너희 안에 새롭게 주어졌다.”


따라서 죄를 다스릴 수 있는가?에 대한 신학적 결론은 이렇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다스릴 수 없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에 끌리는 존재이다. (롬 3:23, 전적 타락). 의지나 도덕으로는 죄를 다스릴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는 가능하다. 성령의 도우심(갈 5:16–18)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죄의 유혹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것이 “칭의 justification” 이후, 평생에 걸친 “성화 sanctification”의 길이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이라는 책에서도 이 부분을 잘 묘사하고 있죠.

정리하면, 죄는 여전히 문 앞에 엎드려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문을 열어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입니다.


죄는 마치 생명 없는 무엇처럼 보이지만, 그는 숨 쉬고, 노려보고, 문 앞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습니다.
언제든 문을 열기만 하면 그것은 인간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다스릴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는 불가능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장 23절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입니다. 좋은 것을 선택할 능력조차 스스로는 없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에 보면 “그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러나, 하나님 은혜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로마서 8장 1–2절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죄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해방은 단번의 승리가 아닙니다.
바울도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즉, 죄는 매일 문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은혜 안에서, 그 문을 열지 않을 힘을 가졌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 '티므쉘' (너는 다스릴 수 있다)이 던지는 신학적 무게는

운명이 아니라 가능성을 말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택의 권위, 신뢰, 책임이기도 합니다.


신학자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실패와 죄의 역사 한복판에서,

다시 시작되는 은혜의 이야기로 드러난다.” 티므쉘은 바로 그 “다시 시작되는 은혜”의 자리에서

인간에게 묻는겁니다. “너는 지금도 선택할 수 있다. 죄를 택할 것인가, 은혜를 따를 것인가?”


죄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문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선택의 자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다스릴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가능해진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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