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난관이자 길. 나는 여러 번 부딪혔지만 오로지 그녀를 통해서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팔 월. 우리는 아직 바캉스를 즐겼다. 프랑스 남부에 있는 하얀 별장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바람이 잔디 위에 서성거렸다. 날개에 푸른빛과 노란빛이 섞인 딱새는 낙엽처럼 흔들렸다. 갈증 하듯이 높은 울음소리를 냈다. 초록 잎이 부대끼며 소낙비처럼 울렸다. 호숫가 주변은 고요했다. 하얀 돗자리 위에 그녀는 배드민턴 라켓을 내려놓으며 누웠다. 그녀는 그늘 아래에 눕지 않았다. 태양이 과하게 내리쬐는 곳에 누웠다. 숨을 몰아쉬었다. 내의를 입지 않고 단추가 앞쪽에 달린 흰 드레스를 입었다. 비실비실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올해 쉰다섯이 된 수희. 고르지 않고 두드러기가 올라온 피부. 풍성한 머리숱을 큰 집게 핀으로 간편하게 틀어 올렸으며 이마선과 구레나룻 부분에 흰머리가 드문드문 보였다.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나는 열아홉이었지만 조금 나이 들어보이게 흰 리넨셔츠와 흰 슬랙스를 입고 갈색 슈즈를 신었다. 배드민턴 라켓을 내려놓고 그녀 옆에 엎드려 누웠다. 스프링 팝업북을 읽었다. 작년 생일선물로 받은 책이었다. 속표지엔 영문 사인이 하나 있었는데 미술경매회사 경영인의 사인이었다. 가로 삼단으로 나눠진 종이. 머리와 몸, 다리를 바꿀 수 있었다. 종이를 넘겼다. 머리는 용, 몸은 돼지, 다리는 나뭇가지로 바꾸었다. 나는 맛있는 샐러드를 보듯이 입가에 햇살이 아삭하게 녹아들었다. 내 옆에 있던 그녀가 눈을 떴다. 더운지 하얀 블라우스 앞섬을 끌어내렸다. 하얀 가슴이 드러났다. 유륜에 잼처럼 튀어나온 검은색 덩어리. 1.4cm 암이 그녀의 면역력이 뚜렷하게 떨어진 상태를 보여주었다. 유두보다 크기가 조금 컸다. 그녀가 손으로 어루만졌다. 달큰한 땀과 매캐한 채취가 묻은 손가락을 나의 머리카락 속으로 스르르 넣었다. 나는 여전히 팝업북에 시선을 두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니 하얀 페이지 위에 Shine the sunlight here 라는 영문장이 있었다. 책을 펼치고 햇볕이 잘 드는 그녀 머리맡에 책을 두었다.
“다다.”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발에 걷어차인 비닐처럼 쪼그라든 가슴. 아래로 처진 유두. 그녀가 눌리지 않게 허리를 조금 세워 왼손을 그녀의 허리 옆에 두고 오른쪽 젖가슴을 살며시 물었다. 머리카락이 소슬바람에 아스라이 흔들렸다. 그녀는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처럼 나의 입 안에 더 많이 들어가게끔 퍼진 가슴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받치고 끌어 모아 올려주었다. 구강 안에 들어오는 공허한 그릇. 아무 양분이 없었다. 연못처럼 고요한 애무. 바람이 불었다. 그녀가 나른한 신음을 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잔디에서 차르르 소리가 났다. 후투티 새가 잔디를 콩콩 밟았다. 나는 그녀의 양쪽 가슴 사이에 머리를 뉘었다. 유두 위로 햇볕이 톡톡 튀어 오르고 투명한 침이 윤슬처럼 반짝였다. 부드러운 곡선과 병든 형태. 그 안에 들어있는 암. 정상세포였으나 주인을 잘못 만나 변이한 유전자. 세포에 산소가 결핍되어 나타난 인체현상. 가여웠다. 나는 침을 닦아주고 싶어서 조심스레 손에 움키고 문질렀다. 그녀가 아프지 않게 살며시 쥐었다가 폈다.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나는 계속 그녀의 마른 가슴을 보면서 손끝으로 유두를 따라 쓸어내렸다. 그녀는 아지랑이를 가슴에 담았다. 내가 물었다.
“너는 집에서 죽을 거지?”
