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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글샘 Dec 27. 2023

삶은 이야기다.

서사의 위기-한병철

보라. 이야기다.

이야기하기 위해 인내하라.

그 후에 이야기를 통해 인내하라.

-페터 한트케-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일상의 소중한 순간을 스토리로 올려보세요. 스토리는 보통 재미있고 가벼운 내용을 담고 있으며 24시간 동안만 지속됩니다.” - 인스타그램 광고 슬로건


이러한 시간제한은 특별한 심리적 효과를 일으킨다. 수시로 변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해 미묘한 강박 속에서 더 많은 소통을 하게한다.

 ‘사느냐? 게시하느냐?‘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스냅챗 같은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의견, 필요, 선호를 소통하라고, 게시하라고, 공유하라고, 링크로 걸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정보와 소통에 점점 도취되어 몽롱해진다. 소통은 외부에 의해 유도되고,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알고리즘 프로세스에 예속되어 간다. 우리는 알고리즘의 손에 내맡겨진다. 우리는 점점 더 제어당하고 착취당할 수 있는 데이터 기록으로 축소된다.

인스타그램의 스토리는 일종의 순간 포착이다. 찰나의 소통을 몸소 보여주는 스냅챗 역시 순간적 현실을 잠시 동안 보여주고 지나간다. 셀카도 찰나의 사진이다. 수시로 변하는 업데이트 강박에 시달리는 우리는 지식보다는  정보 교환에 빠져들어 순간 포착의 스토리를 무한히 재생산한다. 이런 정보 쓰나미는 우리를 최신성에 도취된 상태로 추락시킨다. 과거는 더 이상 현재에 유효하지 않고, 미래는 최신의 것으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된다. 최신성에 도취된 ’업데이트 강박‘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나’에게는 안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의미 제공이 결여되어 있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한 ‘나’는 스스로를 영구히 생산해 낸다.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셀카는 텅 빈 자기의 복제다. 이렇게 곧 사라져 버릴 정보에 휩쓸려 자신만의 이야기를 잃은 사회, 내 생각과 느낌과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를 무수히 뱉어내는 사회의 끝은 ‘텅 빈 삶’이다.


스토리는 이야기일까?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디지털 플랫폼의 ‘스토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일련의 순간 포착일 뿐이며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들은 빠르게 사라지는 시각적 정보에 불과하다. 스토리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음 스토리로 대체되어 사라진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나의 이야기로 응축되지 않는다. 삶의 사건들은 단순한 정보로만 취급된다. 이들은 서사적 맥락 없이 그저 접속사로 연결된 채 나열된다. 사건의 서사적 합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디지털 플랫폼에서 '성찰‘과 살아온 이야기의 응축은 전혀 가능하지 않으며 요구되지도 않는다. 반면 이야기는 조각이 아니라 연결이다. 나만의 맥락, 삶 그 자체다. 나의 저 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기에 이야기는 조각나거나 파편적이지 않고 방향성을 띤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또한 이야기가 담긴 사건을 전달한다. 그래서, 지식은 이야기로 가득하다.

또한 이야기는 모든 걸 보여주지 않는다.


이집트의 왕 사메니투스가 페르시왕 캄비세스에게 패배해 붙잡혔을 때, 페르시아의 개선 행진을 억지로 지켜봐야 하는 굴욕을 당했다. 붙잡힌 자기 딸이 하녀가 되어 지나가는 광경도 목도해야만 했다. 길가에 서 있는 모든 이집트인이 슬피 우는 동안 사메니투스 왕은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바닥에 고정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뒤이어 자기 아들이 사형장에 끌려가는 것을 볼 때도 그는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러나 포로로 잡혀 온 사람 중에서 자기 수하에 있더  늙고 허약한 하인 한 명을 알아보았을 때, 그는 주먹으로 머리를 치며 깊은 슬픔을 분출했다. -헤로도토스의 이야기


이렇게 다 보여주지 않는 , 사메니투스 왕에 대해 빠져 있는 설명이 이야기의 긴장을 고조시킨다. 그래서, 이야기는 ‘그 힘을 내면에 모은 채 보전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쳐낼 수 있는 것’이다. 설명을 삼가는 것은 진정한 이야기하기의 필수 조건이다. 이야기는 설명을 자제한다. '헤로도토스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서술은 그 무엇보다 건조하다. 이것이 바로 고대 이집트의 일화가 수천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경탄과 숙고를 자아내는 이유다.

