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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에꼴 에떼흐넬. 프랑스 선교사 부부의 딸 이름을 딴 예술학교. 1942년 조선총독부가 외국인추방령을 내리기 전까지 선교사 부부는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 한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중년이자 미술관장이 된 딸이 다시 이곳을 찾아 지금의 학교로 만들었다. 인문학적인 관점을 길러 작가, 컬렉터, 큐레이터의 자질을 완성했다. 그림만 잘 그리는 작가가 아니라 미술사학적으로 봤을 때 작품의 조형성과 독자성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평소 여덟 시부터 수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문은 일곱 시부터 열렸다. 적벽돌 담장엔 넝쿨이 반쯤 덮었다. 정문에서 학교로 들어가려면 산책로를 따라 한참 걸어야 했다. 배롱나무가 붉은빛을 머금고 느릅나무가 푸른빛을 쏟아냈다. 목재로 만들어진 징검다리가 있고 물이 지나가던 자리는 짧은 풀이 돋아났다. 회색벽돌로 지은 서양식 주택이 나타났다. 세 식구가 살던 3층 가옥을 지금의 학교로 개조했다. 카페테리아와 음악실, 사무실이 있는 1층을 지나면 2층 전체에 가족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 전시실처럼 있었다.
임용고시를 합격한 교사가 아니라 석사이상의 학위를 취득하거나 현직 작가가 강의했다. 프랑스 고등학교 커리큘럼을 따라가, 6주 수업과 2주 방학 사이클이었다. 일반 학교와 다르게 9월부터 1학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학을 고려해도 공백기가 최소화되었다. 일 년 마다 일곱 명을 뽑았다. 일곱 명의 가정배경이 아트펀드 종사자나 메이저 화랑 오너 등, 해외에서 거주했던 학부모들은 귀국한 자녀가 한국 학교의 전형적인 시스템에 적응하거나 애매한 정체성을 추구할 바에야 열린 사고를 이어나갈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허세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들의 삶을 관통하는 진지한 고민이었다. 과시가 아니라 치열한 관습이었다.
여학생 유니폼은 스퀘어넥 회색 조끼에 리본을 달고 플리츠 치마를 입었다. 남학생 유니폼은 흰색 셔츠 칼라가 크고 끝이 뾰족했다. 회색 넥타이, 플란넬 원단의 회색 블레이저 재킷. 칼라에 영문 필기체로 적힌 네모난 레테르가 붙어 있었다. 테일러형 칼라 위로 셔츠 칼라를 밖으로 뺐다. 우리는 서로 친해지기 어려운 구조였다. 원래부터 지정된 자리가 없었고 강의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달라졌다. 하이레벨을 듣는 1학년도 있었다.
채플시간의 마지막 순서였다. 입학식이 따로 있지 않았다. 새학기는 늘 예배로 시작했다. 평소라면 음악실로 쓰이는 공간에 교수를 비롯하여 Freshman부터 senior까지 모였다. 다 모여도 서른다섯 명뿐이었다. 음악실의 내부는 참나무 자재로 둘러싸였다. 선교사 부부가 응접실로 쓰던 곳이었다. 학교 교훈이 위에 적혔다. No Standard. 이사장이 하프시코드 앞으로 향하자 기다란 적갈색 나무의자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모두 일어났다. 찬송가 Hymn to joy 반주가 시작되었다. Van Fyke 목사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중 ode to joy에 맞춰서 작사한 곡이었다. 우리는 하프시코드에 맞춰서 1절만 불렀다. 하프시코드는 커트글라스 안에 담긴 보드카처럼 뾰족한 음을 냈다.
Joyful, joyful, we adore Thee,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문가에는 교수들이 서있었다.
God of glory, Lord of love;
그 중에 수희는 보이지 않았다.
Hearts unfold like flowers before Thee,
그녀는 병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Opening to the sun above.
대각선 뒤에 있던 상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Melt the clouds of sin and sadness;
그의 옆에는 애인이 있었다.