“병원에서 죽을 거야. 그게 너한테 더 편해. 예전에 우리 엄마가 집에서 돌아가시니까 경찰이 와서 그동안 먹었던 약봉지 바닥에 놓고 카메라로 찍더라. 죽은 자리를 내가 재현해야 하고. 나도 정신이 없는데 정황을 설명하래. 집 앞에 있던 휠체어는 언제부터 탔는지 답해야 하고. 귀찮아.”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무릅쓰는 게 서운했다. 서서히 죽음의 형태가 그녀의 입을 통해 드러났다. 그녀는 죽음과 고통의 경계를 허물었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그녀가 말했다.
“상현이 애인 생겼다고 하더라.”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공교롭게도 생년월일까지 같은 친구.
“썸머플링이야. 얼마 못 가.”
“우리, 저녁은 이사장님 댁에서 먹기로 했어.”
“내 생일파티는?”
“상현이도 너랑 같은 날에 태어났으니까 이사장님이 직접 저녁 만들어주시겠대. 거기 수영장도 있어.”
나는 팝업북이 생각나서 고개를 들었다. 낚시 바늘을 끌어오듯 그녀의 머리맡에 있던 책을 끌고 왔다. 따로 형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얀 종이가 까맣게 변해버렸다. 햇볕을 많이 보면 암세포는 죽는다.
우리는 옷을 그대로 입고 이사장 별장에 놀러갔다. 원예사나 가정부, 모두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수희는 나를 교양 갖춘 아이로 키웠다. 전화 받는 법과 말하는 태도, 매너 등 가풍이 몸에 얌전히 배어 있도록 주의를 주었다. 걷는 방법도 엄격했다. 마당이나 집이 모두 컸다. 현관 양옆에 필라스터 형태의 벽기둥이 있었고 반원의 페디먼트 장식이 있었다. 상현이가 나왔다. 얼굴이 동글동글하며 한 아름의 작은 덩치를 가졌다. 봉사클럽의 총무 직책을 맡을 정도로 성실하고 친구들과 사교적이었다. 상현이가 두 시간 정도 일찍 태어나긴 했지만 키는 내가 0.6피트 더 컸다. 그는 조금 조이는 하얀 티셔츠, 헐렁한 분홍색 롱팬츠를 입고 톰 포드 가죽로퍼를 신었다. 비숑이 졸졸 따라와서 상현이는 마당으로 가라고 했지만 내가 품에 안았다. 내가 말했다.
“신발 잘 어울린다.”
“엄마가 오늘 생일선물로 사주신 거야.”
정원에는 우리 학교 이사장이 있었다. 멋스럽게 삭발을 했고 분홍색 드레스에 마놀로 블라닉 펌프스힐을 신었다. 수희와 여고, 여대 동창이었다. 그녀 옆에는 프랑스인 애인이 인사했다. 갤러리 대표이사 남편과 십 년 전에 이혼한 뒤 삼 개월마다 애인이 바뀌었는데 팔월의 애인은 프랑스 남자였다. 큰 키에 짧은 머리와 수염, 깊이 패는 보조개.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 페이턴트 레더 소재의 검은 로퍼로 수수하면서 자기만의 애티튜드를 가지고 있었다. 수희는 불어로 인사하며 오른쪽 볼부터 반갑게 비즈를 나누었다. 코발트블루색의 소파와 알루 체어. 하얀색 테이블 위에 수희가 좋아하는 달콤한 무화과 파이가 놓였고 아이스버킷 안에는 화이트 와인 두 병이 있었다. 배 절임, 소시지, 라즈베리 샐러드, 달걀과 쥬키니, 샬롯으로 만든 키쉬로렌. 간소하게 생일파티를 하고 하얀색 접시 위에 무화과 파이를 나눠먹었다. 이사장이 수희에게 샐러드를 하얀 접시에 듬뿍 담아주며 말했다.
“이거 우리 텃밭에서 직접 키웠어. 너 몸에 좋은 것만 내가 가져왔어.”
내 옆에 앉아있던 상현이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말했다.
“교수님, 그거 엄마가 아니라 제가 뜯어왔어요.”
수희는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했다. 이사장이 물었다.
“너, 항암치료는 정말 안 할 거야?”
“무서워. 방사선 치료를 하게 되면 살아도 산 게 아니래. 계속 누워있기만 하고 일상생활도 못하고.”
이사장의 애인이 대화에 끼고 싶다는 듯 이사장을 쳐다보자 이사장이 불어로 속삭였다. 그는 키쉬로렌을 나이프로 자르며 불어로 슴슴하게 말했다.
“제 고모도 항암치료를 했는데 좋은 면역력까지 죽인다고 털도 다 빠지고 계속 토했어요.”
수희도 미소 지으며 불어로 대답했다.
“네, 그래서 안 하고 싶어요. 수명은 어차피 비슷해요. 그렇게 식물인간처럼 살 바에야 제 일은 다 마치고 죽으려고요.”