반면 정보는 좁은 최신성의 폭 때문에 매우 빠르게 소진된다. 정보는 오로지 찰나의 순간에만 작동한다. 영구한 발아력을 지닌 씨앗이 아닌, 티끌이나 다름없다. 정보에는 발아력이 결여되어 있다. 한번 인식되고 나면, 이미 확인을 마친 부재중 메시지처럼 무의미성 속으로 참잠한다.


왜 이야기가 필요한가?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포도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유언하는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그 유언을 들은 아들들은 매일 포도밭을 팠지만 보물은 찾을 수 없었다. 가을이 되자 다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좋은 포도밭이 만들어졌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그 유언을 통해 축복은 금이 아니라 근면에서 나온다는 경험을 물려주셨다는 걸 깨달았다. 좋은 포도밭을  만든 근면의 경험처럼, 좋은 경험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승된다는 특징이 있다.

아들들에게 이야기하는  아버지는 '조언을 주는사람이다. 조언은 문제에 대한 단순한 해결책만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조언을 구한 사람은  자신의 일상에서 탐색되면서, 이렇게 조언은 지혜로서 '삶의 구조에 녹아들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는 이야기로서의 삶에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삶이 더 이상 이야기될 수 없게 되면 그 안의 지혜도 소멸된다.

사회에서는 입에서 귀로 흘러 들어가는 전승 가능한 경험이 계속해서 결핍되어 간다. 이젠 더 이상 전승되지 않고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채로 존재하게 된다. 이야기되는 것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최신의 것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면서 말이다. 좋은 경험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로부터 나아갈 미래의 비전을 주는 이야기도 사라져간다.

지혜가 사라진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기술이다. 현시점에서 다음 현시점으로,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하나의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다니는 삶은 생존에만 몰두하게 된다. 문제 풀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이야기만이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희망하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어준다.


이야기는 어떻게 만드는가?

“행복은 우리와 함께 산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숨 쉰 그 공기 안에서만 상상할 수 있다.”-‘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

행복은 하나의 시점에 국한되는 사건이 아니다. 행복은 과거까지 닿아 있는 긴 꼬리를 갖는다. 행복은 살면서 거쳐온 모든 것을 먹고 자란다. 잠시 반짝거린 빛이 아닌 후광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를 현재에 끌어내어 엮고 현재 안에서 계속해서 작용하게 하는, 즉 소생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

우리는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동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즉 순간에 예속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출생과 사망 사이의 전체 시간에 걸쳐 있다. 모든 사건과 사태를 관통하고 감싸는 생동성 있는 단위로서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시간적 폭을 이어주는 힘이 자기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럼 어떻게 이어주는 것일까?


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다. 그게 바로 데이터와 기록과의 차이다. 디지털 저장소는 첨가적이고 누적적으로 작동하는 반면, 인간의 기억은 서사적으로 작동한다. . 이야기는 이렇게 기억되는 사건의 선택과 연결에 기반한다. 즉, 선택적으로 진행된다. 선택된 사건만이 이야기에 동원된다. 물론 기억된 삶은 필연적으로 그 사이사이에 틈이 존재한다. 이렇게 선택적 연결에 의해 만들어진 자전적 이야기는 지난 경험에 대한 후속적 성찰과 해석을 통해 완성된다.


그러나 데이터와 정보는 의식을 거치지 않고 생성된다. 이들은 우리의 활동을 성찰하고 해석하기도 전에 그리고 그러한 성찰로 필터링되기 전에 곧장 모사해 버린다. 이런 데이터와 정보는 계산과 숫자를 통해 자기 이해에 도달하려한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삶은 정량화가 가능한 사건들로는 이야기될 수 없다. 나는 양이 아닌 질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이 이야기해야 한다.


사느냐? 아니면 이야기하느냐?