Drive the gloom of doubt away;
자기중심적으로 생긴 넙데데한 남학생.
Giver of immortal gladness,
나는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Fill us with the light of day.
계속 그녀를 기다렸다.
수희는 열 시가 넘어서 보였다. 채플시간이 마치고 차례대로 줄을 서서 2층으로 올라갔다. 층계참에는 미술관 브로슈어가 꽂혀있었다. 이사장과 대화하며 내려오는 그녀를 마주쳤다. 통으로 짜인 붉은색 롱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집게 핀으로 틀어 올렸다. 내가 지나가자 수희는 내 팔을 스치듯 붙잡았다. 말을 하지 않고 내 눈동자만 보며 미소만 지었다. 그녀는 고독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졸업하기 위해선 철학, 문학, 미술, 체육 코어과목을 들어야 하고 그 안에서도 유형을 선택했다. 나는 미술 중에서 크리틱 코스를 선택했다. 나를 포함해서 학생은 일곱 명이었다. 교과서는 입학 할 때 필수로 사야 하는 500페이지 분량의 서양미술사 서적이었다. 영문판으로 사야 했지만 나는 불어가 더 편해서 혼자 불어판을 책상 위에 두었다. 상현이는 내 옆에서 SAT 문제집을 풀었다. 나는 바르게 앉아 방을 둘러보았다. 삼면의 창문과 양귀비 패턴의 붉은 커튼. 스콘스 촛대. 바다가 그려진 금색 액자. 이동식 초록칠판. 콘센트와 전등이 있는 참나무책상. 외서가 꽂혀있는 책꽂이. 벽면에는 작년 크리틱 수업 때 쓴 출판물이 비닐 팩에 담겨서 전시되었다. 수희는 문을 열고 여유롭게 웃으며 들어왔다. 우리는 오리엔테이션이 없었다. 그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 중 300페이지를 펴보라고 했다. 왼쪽 상단에 프리다 칼로의 1954년 작품 <인생 만세>가 나왔다. 영어로 말했다.
“프리다 칼로의 이 그림은 A급일까요, B급일까요?”
그러자 어떤 여학생이 물었다.
“공인된 작품에 함부로 급을 나눌 수 있나요?”
“그게 우리 강의의 요점이에요. 왜 이 작품은 인정을 받았는가. 여러분은 공인된 작품에 대해 덮어두고 비평가들이 남긴 찬사만 주워 먹고 있지 않나요? 우리가 그들만큼 인식하지 못하면 아류가 될 수밖에 없어요. 저는 여러분들이 부디 근사한 현상만 보지 않길 바라요. 작품의 아우라가 나오는 근원을 파악해야 해요. 그러기위해선 여러분이 1학년 때부터 배워온 미술사의 흐름을 바탕으로 작품에 대한 다층적인 통찰을 연마해야 되죠.”
학생들은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제가 이 작품을 가져온 이유가 있어요. 원래 저는 첫날에 일 년 동안 할 에세이 주제를 정하는데, 그런 지겨운 건 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암 진행이 빨라져서 두 달 안에는 죽거든요. 그렇다고 여러분과 두 달 동안 볼 수 있다는 건 아니고 불과 이 주 뒤라도 병실에 있을지도 몰라요. 저도 프리다처럼 병실에서도 여러분과 수업하면 좋겠지만 저는 프리다 같은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니라서 여러분이 굳이 저를 보러 한강을 건너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요. 어쩌면 제 뒤에 올 사람이 더 매력적일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프리다의 마지막 그림으로 첫날 인사를 해요.”
다소 파격적인 문장 때문에 학생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와 눈이 자주 마주쳤다. 그녀는 냉정한 표정으로 이어서 말했다.
“이 작품은 캔버스가 아닌 ‘메소나이트’에요. 톱밥을 압축해 만든 합판의 일종이죠. 거친 텍스처 때문에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하면 이런 투박한 느낌이 나와요. 혹시 이 작품을 실제로 본 학생이 있을까요?”