항암치료는 한 번 주사를 놓으면 암이 제어되는 이로운 의술이 아니었다. 아픔과 맞서는 아픔이었다. 속을 끄집어내서 찬물에 씻고 싶을 정도로 버겁고 온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이었다. 이사장이 안쓰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아직도 왜 네가 암에 걸렸는지 이해가 안 되네.”
“매사에 완벽주의를 추구하고 감정처리 미숙하면 암에 걸리기 쉽대. 불쾌한 일 생기면 되새김질하고. 감정의 응어리가 차츰 커지면서 신체의 가장 약한 자리, 민감한 부위에 암 종양이 생긴대.”
어른들은 하얀색 테이블 위에서 마저 대화를 나누고 상현이가 나를 수영장으로 데려갔다. 정원과 단차를 내어만든 청록색 돌 수영장. 산맥의 능선 같은 계단. 한 쪽 벽은 사자 부조가 새겨진 담장과 붙어있었는데 야자수를 닮은 무성한 잎들과 고사리가 이곳을 가렸다. 나는 수영장을 싫어했다. 물이 너무 차가웠으며 소독약 냄새가 났다. 수조 같아서 양식장의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상현이한테는 옷을 안 가져왔다고 둘러댔다. 그는 혼자 선글라스를 끼고 수영장에 들어갔다. 그동안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포플러 나뭇가지를 치는 원예사를 구경했다. 나이가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프랑스인이었다. 그는 은색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가지를 잘라냈다. 나는 밑에서 떨어지는 가지를 주웠다. 불어로 물었다.
“저도 한 번 해봐도 되나요?”
“해본 적 있나요?”
“아니요, 저희 집은 자라는 대로 키워요.”
원예사는 사다리에서 내려와 가위를 건네주었다.
“누런 부분만 자르면 돼요. 그게 썩어가고 있는 부분이니까.”
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러나 생각보다 균형을 잡고 나뭇가지를 잘라내는 일이 어려웠다. 썩은 나뭇가지를 한 번 자르는 일이 탯줄을 자르는 느낌이었다. 아직 버티고 있는 생명을 자르는 기분이라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내려왔다. 원예사에게 가위를 다시 건넸다. 상현이는 혼자 수영장에서 노는 게 재미없는지 선글라스를 낀 채 물에 흠뻑 젖은 몸으로 나왔다. 그가 분홍색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물었다.
“너 그거 할 줄 알아?”
“아니.”
나는 유리병에 담긴 무화과티를 마셨다. 상현이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선글라스가 거추장스러워서 자기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나한테 씌워줬다. 선글라스를 쓰니 남부 해변에 온 우스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상현이는 잘 어울린다며 웃었다. 그는 알루 체어에 앉아 몸을 말리며 말했다.
“너 요즘은 요트 운전 안 해? 너 올림픽 시즌에 그걸로 장사한다고 했잖아.”
“타고 싶어?”
“나 가르쳐줘야지. 1급이나 따서.”
“한번 사고난 후로 못 하겠어.”
“사고 났어? 언제?”
“그때 너 처음 태워줬을 때.”
“그거 기름 떨어져서 멈춘 거잖아. 너 그때 너무 크게 돌았어.”
사 년 전이었다. 수희가 휴가 갈 때 필요할 것 같다며 나보고 요트 자격증 1급을 따라고 했다. 나는 필기와 실기 모두 만점을 받았다. 이상한 허세가 생겨서 친구한테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필 그날 요트가 멈췄다.
“또 그럴까봐 못 타겠다고.”
“멀리가면 내가 알려줄게.”
상현이는 분홍색 수건을 어깨 위에 둘렀다. 그 수건은 행동주의 프로젝트에서 굿즈로 팔던 수건이었다. 에이즈에 감염되어 사망한 고인을 회고하는 프로젝트였는데 퀄트를 이용하여 그림과 글을 넣고 광장에 전시했다. 평소 그런 캠페인에 관심이 많은 상현이었다. 나는 무화과티를 알루 체어 아래에 내려두고 물었다.
“내 수건 언제 돌려줄 거야?”
“뭔 수건?”
“작년 수영수업 때마다 내가 빌려준 거. 열 개 준 것 같은데.”
“그거 어디다 뒀는지 몰라. 새로 사줄게.”
그도 나처럼 무화과티를 마셨다. 나는 그를 보고 물었다.
“애인도 남부에 있어?”
“나 애인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나는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시 꺼냈다. 상현이 앞에 손을 폈다. 포장지가 뜯어진 콘돔 포장지. 상현이는 조금 굳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까 주웠어. 잔디에 있던데.”