이야기가 없는 삶은 그저 장면이 바뀌고 사람들이 오고 가고 그게 다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지는 날이며 의미도 없는 단조로운 연속적 나열에 불과하다. 그저 시간과 날의 나열이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4월, 5월 6월, 1924년, 1925년, 1926년.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의미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야기이다. 이야기에 세상을 유의미하게 보는 힘이 있다. 이야기 형식으로 지각하는 것은 즐거울 수 있다. 모든 것이 잘 구성된 질서에 짜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상상을 기반으로 하는 서사적인 ‘그리고’는 원래는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사물과 사건, 사고하거나 무의미하거나 부차적인 것을 날것을 넘어이야기 속으로 연결 짓는다. 그러면 세계가 리드미컬하게 정렬된 모습으로 보인다. 그 안에서 사물과 사건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사물과 사건을 이야기를 엮는 관절로 작용한다. 이야기는 연결을 의미한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삶에 몰입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사건들을 잇는 새로운 실을 뽑아낸다. 그럼으로써 고립되지 않은 관계들로 이루어진 조밀한 망을 형성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유의미해 보인다. 이 이야기 덕분에 내 삶에 안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왜 이야기를 만들기가 어려운가?

이야기에는 여유가 필요하다. 가속화된 소통 속에서는 이야기할 시간, 즉 참을성이 없다. 정보만 교환될 뿐이다. 그러나 여유가 있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이야기의 동기가 된다. 여유가 있다면 이야기는 어느 곳에서든 시작될 수 있다.


“올리비아, 딸기잼 좀 건네줄래요?“

딸기잼 병을 건네받자 아버지는 마치 공상에 잠긴 듯 병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너희 할아버지가 생각나는구나. 내가 여덟 살인가 아홉 살 때였는데 말이야. 할아버지가 점심시간에 딸기잼을 달라고 하셨지. 그래, 점심시간이었다고. 우리는 처음엔 잘못 들은 줄만 알았어. 왜냐하면 거기엔 9월 2일이면 늘 있던, 넓은 면을 곁들인 사우어브라트(독일의 식초에 절인 고기 요리: 딸기잼이 필요없는 상황이라서 모순성을 드러낸다.)밖에 없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아버지는 ”기억나는군“이라든가 ”한번은“등의 말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와 기억은 상호 의존적이다. 분절된 현재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사건들 사이에 강한 관계를 형성하는 이야기는 텅 빈 채 흘러가는 시간을 극복하게 한다. 이야기하는 시간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 안에 자리를 잡는다.


왜 우리는 삶의 의미를 갈망하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지, 왜 끝없는 불안과 공허에 빠지는지, 서사 속에 존재의 닻을 내리고 싶다면 코앞의 이슈를 좇는 데서 한 발짝 벗어나 먼 거리에서 시선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서사의 회복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진정한

현재를 과거와 연결하며 맥락을 이어나가고 있는가? 존재를 망각한 채 자신의 아우라를 외면하고 무작위성에 휩쓸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건 삶이 아니다.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머니가 어제 어땠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한다.

“어제는 학교에 있었어요. 첫 시간엔 수학을 배웠고, 그다음 시간엔 독일어와 생물, 그다음엔 체육이 두 시간 있었어요. 끝나고 집에 왔고 숙제를 했어요. 그리고 잠시 컴퓨터를 하다가 자러 갔지요.”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외부의 사건들로 정해진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을 내면화하고 이야기로 엮어내고 응축시키는 능력을 부여하는 내면성이 없기 때문에 외부의 사건들만 나열한다. 사실들로 설명 가능한 세계는 이야기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동안 이야기하는 법을 잊었다. 이야기하는 능력의 상실은 신비로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눈앞의 존재’를 이루는 날것의 현사실성은 이야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신비로움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야기에서 주는 비전도 없어졌다는 뜻이다.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사진과 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기억을 예시로 들어보자.

사진은 기억 이미지와 달리 서사적 내면성이 없다 . 사진은 주어진 것을 내면화하지 않은 채로 모사한다. 사진은 의도하는 바가 없다. 반면에 서사로서의 기억은 단순한 시공간적인 연속체가 아니다. 오히려 서사적 선택에 기반한다. 사진과 달리 기억은 자의적이고 불완전하게 선택된다. 수년 또는 수십 년을 건너뛰기도 한다. 서사성은 연대기적 현사실성과는 반대된다.