그러자 상현이를 포함한 다섯 명의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수희는 한 사람씩 선택해서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두 명의 학생에게 짧은 크리틱을 발표하도록 시켰다. 먼저 상현이가 말했다.
“지금 이 인쇄물에선 질감을 제대로 담지 못했어요. 실제 작품 사진을 보면 벽화의 마티에르 같아요.”
그 다음 여학생이 말했다.
“녹색이 우리가 아는 녹색이 아니라 날카롭게 돋쳐있는 느낌이에요.”
수희는 충분히 의견을 수합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상이 좋아져서 인터넷으로도 쉽게 그림을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림은 실견할 필요가 있어요. 인쇄상의 컬러칩과 캔버스 위의 실제 컬러칩이 다를 수 있거든요. 훗날 여러분이 컬렉터에게 작품을 팔거나 여러분이 컬렉터가 될 때도 작품을 실물로 받았을 때 사진과 다른 조형성이 눈에 보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해요.”
그녀는 페이지를 한 장 뒤로 넘겼다가 다시 그림이 있는 쪽으로 돌아와 말했다.
“프리다 칼로의 삶은 폐허였어요. 비극적인 사고와 여러 번 겪은 유산,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상황까지. 그녀는 괴로움을 객관적으로, 잔혹하게 표현했어요. 그림에 의지할 수 밖에 없어요. 더욱 절박하고 처절하게. 신체와 정신의 아픔을 회화로 승화시킨 거죠. 삶의 고통 앞에 선 예술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봐요.”
점심시간. 아이디카드를 찍고 카페테리아에 들어가서 먹는 게 일반적이었다. 날씨가 좋은 날엔 야외에서 먹을 수도 있었다. 식판이 따로 있지 않고 각자 이름이 적힌 2단 도시락을 줄서서 받아갔다. 잇달아 선 학생들 사이에 그녀와 나는 함께 줄을 섰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디저트는 과일, 요거트, 콩포트, 도너츠가 번갈아가며 들어있었다. 아무 무늬가 없는 회색 사각 도시락을 들고 정원에 나왔다. 최대한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았다. 장미덤불로 가려진 평평한 돌판. 나는 한쪽 다리를 굽히고 허리를 돌려 앉아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해물 빠에야와 생선 튀김이었다. 그녀와 함께 도시락을 먹으려는데 상현이가 왔다.
“저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데, 같이 점심 먹어요.”
내 도시락 옆에 자기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그는 텀블러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나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가 중앙에 올라가 앉았다. 자리가 좁아서 상현이와 무릎 끝이 스쳤다. 수희는 나보다 상현이를 유독 아끼듯이 그 아래 먼지가 없는지 물어봤다. 나는 말없이 먼저 도시락을 먹었다. 그녀는 상현이한테 붙임성 있게 물었다.
“이사장님 애인은 이번에 좋은 분이셔?”
상현이는 고개를 들어 의욕적으로 말했다.
“네, 인턴십 추천도 해주시고 제가 비영리단체에 관심이 많아져서 사회자본에 대해서 토론도 해요. 그 분이 많이 알려주세요.”
“상현이는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데?”
“저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면서 독립 큐레이터, 신진 작가들을 후원하고 싶어요.”
그가 오찬회에서 교양으로 차려입은 채 성명을 내는 모습을 상상했다. 나는 모국어를 잃어버린 외국인이 되었다. 그곳은 나와 멀어졌다. 상현이가 나한테 물어봤다.
“다다, 너는 뭐하려고?”
“간호사.”
“간호사? 네가? 그거 착한 사람들만 하는 거 아니야?”
상현의 말에 수희가 웃었다. 나도 살풋 웃음이 나와 고개를 숙이고 포크로 생선껍질을 벗겨내며 말했다.
“실전에선 봉사정신만으론 힘들지.”
“너 예전에 큐레이터라고 하지 않았어?”
“이젠 간호사 하고 싶은데.”
“네 성격에 작가랑 오너 사이에서 기분 상하지 않게 신경 쓰고 잡일하는 게 싫어서 그래?”
