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 죽고, 일부만 사라 남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 창세기 6장 5–6절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죄로 인해 무너져왔고, 하나님의 역사는 그 무너짐을 새로 짓는 방식으로 반복되어 왔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단순한 ‘물리적 심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관계의 비극적 단절이며, 동시에 다시 이어가기 위한 거대한 심정의 결단이었죠.
성경은 ‘하나님이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전능자가 한탄하며 슬퍼한다는 이 문장은, 신학적으로 볼 때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드러난 신의 감정입니다.
그분은 무관심하게 파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한 번이라도 사람을 더 살리고 싶어 하셨고, 그래서 노아를 찾으셨던 거죠.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 창세기 6장 9절
노아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행’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움의 기준을 성취가 아니라 ‘관계의 방향’에 두셨습니다. 이것이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통찰입니다. 구원은 선별이 아니라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고” — 창세기 6장 18절
심판은 모두를 향했지만, 언약은 하나의 가정, 하나의 선택, 하나의 동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형태입니다. 그것은 모두에게 주어지지만, 모두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문이 열린 방주와 같고,
문이 닫히는 순간은 언제나 인간의 시간 너머에서 결정됩니다. 노아는 방주로 들어갔고, 세상은 닫힌 문 밖에서 무너졌습니다. 구원은 항상 기쁨으로만 시작되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 안에는 어둠과 냄새와 동물의 울음, 그리고 ‘끝이 언제일지 알 수 없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그 심판 안에서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방주에 있는 모든 생물과 가축을 기억하사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 창세기 8장 1절
‘기억’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언약을 이행하는 능동적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기억하셨고, 그 기억 속에서 물은 줄어들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심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재료였습니다. 물 위에 떠 있던 방주는 마치 ‘창세기의 두 번째 시작’이었습니다. 그 위에서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물로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 창세기 9장 11절-13절
무지개는 단지 하늘에 뜬 빛의 굴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시 손 내미신 언약의 증표였던 것이죠.
심판은 끝났고, 은혜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색—그것이 하나님이 기억하신 '사랑의 색'이었습니다. 무지개는 심판의 종결선이자, 은혜의 시작선이었습니다.
5세기말~6세기 초 비잔틴 제국 시대에 활동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테는 노아의 홍수는 단순한 ‘멸망’이 아니라, 무질서에서 질서로 돌아가는 ‘신적 조율(調律)’의 순간이다라고 종합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어두움은 멸절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새롭게 빚는 심연의 배경이라고 말했다 정도로 이해해도 될 듯합니다. '멸절'이라는 단어는 가슴 아픈 단어이지만, 가끔은 세상을 볼 때 제 마음 한 구석에도 저 단어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도 노아가 아니니 멸절 대상이 되겠지만 말이죠.
위르겐 몰트만은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에서 하나님은 창조 세계와 함께 고통당하시는 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창조를 포기한 사건이 아니라, 새 창조를 위한 정화(淨化)였다라고 말한다면 휴머니즘 차원에서는 참으로 잔인한 문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이 글을 쓰면서 듭니다.
"무지개는 인간과 자연,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세 겹의 언약’이다." – 몰트만
따라서 노아 이야기는 단지 구원받은 몇 명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인간-피조물 전체가 다시 연결되는 ‘화해의 서사’라고 봐야 합니다.
생태신학자 세라 배거리(Serah Baggarly)는 노아의 홍수를 “지구의 과잉 부하에 대한 경고적 서사”로 봅니다.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이 피조세계 전체를 위협하고 있고, ‘방주’는 그 와중에 공동체적 생존과 생물다양성 보존의 메타포라는 거지요. 즉, 현대의 방주는 공동의 책임과 생명 중심의 윤리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의 홍수는 지나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無)로의 귀환이 아니라, 질서와 관계의 회복을 위한 심연의 개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언제나 ‘동행하는 자’를 통해 시작됩니다. 노아는 우리 각자가 맞닥뜨린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방주를 지어야 할 책임과 믿음을 묻는 상징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묻고 계십니다. “너는 너와 네 가족을 위해 방주를 준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