기억은 사건을 항상 새로이 연결하고 관계망을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요소이다. 정보의 쓰나미는 이야기의 내면성을 파괴한다. 맥락이 없는 기억은 ‘고물상’, 즉 ‘온갖 종류의 완전히 무질서한,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그림들과 오래되어 낡아빠진 상징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창고‘와도 같다. 이 고물상 안에 있는 사물들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더미를 만든다. 이 더미는 서사의 반대 형상이다. 사건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쌓아올려질 때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로 응축된다. 데이터 더미 또는 정보 더미에는 특정한 방식으로 쌓아올리는 이러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서사적‘이 아니라 ’누적적‘이 되는 것이다. 세계의 정보화로 인해 모든 것이 투명해졌다. 있는 그대로를 모두 보여주는 투명성은 모든 이야기에 근거하는  긴장을 없애버린다. 투명한 이야기는 없다. 모든 이야기는 비밀과 신비로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 정보와 반대된다. 이야기는 완결성이 특징이다. 즉 종결형식이다. 이야기는 결말, 완결, 결론을 지향하고 정보는 본질적으로 항상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파편적이라는 점이다.  이야기의 끝이란, 그 이야기가 변화하고 잠정적인 관점들이 하나로 모이는 마법적인 지점, 즉 독자가 처음에는 이질적으로 보이던 사물이 종국에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도착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신비스러움에 관한 하시디즘 이야기가 있다

“바알 셈 토브(하시디즘의 창시자)가 피조물의 유익을 위한 어려운 일을 완수해야 했을 때, 그는 숲의 특정한 장소에 가서 불을 지피고는 명상에 잠긴 채 기도했다. 그러면 그가 실제로 행하고 목도한 모든 것은 그가 계획한 것과 똑같이 일어났다. 한 세대가 지나고 마지드 폰 메세리치가 큰일을 앞두고 같은 숲의 장소로 가서 말했다. ‘더 이상 불을 피울 수는 없지만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모든 게 계획대로 되었다. 다시 한 세대가 지나고 사소우 출신 랍비 모셰 뢰브도 큰일을 행해야 했다. 그도 그 숲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말했다. ‘더 이상 불을 피울 수도 없고 기도가 잘되게 하는 특별한 명상법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행하는 숲속의 이 장소를 알고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또 한 세대가 지나고 랍비 이즈라엘 폰 리신이 계획된 큰일을 이행해야 할 때가 오자 자기 집 의자에 앉아 말했다. ‘불을 피우지도 못하고 적혀 있는 기도문도 말하지 못하고 더 이상 숲속의 그 장소도 알지 못하지만, 그 이야기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만으로 앞의 세 사람이 경험한 효과가 동일하게 일어났다. -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저서‘게르숌 G.숄렘에게 보내는 인사.70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세계는 계속 탈신비화되어 간다. 신화적 불은 꺼진 지 오래다. 더 이상 기도하지 못한다. 내밀한 명상 역시 하지 못한다. 숲속의 신화적 장소도 잊혔다. 오늘날은 여기에 더 결정적인 것이 추가된다. 이제 우리는 신화적 장면을 회고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이야기할 능력마저 상실해 가는 중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부터 오는 지혜도 미래에 대한 비전도 잃어 가고 있는 중이다.


배움에도 이야기가 있다.

이론에는 사물들을 관계성 안에 집어넣은 후에도 왜 그렇게 관계되어 있는지 설명하는 질서가 있다. 이론은 사물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적 맥락을 발전시킨다. 빅데이터와 반대로 이러한 질서는 우리에게 지식의 가장 고차원적 형식, 즉 이해를 제공한다. 이는 사물을 개념화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종결 형식이다. 종결 형식을 띤 이론은 사물을 개념적 틀에 담은 후 그것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이론의 종말은 결국 정신적 개념과의 작별을 뜻한다. 우리는 사유가 결국 그 자체로 이야기라는 것과 이야기의 단계를 거쳐 나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학교에서 수업할 때도 파편적인 몇 개의 주요 낱말만 알고 있는 아이는 그 시간에 배운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 파편적인 몇 개의 정보로는 그 시간의 내용을 모두 이해한 것이 아닌 것이다. 자신의 배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는 자신의 획득한 개념을 알게 되고, 그 개념들의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 시간에 배운 것이 자신의 이해를 거쳐서 이야기로 나오는 것이다.