“응, 그리고 외판원처럼 아양 떨어야 해.”
수희가 끼어들어서 말했다.
“나중에 경력 쌓아서 미술관 들어가면 돼.”
상현이도 공감했다.
“그래. 지금까지 여기서 배운 소양이 너무 아깝다.”
오후 시간은 봉사활동이었다. 우등한 사명감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었고 해외 대학의 인재상에 부합하기 위한 의도였다. 학생들은 노란색 포드 스쿨버스를 탔다. 열두 명 정원에 두 명씩 앉을 수 있었다. 우리는 2인 1조로 움직였다. 나는 상현이와 함께 앉았다. 주황색 벽돌로 지어진 노인사랑복지관. 상호명이 적힌 카니발 한 대와 방문목욕 차량 한 대가 있었다. 노인사랑복지관은 치매환자 여섯 명이 있었다. 이곳엔 거울이 없었다. 거울을 보면 다른 사람이 있다며 겁을 먹거나 자기 자신과 다투었다. 그때, 상현이는 나한테 양해를 구하며 크로스백을 맨 채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와 상현이가 맡은 할아버지는 다리를 거의 ‘ㄱ’자로 굽히며 걸었고 머리카락이 민들레처럼 돋아났다. 커피땅콩을 좋아해서 별명이 땅콩 할아버지였다. 내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손을 잡으며 우리 아들 왔다고 좋아했다. 옳고 그름을 해명하는 건 환자를 더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에 적절하게 응대하여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 된다. 그는 내 왼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얇은 피부로 혈관이 두드러졌다. 거북의 등껍질처럼 투박한 작은 손의 감촉. 나는 친절하게 말했다.
“아버님,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봐요.”
나는 땅콩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상현이가 나올 때까지 화장실 문 앞에 서있었다. 십 분 뒤에 상현이가 나왔고 뒤이어 들어갔다. 문턱이 없고 변기나 욕조에 안전손잡이가 달렸다. 변기의 앉는 부분은 파란색이었는데 눈에 빨리 띄도록 스티커를 붙인 것이다. 변기 모서리에 묽은 대변이 묻어서 휴지로 닦았다. 휴지통을 보니 꽁꽁 싸맨 환자용 기저귀 하나가 버려졌다. 환자용 기저귀는 악취 때문에 이곳에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걸 들어 소각장에 버리려고 했다. 땅콩 할아버지 손을 잡고 있던 상현이가 그걸 보더니 사색이 된 얼굴로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건 내가 이따가 버릴게.”
상현이가 그걸 크로스백 안에 넣고 다시 땅콩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나는 누런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반 정도 미리 준비하고 욕실바닥에 고무매트를 깔았다. 처음엔 목욕침대나 목욕의자를 가지고 왔는데 땅콩 할아버지는 그 파란 보조 장치가 낯설었는지 격하게 저항한 적이 있었다. 땅콩 할아버지의 틀니를 자연스럽게 빼고 전용 컵에 담가두었다. 먼저 물수건으로 눈과 귀를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닦았다. 면봉으로 콧물을 뺐다. 목욕시간은 십 분 이내로 끝내야 했다. 보통 치매환자들은 몸이 더러워도 매번 거부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땅콩 할아버지는 그 반대였다. 그래서 약속을 했다. 음악을 십 분 동안 틀어 놓고 음악이 끝나면 나가는 걸로. ode to joy를 틀었다. 비누나 샴푸는 먹는 것으로 보일 수 있어서 위에 올려두었다. 가급적 환자 스스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나는 소매를 걷고 욕조에 앉아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스스로 자기 몸을 씻을 수 있도록. 그의 귀처럼 축 늘어지는 힘이 나에게 전달되었다. 그가 몸의 말단에서 중심으로 손을 움직일 동안 나는 그의 구부정한 등뼈를 만졌다. 앙상하게 튀어나온 견갑골과 어깨. 세월로 탈색된 슬픈 몸이었다. 그는 야윈 가슴과 두부처럼 엉긴 살결을 지나 산기슭 같은 주름과 버석거리는 음경을 문질렀다. 사랑에 젖어본 적이 있는 영혼일지라도 육체에 얽매어 있는 한 죽음의 급류에 허둥댔다. 타월로 그의 몸을 톡톡 두드렸다. 상현이는 옷을 바닥에 미리 배열해두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혼자 해야 했기 때문에 입는 순서에 맞춰 미리 준비했다. 동작이 생각나게끔 말을 걸었다. 땅콩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속옷보다 겉옷을 먼저 집어 들었다. 옷 입는 방법은 반복해서 늘 알려주었다. 앞에 커다란 네모가 그려지고 똑딱단추가 달린 윗도리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었다. 옷을 입으면서도 계속 칭찬했다. 단순한 옷을 입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려서 상현이는 그동안 화장실 바닥의 물기를 닦았다.
