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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글샘 Apr 23. 2024

큰 학교 작은 학교

학교라고 다 같지 않아요.

'1년이 지나도 누가 누구인지 잘 몰라요.'


우리 학교의 장점이다.

우리 학교의 교실 학급 수는 41학급이다.

저출생 영향으로 전국의 초등학생 수가 해마다 떨어지고 있는 요즘 추세에 비하면 꽤 큰 규모이다. 전국의 초등학생 수가 2028년 100만명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둥, 현재 250만명에서 4년 만에 100만명대로 붕괴했다는 둥의 기사를 많이 접하지만, 평소에는 나에게 숫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숫자를 절감하게 되는 시점이 있다. 매 해 1월에는 교육청으로부터 '공립 학교 배정 학급 알림' 공문을 받게 된다. 해마다 배정 받는 학급의 수가 상승 또는 유지되면 그나마도 다행이다.

'또 줄었구나!'

취학 아이들이 줄고 있는 요즘 이렇게 규모가 큰 학교는 귀해졌다.


재작년까지 근무했던 학교는 또 2학급이 줄었단다. 한 학년에 3학급이란다. 그나마도 한 학년에 3학급 정도 되면 그리 작은 학교는 아니다. 그보다도 더 작은 소규모 학교가 있다. 예전에 근무했던 학교가 8학급의 소규모 학교였다. 다섯 개의 학년은 한 학급, 한 학년은 두 학급, 그리고 특수 학급 한 개로 총 8학급이었다.


작은 학교는 건물 한 층에 여러 학년이 함께 생활한다. 한 층에서 여러 학년 선생님들과 공유하는 장소나 기기도 많아지고, 생활 반경이 좁다 보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주 얼굴을 보게 되어 교사 간 거리도 꽤 가까운 편이다. 학교에서 회의를 해도 작은 회의실에 다 모여서 회의 진행이 가능하다. 만나는 사람의 수도 많지 않고 한정적이라 사생활 이야기도 좀 더 깊이 나누는 편이고, 자료 공유도 활발하게 했다. 직장에서 만나는 인간 관계를 직장 '동료'라고 한다지만, 나는 여기서 친구를 만들었다. 그것도 꽤 친한 친구를.


큰 학교로 이동한 지 2년째이다.

꽤 큰 건물에 1년이 지나도 학교의 장소를 다 이용한 적이 없고, 아직도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모르는 곳이 있다. 비단 건물 내 장소 뿐만이 아니다. 학교에 계신 선생님들도 그렇다. 한 동학년에 7-8개의 학반이 구성되어 있다. 한 학년이 작은 소규모 학교에 해당하는 만큼의 학급이 많다. 시간이 지나 이제 누가 누구인지 좀 알만 하다 싶으면 해가 바뀌어 이동해 가신다. 그러니!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게 장점이다.


시골 생활과 도시 생활의 차이가 그러하다.

공간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인 배경만은 아니다. 오히려 공간은 인간을 길들여서 자신에게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예를 들어 성당에 들어가면 성당이란 공간이 내뿜는 강렬한 힘을 느낀다. 우리는 공간이 강요하는 힘에 저항해 그 공간을 떠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떠날 수 없다면 그 공간은 우리를 길들일 것이다. 아니 우리는 그 공간에 적응해야만 한다. 시골과 도시라는 공간에서 우리 삶도 영향을 받는다.


시골 사람들에게는 정서적 흥분을 일으키는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매번 보는 사람들, 매번 보는 풍경들, 작년이나 올해에도 똑같이 반복되는 농사일,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반면 도시의 삶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시골 생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새로운 인상들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해도 너무나 복잡하고 자극적인 광경들이 눈앞 가득 펼쳐진다. 오늘 내가 만난 사람들이 누구인지 다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의 속내를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한 사람 한 사람 신경 쓰다보면 자신의 생활마저 정상적으로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인들은 시골 사람들에 비해 매우 차갑고 냉정해 보인다. 대도시인들은 신경을 자극하는 새로운 사건이나 차이를 피하려고 하다 결국  무감각이나 무신경의 전략을 본능적으로 선택하게 된다.  짐멜의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란 논문을 통해 우리는 지성이든 정서든 분위기든 자신의 내면세계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공간에 대해 삶의 반응으로 구성된 것이라 한다.


짐멜은 시골과 도시라는 공간이 어떻게 인간을 길들이는지 분석한다.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시골 사람이 주변 세계와 유기적이 일체를 구성하면서 삶을 영위한다면, 지적인 도시인은 주변 세계와 일정 정도 거리를 두면서 산다. 도시인의 거리두기는 자극적인 인상들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 전략이다.

시골에서는 타인에 대한 냉담한 태도가 불가능하다. 집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친숙한 이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시골에서 홀로 걸으면서 고독한 사색의 시간을 즐길 수 없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번화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우글거려도 인격적인 관계, 혹은 친숙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 바로 도시에서의 삶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이다.  사실 대도시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사람과 마주치기 때문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자신의 속내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 나아가 타인이 자신의 속내를 나에게 털어놓는 것도 피하려고 한다. 대도시에서 나와 타인은 서로의 삶에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 서로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한 다른 이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바로 도시의 암묵적 윤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속내 감추기라는 도시인들의 냉담한 태도는, 다시 말해 이로부터 발생하는 자유로운 감정은 사람들을 원치 않는 고독에 빠지도록 한다. 냉담한 태도를 지속하다보면 자신의 속을 털어놓을 사람이 주변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짐멜에 따르면 도시인의 자유의 이면에는 이처럼 심각한 고독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 대도시는 도시에 사는 인간들에게 자유라는 달콤함과 고독이라는 씁쓸함을 동시에 가져다준 셈이다. 도시인들은 고독을 치유하기 위해 자유를 일정 부분 포기하고 ‘답답함’을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자유를 지키기 위해 고독을 감내해야 한다.


 신체적 거리의 가까움과 공간의 협소함이야말로 정신적 거리를 가장 잘 드러내준다.  소속되어 있는 집단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타인들과의 관계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집단은 더욱더 쉽게 개인의 업적들, 생활양식 및 사고들을 감시하게 되며, 다른 것은 전체의 틀을 깨는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아진다. 예전 작은 학교에 근무할 때는 누가 아파서 병가를 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가 알게 되었고, 어떤 일이 생겼는지가 모두의 관심거리였다. 알리고 싶지 않아도 알게 도었다. 각 학년에 한 학급씩 있다 보니 내 반이 아이더라도 다른 학년의 아이들도 모두 다 알게 된다. 심지어 형제 자매까지도 알게 된다. 친밀함-작은 학교 꽤 친한 친구, 어려운 인간관계 더욱더 힘들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무엇보다 많은 학급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보니 학교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가십거리들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 모르고 넘어가는 일도 다반사이다. 익명성 속에서 좀 더 자유로운 편이다. 알리고 싶지 않은 것들은 알리지 않아도 된다. 묻혀서 간다는 것이 이렇게 자유롭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그 친한 친구가 문득문득 그립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오늘도 그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속을 털어놓으며 오늘의 고독을 치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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