이야기의 치유력

“아이가 아프다. 어머니는 아이를 침대에 데려다 놓고 아이의 옆에 앉는다. 그리고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심층적 이완을 가능케 함으로써 그리고 근원적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치유의 효과를 발휘한다.

어린이 동화는 평온한 세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한 이야기는 아이들로 하여금 주변의 불안한 세계를 익숙한 집으로 변신시키게끔 도와준다. 그렇게 안정감을 준다.

또한 동화의 기본 패턴 중 하나가 위기의 행복한 극복이다. 그렇게 동화는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병을 극복하게끔 도와주는 힘이 있다.


이야기하는 손에도 치유의 힘이 있다. 모든 병은 내부의 막힘을 드러내며, 이 막힘은 이야기의 리듬으로 해제할 수 있다. 이야기하는 손은 긴장, 정체되어 막힌 것, 경화된 것을 풀어준다. 그리고 사물을 다시 안정시킨다. 즉 다시 흐름 속으로 돌려보낸다.

프로이트도 고통을 개인의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막힘을 드러내는 증상으로 이해했다. 막힘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다. 심리적 장애는 막혀버린 이야기의 표출이다. 치유는 환자들을 이야기의 막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환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때 치유된다. 이야기는 치유력을 발휘한다. 트라우마적인 사건은, 위로나 희망을 줌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게끔 도와주는 종교적 이야기에 통합될 때 극복 가능하다. 결정적 사건에 직면하면 위기 서사는 사건을 의미 있는 맥락에 삽입함으로써 위기에 대해 잘 알도록 할 수 있다. 급작스럽게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서사는 과거의 시점을 지정하므로 치유 효과를 발휘한다. 과거로 이동하면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기록에 남겨둔 것처럼 된다.


“모든 슬픔은 이야기에 담거나 이야기로 해낼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슬픔은 억압적인 현사실성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제거된다. 이야기의 리듬, 이야기의 멜로디에 흡수된다. 이야기는 슬픔을 단순한 현사실성 이상으로 끌어올린다. 슬픔은 정신적인 막힘으로 굳어지는 대신 이야기의 물결에 녹아들어 액화된다.


꼭 이야기하는 것만이 치유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 미하엘 엔데’모모‘ 는 경청만으로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모는 뭔가를 말하거나 질문함으로써 사람들을 그러한 생각으로 이끄는 게 아니다. 그렇다. 모모는 그저 앞에 앉아 경청만 한다. 모든 사려와 공감을 다해. 그러면서 모모는 자신의 크고 짙은 눈으로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그 상대는 이미 자기 안에 있었지만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던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걸 느끼는 것이다“

모모는 타자가 스스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놓도록 배려해 준다. 모모는 이야기의 막힘을 풀어냄으로써 치유한다.

“어느 날, 한 어린 소년이 모모에게 더 이상 노래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카나리아 새를 데려왔다. 그건 모모에게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모모는 일주일 내내 새에게 귀를 기울여 주었고, 마침내 새가 다시 지저귀며 즐거워했다.”

경청에서 중요한 것은 전달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람, 즉 타가가 누구인가다. 모모는 자신의 깊고 다정한 시선을 통해 타자를 그 사람의 타자성 안에 그대로 둔다. 경청은 상대에게 이야기할 영감을 주고 이야기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소중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 사랑받는다고까지 느끼는 공명의 공간을 연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서사의 위기

어루만짐 또한 치유력이 있다. 접촉은 이야기하기처럼 친밀함과 근원적 신뢰를 형성한다. 촉각적 이야기로서 접촉은 고통과 질병으로 이끄는 긴장과 막힘을 풀어낸다. 접촉하는 손은 이야기하는 목소리와 동일한 치유 효과를 발휘한다. 근접성과 신뢰를 형성한다. 긴장을 풀게 하고 불안을 없애준다.