부슬비가 내렸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쓰던 구형 포르쉐를 아직도 끌고 다녔다. 오래된 차라 범퍼가 조금 찌그러졌다.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녀는 운전을 할 때 하나도 아프지 않아보였다. 핸들 가죽을 손톱으로 긁었다. 그녀의 패인 볼. 여전히 전방만 주시했다. 죽음을 똑바로 보는 사람처럼.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덕피자 먹고 싶다. 김치전 냄새도 그립고. 아직도 내가 암환자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납득하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는 모양이야.”
내가 말했다.
“진짜 치료 안 할 거야?”
그녀와 시선이 툭, 마주쳤다. 그녀가 말했다.
“삶이 부끄럽고 부담스러워. 이겨낼 희망이 없었으면 좋겠어.”
“난 네가 죽는 게 싫어.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명장의 외아들이자 도자 예술 작가였다. 아버지의 백자대호가 파리 개인전에 전시되었고 평론을 써준 사람이 당시 학예사였던 수희였다. 파리에서 내가 태어나고 나는 거기서 자랐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나는 아버지를 보러 수희와 함께 파리 외곽에 위치한 어느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남자화장실 파티션 밑으로 다리 네 개를 보았다. 그게 누구인지 몰랐으나 간호사가 다급한 얼굴로 화장실에 들어가 둘을 데리고 나왔다. 간호사의 부축을 받는 아버지를 보았다. 대변주머니를 차고 있었고 바지에 피가 묻어있었다. 반신불수된 몸으로 비틀대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그 다음날 자살했다. 그리고 나는 수희와 함께 이곳으로 왔다. 그녀의 죽음을 안다고 말한 건 더 이상 삶에 경계를 두지 말자는 일종의 부탁이었다. 가망 없이 떠도는 삶이 아니라 힘주어 말할 수 있는 밀도. 그러나 그녀는 무감했다. 길이 가파를수록 인적이 드물었다. 갤러리와 가옥을 지나 넝쿨이 자라난 모퉁이로 접어들면 아카시아 꽃잎들이 떨어진 일방통행 도로가 나왔다. 북한산과 마주보는 길목. 절충식 구조의 2층 주택. 평지붕 밑으로 외장재는 회색벽돌을 썼다. 차고와 회색벽돌의 담장을 지나면 루버 기둥이 늘어선 외부와 소나무가 바깥으로 뻗은 아치형 대문이 보였다. 가방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려주며 차에서 내렸다. 대문 앞에는 구독하는 미술잡지와 우편물이 떨어졌다. 왼손에 눅눅해진 소포들을 쥐고 열쇠를 꽂을 동안 그녀는 비를 피하기 위해 내 옆에 서있었다. 우리는 도어락을 달지 않았다. 파리에서 살 때처럼 황동으로 주조한 도어놉을 달았다. 손잡이를 잡으면 손바닥에 돋을무늬가 새겨졌다. 나는 대문을 잡아줬다. 그녀가 먼저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아라우카리아 나무와 보스턴 고사리가 심어진 정원. 오이풀과 꿩의다리, 고운 꽃차례 사이에 아직 피지 않은 노란국화가 앙상블을 이루었다. 회색 벽돌로 둘러진 직사각형 연못과 조약돌들. 청동으로 만들어진 조각품. 연못 뒤로는 작은 조경이 섬처럼 만들어졌다. 