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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다다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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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원 Sep 23. 2024

3

아트 앤 비즈니스 코스. 심화수업이라서 일반 과목보다 레벨이 있는 코스였다. 그럼에도 열네 명의 학생들이 들어왔다. 4.0이 최고점이지만 심화수업을 들으면 4.5-5.0까지의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미술 시장 법률 상담 컨설턴트 변호사가 초빙되었다. 계약서 유의사항과 소유권 귀속, 소장이력과 작품의 진위 등 ‘예술법’에 대해 분석했다. 고상한 용어들이 나왔고 관심이 없던 나는 조용히 뒷문으로 나갔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화장실은 1층에만 있었다. 1학년들은 야외에서 철제 이젤을 세우고 그림을 그렸다. 앞치마를 매고 철제 의자에 앉았다. 교수가 뒤로 지나다니면서 코치했다. 선교사의 아내 이름을 딴 Fantine 도서관에선 디베이팅 코스를 듣는 학생들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울렸다. 아치형의 문틈으로 상현이가 보였다. 학생들이 교수와 웃고 떠들 동안 상현이도 미소 띤 얼굴로 친구들을 보았다. 나는 남자화장실에 들어갔다. ‘M’이라는 금색 영문자가 박힌 우드도어. 내부는 어슴푸레한 매입조명이 밝혔고 공기살균기 냄새가 났다. 소변기와 좌변기 모두 쪽마루 파티션 안에 배치되었다. ‘Grooming Room’이라고 적힌 양치하는 공간과 손을 씻을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나는 소변기가 있는 끝자리에 들어갔다. 소변기는 바닥에서 떠있는 계란 형태였다. 남학생 둘이 화장실로 들어왔다. 야외에서 보았던 1학년인지 붓을 대리석 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낮은 목소리의 남학생과 조금 쉰 목소리의 남학생이 번갈아가며 대화했다. 쉰 목소리의 남학생이 먼저 물었다.

“그 형 어때?”

“착해. 잘 챙겨주고.”

목소리가 쉰 남학생이 믿지 못한다는 듯 웃었다.

“화장실 끝 칸 구멍도 그 형이 뚫은 거라며. 취향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돌려 파티션 벽면을 보았다. 거기엔 동그란 구멍이 뚫려있었고 비슷한 색의 스티커가 붙였다. 남학생은 이어서 말했다.

“그렇긴 한데. 그만큼 외로운가 보지.”

볼일을 끝낸 나는 문을 열고 조용히 조적식 세면대 앞으로 갔다. 손을 씻었다. 매립형 은색 수전에서 차가운 물이 나왔다. 거울을 통해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앞치마를 맨 두 남학생을 보았다. 두 남학생은 방금 전까지 아무 이야기 안 했다는 듯이 둘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붓을 씻었다. 그 중에서 덩치가 큰 남학생이 나를 훑었다. 이민준. 칼라에 붙어있는 레테르를 보며 내가 어느 학년인지 짐작했다. 3학년은 흰색 바탕에 학교 영어 약자가 빨간색으로 좌측에 적히고 1학년은 초록색으로 적혔다. 우측에는 개인 이름이 작게 적혔다. 교수는 학생 이름을 외우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름표를 크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 학생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 티슈를 뽑았다. 나가면서 이민준의 등을 살짝 치고 지나갔다.

불어코스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으로 진행되었다. 날씨가 좋아서 야외무대에서 수업했다. 주인공은 네 연인 허미아, 라이산더, 헬레나, 디미트리어스, 요정의 왕 오베론과 여왕 티타니아, 악동 요정 퍽이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라이산더와 숲에서 길을 잃은 광대를 맡았다. 우리는 인원이 적어서 한 사람이 최소 두 개의 역할을 가져야 했다. 불어코스엔 여학생이 없어서 상현이가 티타니아 역을 맡았다. 퍽은 착오로 사랑의 묘약을 라이산더의 눈꺼풀에 바르며 불어로 말했다.