그는 얼굴이 화들짝 붉어졌다. 가로채듯 빼앗아 포장지를 접어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엄마 거야.”
“들었어.”
“교수님한테?”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자백했다.
“걔도 우리랑 같은 학교야. 이번에 새로 입학했어.”
“나도 아는 사람이야?”
“넌 몰라. 이민준.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만났는데.”
“서머캠프. 원래 어머니들끼리 아는 사이였어. 걔네 어머니도 미술관 이사회 이사진이여서.”
서머캠프는 TASP라고 여름방학동안 해외대학에서 6주간 진행하는 인문학 프로그램이었다. 해외 대학 수업과 유사하게 서면 과제나 토론 수업이 많고 유명한 캠프라 지원하고 합격까지 해야 했다. 그때, 정적을 가르고 나오는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를 돌아 수희를 보았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선글라스 낀 모습을 보고 웃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향하며 서서히 알아듣고 있었다. 서로의 고독을 복사했다. 나는 그녀한테서 사랑과 고통을 받았다. 상현이도 내 시선을 따라왔다. 그의 못된 습관 중에 심심할 때마다 친한 사람을 꼬집는 버릇이 있었다. 악의적인 건 아닌데 부드러운 걸 보고 못 참겠다는 느낌으로 꼬집었다. 먼저 내 팔뚝을 꼬집고 비틀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익숙해서 가만히 있었다. 수희는 더 이상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나를 보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상현은 볼, 허리, 허벅지를 순서대로 꼬집었다. 항상 마지막엔 아랫도리로 손을 내렸다. 나는 미리 알고 상현의 팔을 번쩍 들어 올려서 그가 아무런 방어를 하지 못하는 옆구리를 간질였다. 그는 몸을 꼬며 미안하다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여전히 수희를 보았다. 그녀는 이사장과 대화했다. 죽음이 임박해도 기품을 유지했다. 혼자되는 걸 죽음보다 끔찍이 싫어했던 여자. 그녀는 자기한테 평생의 동반자가 생겼다고 했고 그 이름은 암이라고 했다. 상현이는 내 리넨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뚝에 생긴 손톱자국을 만지며 말했다.
“어떡해. 빨개졌다. 아파?”
“응.”
“근데 왜 아프다고 안 해?”
“말해도 할 거잖아.”
그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하얀 욕조.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초록색 타일에 구리로 만든 파이프가 노출되었다. 따뜻한 수면에서 나른한 허브향이 어른거렸다.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질 것 같은 요람. 그윽한 물살의 흐름. 우리는 함께 잠겼다. 수희는 몸을 뒤집은 채 모서리에 팔을 올려두었다. 나는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쳤다. 가르마를 반으로 그어서 양갈래를 해주었다.
“너는 왜 이런 머리 안 해? 귀여운데.”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땋았다.
“이 머리가 더 예쁘다. 이 머리해.”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일 혹은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바다를 향해 흐르고 나는 시냇가의 버들처럼 잔잔했다. 나는 그녀의 맨 등에 몸을 붙이고 어깨에 턱을 댔다. 그러자 그녀가 몸을 돌려 울먹였다.
“바빠도 내 건강은 내가 챙겨야 하는데, 어리석게 살아온 세월들이 너무 한심해. 사람들한테 내 이미지가 암환자로 낙인찍힌 것 같아서 마음이 휑하고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아. 나도 죽는 거 아는데 사람들이 계속 나에게 암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무서워.”
가족 중에 누가 암이라는 판정이 나온다면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무겁게, 길게 드리워졌다. 암은 양쪽에 완두콩처럼 한 개씩 더 자라났다. 더 딱딱해졌다. 나는 오른손으로 수희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금방이라도 죽음의 문턱을 딛을 것 같아서 미소지어줬다. 그만큼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나와 입을 맞추었다. 나와 몸을 바짝 붙였다. 내가 줄 게 없을 때까지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체온이 느긋하게 감돌았다. 은은한 진저와 깊은 흙, 풀잎과 꽃이 섞인 향수 냄새가 끼쳤다. 나는 그녀 앞에선 전적으로 불능의 상태였다. 그녀의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주름진 방을 검지로 지그시 문질렀다. 검은 문이 벌어졌다. 음핵을 찾아 손목으로 조심스럽게 눌렀다. 꿈처럼 고요하게 울리는 청색의 물소리와 혀처럼 민감하게 닿는 온도. 그녀는 가쁜 숨을 뱉어냈다. 우리는 과즙처럼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나를 부족함 없이 사랑했다. 나는 그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