그녀는 구두를 벗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허리를 숙여 내 검은색 컨버스 스니커즈만 신발장에 넣으려는데 그녀의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낮은 굽의 검은색 가죽 구두가 옆으로 넘어졌다. 혼자 남았다. 하얀색 대리석 타일 위에 독백연기를 하는 검은 배우. 빗물에 젖어서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나를 그녀 옆에 다시 내려두었다. 두 사람이 문을 향하게끔 돌렸다. 구두와 컨버스. 그녀와 나.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벽과 천장이 아이보리로 마감된 내부. 마루가 아닌 회색의 바닥재. 메자닌 구조라 1층부터 2층까지 뚫린 층고로 천장의 서까래와 지붕이 보였다. 거실엔 소파나 텔레비전이 없었다. 천장에 여러 개 달린 공기청정기. 4×4로 거실 전체에 배치된 굴뚝 형태 전시기둥. 직육면체 알루미늄 기둥과 유리 받침대로 만들어졌다. 그 위에 매끈한 백자대호가 있었다. 안료의 냄새가 이곳을 메웠다. 과슈와 유화를 사용한 도자기와 백토물에 담갔다가 꺼낸 도자기. 할로겐 조명이 매립된 벽감에도 놓인 백자. 곳곳에 있는 알루미늄 프레임 가구들. 벤치나 의자, 침대, 콘솔형 테이블, 수납장, 화분, 난간. 모두 골격만 남았다. 치매환자의 집처럼 거울이 없었다.
냉장고를 뒤적였다. 유방암에는 드레싱 없이 생채소를 먹는 게 좋다는 문장을 보았다. 전날 밤에 레시피 동영상을 보며 외워둔 토마토와 파프리카, 오이, 로메인을 찾았다. 한입 크기로 자르고 발사믹 식초에 십 분 이상 담가야 했다. 기다리는 십 분 동안 토마토를 잘랐다. 그런 다음 감자 퓌레를 만들었다. 집에 감자가 없어서 간편조리식품으로 사온 냉동퓌레로 만들어야 했다. 냄비에 우유만 넣어서 걸쭉해질 때까지 나무주걱으로 휘저으면 됐다. 주방에 고소한 냄새가 났다.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었다. 각각 반으로 잘라서 잼을 발랐다. 루시용산 살구잼을 발랐다. 우리는 반원 철제 식탁에 앉았다. 그녀는 내 감자퓌레를 보았다.
“혼자만 맛있게 먹네. 어차피 나는 죽는데.”
수희는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절대 유쾌하지 않았다. 그런 농담들이 암을 더 크게 만들까봐 두려웠다. 그녀의 몸이 고통을 부추길까봐. 인간은 괴로움을 견딜 수 없다. 그녀는 인간이고 수희는 불같은 고통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밤. 우리는 함께 침대에 누웠다. 가로등빛을 받은 루버 기둥 그림자가 우리 위로 기울었다. 그녀는 새벽에 세 번 정도 일어났다. 자다가 일어나 소변을 보고 거실 불을 끄고 켜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녀가 걱정되어 잠을 자지 못했다.
“아파?”
“욱신거려.”
그녀의 입술 왼쪽에 포진 두 개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윗도리를 조심히 올렸다. 거즈에 싸인 솜뭉치들이 나왔다. 벌어지는 거즈 사이로 눈물 한 방울 크기의 피가 비쳤다. 텍스트로 전해지지 않는 고통의 파장이 피의 붉기로 뒷받침되었다. 잼처럼 생긴 덩어리 모형이 더 커진 것 같았다. 동그란 탁구공 비슷한 형태에서 약간 퍼진 납작한 형태. 두려움이 그녀를 깨웠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통증이 2 강도라고 했다. 나는 오른팔로 그녀의 왼팔을 주물렀다. 주먹으로 등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