“그대가 깨어나 맨 처음 무엇을 보게 되던, 그것이 그대의 진실한 사랑이 되리라.”

라이산더는 애인 허미아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오, 헬레나. 당신을 위해서라면 타는 불에라도 뛰어들겠어요.”

네 연인의 한 바탕 소동이 일어난 후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오베론이 나타났다. 광대는 가장 바보 같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였다. 요정의 숲을 빠져 나가는 길을 몰라서 광대극의 순서도 놓쳤다. 오베론이 내 눈꺼풀에 사랑의 묘약을 발랐다. 

“티타니아의 진실한 사랑이 될지어다.”

오베론은 무거운 당나귀 탈을 씌웠다. 눈알이 주먹만 하고 갈기가 지저분한 탈. 가죽처럼 미끈거렸다. 진짜 당나귀 목을 자른 듯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나는 티타니아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가며 관객석을 보았다. 그곳에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 이곳을 보는 수희가 서있었다. 나는 당나귀의 구멍 뚫린 눈알을 통해 그녀를 마음껏 보았다. 탈의 폭이 너무 커서 고개를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내가 티타니아를 보고 있는지 수희를 보고 있는지 밖에선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줄무늬 셔츠에 뷔스티에 네이비색 롱원피스를 입었는데 벤치에 앉자 종아리 중간까지 치마가 올라갔다. 내가 라이산더 역할을 맡을 땐 보이지 않다가 하필 당나귀 역할을 맡을 때 왔는지 억울했다. 티타니아는 나를 보며 천사가 나타났다고 넋을 잃었다. 당나귀 탈을 어루만지며 사랑스러운 뺨이라고 감탄했다. 수희는 우리의 연극을 보며 애정 어린 눈으로 웃었다. 드디어 당나귀 탈을 벗고 라이산더로 역할을 바꿀 때쯤엔 그녀는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콜라주코스. 잡지, 포장지, 우표, 상표 카탈로그, 천, 가죽, 깃털, 철사, 기차표, 가면 등 다양한 재료가 테이블 위에 있었다. 나는 완성했다. 의자에 기대앉아서 권태로운 표정으로 색종이를 접으며 학생들을 보았다. 일어서서 잡지를 오리는 학생과 물감을 덕지덕지 묻혀서 우표와 기차표를 붙이는 학생. 새로운 차원이 만들어졌다. 담론의 집합이었다. 콜라주코스를 듣는 학생 중에 이민준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만든 작품을 들고 다가왔다.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콜라주를 만지며 감탄했다.

“형. 이거 어디서 오렸어요? 재료 질감이 좋은데요.”

나는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테이블 위로 던지듯 내려두었다. 검은색 안감 부분이 너덜너덜 다 잘려있었다. 오른쪽 허리부분에 있던 상표까지. 이민준은 입술이 벌어졌다. 나는 색종이를 접으며 그를 조소하듯 쳐다보았다.

“너도 필요하면 잘라가.”

“이거 버릴 거예요?”

“아니, 나 재킷 하나밖에 없는데.”

이민준은 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훑어보았다. 나는 그의 표정을 다 포착하고 있었다.

“이러면 어머니한테 안 혼나세요?”

나는 입꼬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사람은 나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사랑은 한 가지만 있지 않았다.

“다 용서해줘.”

“저희 어머니였으면 이거 직접 꿰매라고 할 거예요. 형은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요. 한 번도 안 혼나셨죠?”

“응.”

이민준은 아예 내 맞은편에 앉아서 콜라주 작품을 수정했다.

“형, 상현이형이랑 같이 목욕도 하는 사이라면서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 형, 매일 형 이야기해요. 그래서 전 형 누군지 알고 있었어요.”

