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 바를 알지 못한 자의 믿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 창세기 12장 1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명확한 약속’이 아닌 ‘불확실한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그는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이미 주어진 곳이 아니라, 아직 보여지지 않은 미래로의 초대였지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갔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 히브리서 11장 8절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모르면서도 나아가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이 믿음을 “부조리의 도약(Leap of Faith)”이라 불렀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할 때 "도약(jump/leap)"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그 믿음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한 믿음은 합리적 설명이나 윤리적 기준으로는 결코 납득되지 않는, 어떤 "불가능성"을 향한 신뢰입니다.
“믿음은 부조리(Absurd)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도약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 두려움과 떨림
그럼 왜 부조리의 도약일까요? 이성적 관점에서는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죠. 예컨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는 윤리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상황을 "윤리 너머의 영역"이라 말하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신앙에만 가능한 비이성적 도약이며, 그 자체로 ‘부조리’를 통과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도식적 설명을 넘어선 신뢰였습니다. 그는 "왜 떠나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 "누가 나를 부르시는가"에 집중했습니다.
물론, 그의 여정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기근이 들어 애굽(이집트)으로 내려갔고,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였으며,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자 하갈과 이스마엘이라는 우회로를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를 의롭다 칭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 창세기 15장 6절
이 장면은 신약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로 재등장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인용하며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 로마서 4장 3절
여기서 핵심은, 믿음이 곧 "의"라는 선언입니다.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으로 간주된다는 은혜의 선포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현대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불확실성을 껴안는 용기다.” — Paul Tillich, Dynamics of Faith
믿음은 어떤 심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는 음성을 신뢰하는 결단이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여정 속에서도 그분이 나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붙드는 희미한 손짓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장막을 치고, 낯선 땅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장막은 임시성과 불안정함의 상징이지만,
그곳에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바로 그 불확실함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뜻입니다.
그의 믿음은 결국 단 한 가지에 근거해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이가 신실하시다”(히브리서 10:23)는 믿음,
그것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이성을 갖고 있고, 그 이성으로 우리 존재를 지금까지 지키며 문명을 이루어 왔는데, 왜 누구는 부조리한데도 믿을 수 있고, 누구는 그렇지 못할까요? 이 주제는 신학과 철학 모두가 오래도록 씨름해 온 질문이며, 이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입장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 관점을 아래에 소개드릴게요.
1. 은혜의 선택 – 어거스틴 & 루터
성 어거스틴과 마르틴 루터는 “인간이 스스로 믿음을 택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인간의 이성조차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믿음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보았죠.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믿음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다.” — 어거스틴, <신국론>
“우리는 믿음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우리는 은혜로 그것을 선물로 받는다.” — 루터, <로마서 서문>
요약하면 믿음은 인간의 공로나 이성의 결과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겁니다.
2. 자유의지와 응답 – 아르미니우스 & 웨슬리
반면, 야곱 아르미니우스나 존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선행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은혜에 ‘응답’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돼, 인간이 그것을 거부할 자유도 주셨다.” — 아르미니우스
여기서 인간의 이성이나 성향이 아니라,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은혜에 반응할 능력'을
모든 사람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누구든지 믿을 수 있는 은혜는 주어졌지만, 누가 응답하느냐의 차이로 갈린다는 거죠.
3. 신앙과 계시의 불균형 – 칼 바르트
칼 바르트는 "믿음은 말씀(로고스)의 사건이 개인 안에서 ‘폭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동일한 말씀을 듣더라도 말씀이 '사건으로서' 역사하는 순간이 각자에게 다르게 찾아온다는 것이죠.
“말씀은 누구에게나 전해지지만, 누구에게나 동일한 방식으로 응답되지 않는다.”
— 바르트, <교회 교의학>
요약하면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계시가 역사하는 시간과 방식의 신비 때문이라는 겁니다.
4. 존재의 열림 – 폴 틸리히
폴 틸리히는 믿음을 “궁극적 실재(The Ultimate Concern)를 향한 존재적 열림”이라고 설명합니다. 모든 인간은 이 궁극적 실재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지만, 존재론적으로 하나님 앞에 열릴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두려움, 자기 중심성, 문화적 장벽 등으로 스스로를 닫고 있다는 것이죠.
“믿음이란 존재 전체가 진리로 열리는 용기이다.” — 폴 틸리히, <믿음의 역동성>
요약하면 믿음은 단순한 논리적 수용이 아니라, 존재의 태도와 방향성에서 비롯된다는 겁니다.
5. 성경의 관점 요약
마태복음 13장 –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같은 씨가 뿌려졌으나, 어떤 땅은 열매 맺고 어떤 땅은 가시덤불 속에 묻혔다.” 같은 말씀, 같은 은혜가 전해졌지만 사람의 내면 상태(토양)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6:44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이끄심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말씀을 듣는 통로가 열려야 믿음이 자란다는 구조입니다.
아브라함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때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진실을 숨겼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 인간적인 방법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 하나님을 기록합니다. 왜일까요?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다시 하나님을 향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는 데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지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동일하게 주어졌지만, 믿음은 은혜의 선물이며 동시에 응답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강제적 운명이 아니라, 자유를 존중하는 주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어떤 결정된 체계 안의 필연이 아니라, 은혜 앞에서 자유로 반응하는 수용의 신비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이해될 수 없는 부르심 앞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시겠습니까?”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나 떠나는 믿음’을 다시 떠올립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말합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감정이 달아날 때조차, 우리가 이전에 확실히 알고 있다고 결정했던 진리를 끝까지 붙드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며, 믿음은 단지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내맡기는 실천적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