오늘날 우리는 접촉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커져가는 접촉의 빈곤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접촉은 우리를 자아 안에서 밖으로 꺼내준다. 접촉의 빈곤은 결국 세계 빈곤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우리를 우울하고, 외롭고, 불안하게 만든다. 디지털화는 이러한 접촉의 결핍과 세계 빈곤을 계속해서 악화시킨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은 늘어가는 연결성이다. 우리가 네트워킹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스토리‘도 사람들을 끊임없이 고립시키고 있다. 이야기와 달리 스토리는 친밀감도, 공감도 불러내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장식된 정보, 짧게 인식된 뒤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정보다. 이들은 이야기하지 않고 광고한다. 주목을 두고 벌이는 경쟁은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스토리셀리으로서의 스토리텔링 시대에 이야기와 광고는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서사의 위기다.


스토리 셀링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 텔링은 이야기를 드러내는 힘이 없다. 이야기는 가령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같다. 그럼으로써 삶에 방향과 지지를 제공한다. 반면에 스토리텔링의 생산물로서 이야기는 오히려 정보의 특성을 많이 띤다. 정보처럼 덧없고, 임의적이고, 소모적이다. 삶을 안정시킬 힘이 없다.

하지만 스토리셀리의 이야기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날것의 사실 또는 숫자보다 효과가 좋다. 감정은 무엇보다 이야기에 반응한다. 스토리를 판다는 것은 결국 감정을 판다는 말과 같다.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사람들은 사물보다 이야기를 더 많이 소비한다. 이야기의 내용이 실제 사용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 스토리텔링은 어떤 장소의 특별한 이야기마저 상업화한다. 그러한 이야기는 그 장소에서 생산되는 상품에 서사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상업적으로 최대한 사용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이야기는 공동체가 아닌, 소비 사회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로  형성된 도덕적 소비는 그저 자기 가치만을 높일 뿐이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공동체가 아닌, 자기 자신의 자아와 연결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이야기는 공동체에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싸 그 공동체를 형성해 나간다.


이야기 공동체

더운 여름밤이면 마을 주민들이 나무 아래 모여 이야기한다. 이 마을은 이야기 공동체다. 가치와 규범을 품고 있는 이야기는 사람들을 가깝게 연결한다. 이야기 공동체는 소통 없는 공동체다. ‘이곳에서의 삶이 개인적 체험이 아닌 … 깊은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 곳이다.’ 이들은 이것저것에 대한 의견을 갖는 게 아닌, 하나의 큰 이야기를 한다.

오늘날의 정보사회는 정반대 모습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과도하게 소통한다. 우리는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를 건다.

이야기는 사회적 응집성을 만든다. 이야기는 의미를 제공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가치를 전달한다.

신화는 의례적으로 마들어진 공동체 이야기다.

공동체 이야기에 충분한 저장소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오늘날의 사회는 불안정하다. 공동체 이야기 없이는 공동 행위를 가능케 하는 강력한 의미의 정치가 생겨날 수 없다. 오늘날 공동체 이야기는 자기실현의 모델인 개인 서사로 눈에 띄게 분해되어 간다. 성과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람들을 따로 떼어놓는다. 그 결과로 우리에겐 공동체를 구축하고 의미를 형성하는 이야기가 매우 부족하다. 과도하게 급증하는 개인 서사가 공동체를 잠식한다. 자기 표현의 형식으로 개인적인 것을 게시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스토리도 정치적 공론장으로서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그럼으로써 공동체 이야기의 형성을 어렵게 한다.

강력한 의미의 정치적 행위에는 서사가 전게되어 있다. 그러한 행위는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한다. 서사 없는 행위는 임의의 행동이나 반응 정도로 전락한다. 정치적 행동은 서사적 응집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삶은 이야기다.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선생님! 있잖아요. 어제요~.”

아이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늘 하고 싶어한다.

그저 좋아하니 읽어주고, 좋아하니 들어주었다.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말이다.

삶이 이야기다.

프로이트도 고통을 개인의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막힘을 드러내는 증상으로 이해했다. 막힘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다. 심리적 장애는 막혀버린 이야기의 표출이다. 치유는 환자들을 이야기의 막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스스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때 치유된다. 이야기는 치유력을 발휘한다.


아이들의 생활이 이야기가 되고, 아이들의 배움이 그저 이야기가 된다. 그것이 삶 속으로 스며 들면 지혜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개인의 역사가 또한 이야기다. 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함께 만드는 중이다. 그것을 어떻게 종결하느냐는 아이들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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