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바벨탑

- 하나 됨의 파괴인가, 교만의 붕괴인가

by 이한
“자, 우리가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자, 성읍과 탑을 세워 하늘에 닿게 하자.”
“우리 이름을 내자.” — 창세기 11장 3–4절 요약


창세기 11장은 인간 문명의 정점을 묘사하는 듯 보입니다. 언어는 하나였고, 기술은 놀라울 만큼 정교했으며,
인간은 단일한 목표 아래 ‘하늘’에 닿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탑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 하나 됨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름을 내고자 하는 자기 중심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 창세기 11장 5절


하나님은 인간의 ‘상승’ 앞에서 내려오십니다. 하늘에 닿는 인간의 기술 앞에 “내려오심”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 이 장면은 단순한 신적 질투가 아니라, 질서의 교란을 막고자 하시는 보호적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벨탑의 핵심 문제는 '하나 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문제 삼으신 것은 인간의 결속력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결속이 ‘자기 이름을 내는 데’ 집중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자기 목적만을 강화했다는 데 있습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 소유냐 존재냐 >에서 말합니다:


“현대인은 하나 됨을 원하지만, 존재의 중심이 자기 자신일 때 그 하나 됨은 결국 자기 우상의 건설로 변질된다.”


바벨탑은 기술의 승리였지만, 그 기초에는 영적 공허와 불순종의 동기가 깔려 있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하나님 없이 형성된 공동체는 결국 자기 보호와 자기 숭배로 귀결된다”라고 말합니다. 바벨탑의 사람들은 ‘성읍’과 ‘탑’을 함께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는 단지 건축을 넘어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의 결합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말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자기 구원의 서사가 있었습니다.


바벨탑 이후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언어는 갈라졌고, 세계는 분산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통적으로 징벌로 읽혀 왔지만, 더 깊은 해석은 하나님의 선교적 확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은 그 이후부터 하나님께서 한 민족(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모든 민족을 향한 구속사를 시작하신다는 점에서 혼잡과 흩어짐은 축소가 아니라 시작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창세기 12장 2절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벨탑에서는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내고자 했고,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이름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바벨 사건의 회복이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일어납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 이르되...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 사도행전 2장 6–8절


성령의 임재는 언어를 하나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언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게 하는 회복이었습니다. 즉, 차이를 지우는 통일이 아니라, 차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벨은 인간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려 한 시도였고, 오순절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다양함을 통한 하나 됨이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바벨탑은 여전히 건설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술과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초국가적 연대와 AI, 자본의 통합 등을 통해 ‘다시 하나 되는 세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 됨이 하나님을 향하는가, 아니면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가를 묻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1. 디지털 바벨: 알고리즘으로 연결된 인간은 과연 소통하고 있는가, 아니면 분리되고 있는가?

2. 경제적 바벨: 글로벌화된 자본의 질서는 약한 자의 언어를 지워버리고 있지 않은가?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말합니다.


“하나 됨은 항상 평화를 낳지 않는다. 오직 사랑 안에서만 다름은 평화가 된다.”
(“Unity does not always lead to peace. Only within love can diversity become peace.”)
- < 희망의 신학 >


하나 됨은 방향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됨 자체를 무너뜨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이룬 하나 됨, 자기 이름을 위한 연합, 흩어짐을 두려워한 폐쇄적 안전지대가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성령은 여전히 다양한 언어 속에서, 다양한 얼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하나 됨은 목표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그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지어주실 것입니다.


논란의 질문: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 하나 됨은 다 잘못된 건가요?

그 질문은 정말 중요하고, 꼭 나와야 할 물음입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적 통합, 연결, 연대는 다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옳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핵심은 ‘방향’과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연합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연합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사랑과 진리를 중심을 로 한 연합이어야 합니다. 바벨탑은 언어가 하나였고, 기술도 있었으며, 목적도 있었지만, 그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이름이었습니다. 즉, 기술적 하나 됨은 가능했지만, 존재의 방향은 비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AI, 디지털 기술,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이 주는 연결성은 인류를 서로 더 빠르게

엮어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없이도 ‘선하게 보일 수 있는 일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문제는 이 연

결이 인간의 존재 목적을 세워주지는 못한다는 점입니다. 기술은 ‘어떻게’를 말해주지만, ‘왜’ 살아야 하는

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 됨이 인간을 더 외롭게 만들 수

도 있고, 더 분열적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하나 됨은

한동안 강력해 보일 수 있지만, 결국은 방향을 잃고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됨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

닙니다. 그 중심이 사랑과 진리가 아닐 때, 그 하나 됨은 또 다른 바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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