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이삭

– 축복의 통로인가, 침묵의 인물인가

by 이한

이삭은 성경 속 족장들 가운데 가장 조용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자 야곱의 아버지였던 그는 앞세대의 위대한 믿음과 다음 세대의 다채로운 사건 사이에서, 마치 쉼표처럼 존재합니다. 크게 무너지지도 않았고, 화려하게 승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 심고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더라.”
— 창세기 26장 12–13절


이삭은 풍요를 누렸지만, 싸움보다 양보를 선택했습니다. 우물을 파고, 다투고, 다시 물러났습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고 다투고 물러난 부분은 창세기 26장 17~22절에 나타납니다.


기근이 들어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쫓아내자,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팝니다. 그런데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파면, 블레셋 목자들이 와서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투는 겁니다.


첫 번째 우물: 에섹 (다툼) → 블레셋 목자들과 다툼

창세기 26장 20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와 다투었음이며” (개역개정)

이삭은 블레셋 땅(그랄 지역)에서 우물을 파고 있었습니다. 그의 종들이 우물을 팠는데, 그랄 사람들(블레셋 목자들)이 나타나 “이 물은 우리 거다!”라고 주장하면서 다툼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 곧 “다툼의 우물”이라고 부르게 되죠. ‘에섹’은 삶 속에서의 다툼과 갈등의 상징입니다. 이삭은 그 우물을 포기하고 물러나는데, 이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대신 평화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에섹”은 단지 우물 이름이 아니라, 믿음의 여정 속에서 겪는 갈등의 단면을 보여주는 아주 상징적인 지명입니다. 이삭은 싸우지 않고 순종과 양보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모델처럼 그려지고, 그 과정이 오늘날의 삶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두 번째 우물: 싯나 (대적) → 또 다툼

창세기 26장 21절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팠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또 시비를 겁니다. 이삭은 이번에도 다투지 않고 물러나죠.

그래서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 곧 적대의 우물이라 부릅니다. 싯나는 오늘날 인간관계 속에서 무의미한 감정싸움이나 소모적 적대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상징합니다. 이삭은 그 적대 속에서도 조용히 하나님을 따라가며 결국 확장과 회복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이삭은 에섹과 싯나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우지 않고, 떠나고 또 떠납니다. 그가 포기한 건 이 아니라, 갈등의 방식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우물은 단순한 생존 수단이 아니라, 땅의 소유권과 축복의 표징이었습니다.

이삭은 싸우지 않고 양보함으로써 하나님의 복을 따라간 사람이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손해 같지만, 그는 다툼보다 하나님의 때와 장소를 기다리는 쪽을 택한 것이지요.


결국 하나님은 그 인내와 온유함의 길 끝에서 '르호봇'이라는 은혜의 장소로 인도하십니다.


창세기 26장 22절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세 번째 우물: 르호봇 (넓은 곳) → 다툼 없이 평화롭게 사용함

이삭은 두 번이나 우물을 포기하고 물러나면서도, 싸우지 않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 계속해서 우물을 팝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화로운 땅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르호봇(넓은 곳)이라는 이름의 땅에 도달합니다. 르호봇”은 오늘날 우리가 신앙 속에서 추구하는 내면의 평화, 공동체 안의 조화, 갈등을 넘어서는 은혜의 장소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관계에서 다툼의 우물을 피하고도 포기하지 않으면,

사회 속에서 소리치지 않고도 진리를 지킬 수 있다면, 신앙에서 힘으로 가 아니라 믿음으로 밀고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결국 ‘넓은 곳’으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믿음을 갖기를 이삭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는 가장 적게 말했지만, 하나님의 복은 가장 조용히 흘렀습니다. 그의 삶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은 창세기 22장, 번제의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

이삭은 자신이 태울 장작을 지고 조용히 아버지를 따릅니다. 이 장면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에 그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더니…” — 창세기 22장 6절, 8절


이 구절은 단순한 동행의 묘사 같지만, 깊은 신학적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이삭은 죽음의 길조차 묵묵히 감당한 자였습니다. 이는 이사야서 53장에서 예언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으로서의 메시아 예수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 이사야 53장 7절


이삭은 침묵의 순종을 통해 십자가의 예표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개인적으로 재확인받은 첫 번째 족장입니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 창세기 26장 24절


하나님은 이삭에게 아브라함의 신앙을 단순히 ‘상속’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에게도 직접 언약을 새롭게 확인해 주셨습니다. 이는 신앙이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임하신다’는 진리를 말해 줍니다. 흥미롭게도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은 유일한 족장이기도 합니다.


“너는 애굽(이집트)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 창세기 26장 2절


하나님은 이삭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머물도록 명령하십니다. 이삭은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의 공간을 지킨 사람이 됩니다. 그의 신앙은 이동이 아니라 머무름으로 증명된 신실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신앙 공동체는 화려하고 웅변적인 이들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마태복음 6장 6절


이삭은 그 은밀한 복을 따라 살았던 사람입니다. 비록 조용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그의 삶을 통해 지속되었고, 그의 침묵은 하나님의 약속을 증언하는 무언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이삭은 크고 화려한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도 승리도 혁명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물을 팠고, 양보했고, 그 자리에서 기다렸습니다.


칼빈은 이삭을 가리켜 “믿음의 사람은 불의에 맞서 싸우기보다, 때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물러설 줄 안다”라고 해석합니다.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더 깊은 신뢰의 표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진정한 순종은 눈에 띄지 않으며, 때로 세상 앞에서 침묵하는 삶의 방식으로 드러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삭은 말하지 않았고, 앞서 나서지도 않았지만, 그의 삶엔 하나님의 언약이 그대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삭의 우물은 그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이 남긴 흔적이었습니다.

르호봇—넓은 곳, 그것은 싸움의 결과가 아니라, 다툼을 넘은 신뢰의 결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자주 묻습니다. "왜 나는 더 말하지 못했을까?", "왜 더 강하게 맞서지 않았을까?"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때로 조용히 흐릅니다. 말하지 않아도, 증명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침묵하는 자의 마음 깊이 그분의 언약을 새기십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뢰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조차,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 고통의 문제


이삭의 삶은 바로 그런 신뢰였습니다. 불확실한 땅에서, 반복되는 시련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믿음. 그는 그렇게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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