3시 30분에 강의가 모두 끝났다. 학생들은 산책로를 따라 학교 앞에 서있는 개인차를 탔다. 교수는 종일 학교에 있지 않았다. 수업 준비는 집에서 하고 학교에선 수업만 했다. 본인의 강의가 끝나면 오전에라도 자기 사무실로 퇴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희는 자기가 죽고 난 뒤 후임 교수를 뽑기 위해 이사장과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었다. 우리 학교는 아트페어처럼 이사장이 후보를 추리고 교수를 뽑는 게 아니라 자리를 잠시 비우는 사람이 능동적으로 후임의 자격을 심사하고 자리를 채우고 가야 했다. 나는 그녀를 기다린다고 재킷을 옆에 벗어둔 채 테이블에 엎드려 누워있었다. 한쪽 눈으로 학교 창살을 찬찬히 보았다. 가느다란 철제 세공물. 끝이 뾰족했고 벽보다 움푹 들어갔다. 그때, 누군가 내 등을 만졌다. 남학생 교복은 베스트가 없어서 셔츠 아래로 차가운 살갗이 그대로 닿았다.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벽에 수두룩하게 걸린 걸려있는 검은 액자를 통해 내 옆에 서있는 상현이가 비쳤다. 그는 백팩을 멘 채 내가 자는 줄 알고 등을 느릿하게 쓸었다. 아래서 위로 올라오거나 손가락을 세워서 더듬기도 했다. 그가 꼬집지 않아서 어색했다.

“상현아.”

수희가 계단에서 내려오며 그를 부르자 상현이는 깜짝 놀라 손을 뗐다. 그제야 나도 일어난 척 연기했다.

“오늘 기사님이 데리러 오셔? 집까지 데려다줄까?”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안감이 해진 재킷을 입으며 상현이를 내려다보았다. 상현이는 나를 보았다.

“그래도 돼요?”

“응, 오늘 이사장님 바쁘실 것 같은데 같이 저녁 먹자.”

“전 좋아요.”

“미리 나가서 차 가져올게.”

나도 그녀를 따라가려는데 그녀가 차키를 쥔 손으로 내 가슴팍을 막았다.

“너는 상현이랑 같이 나와.”

그녀는 혼자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 학교는 차가 안으로 들어올 수 없고 정문까지 산책로를 따라 걸어야 했다. 나는 상현이를 기다리기 위해 1층 현관 포치 아래에 서있었다. 쌍여닫이문 중 한 쪽만 열렸다. 흐린 날씨였다. 포치등에 불이 켜졌다. 그는 복도 끝에 서서 전화했다. 

“지금 안 오셔도 돼요. 다다랑 같이 갈게요.”

현관에는 애긍함이 있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선기금으로 쓰는 갈색 통이었다. 상현이는 늘 하교할 때 그곳에 돈을 넣었다. 넝쿨이 돋아난 계단을 내려가자 검은색 구형 포르쉐가 비상등을 켠 채 서있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으려고 했으나 그녀는 상현이가 외로울까봐 뒷좌석에 가라고 했다. 그녀는 운전을 하며 상현이한테 물었다.

“주말에 이사장님이랑 청년작가 아트페어에 갔다는 소식 들었어.”

그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서 그녀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다.

“네, 제 방에 있던 그림 팔고 다른 거 사려고 어머니가 데려가셨어요.”

“방에 있던 그림 기억나. 단색화였지?”

“맞아요. 그건 사 년 전에. 아쉬운 게 그 작품, 제가 사 만 이 천 달러에 팔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이 천 달러 더 올랐어요.”

“너무 아깝다.”

“저는 교수님도 오실 줄 알았어요. 다다랑 같이.”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지만 나는 창밖만 보았다.

“가려고 했는데, 그날 몸이 아파서 못 갔어. 다다라도 보낼 걸 그랬나보다. 상현이한테 감식안도 배우고.”

“제가 감식안이 좋은 게 아니라 어머니가 사라는 것만 사서 그래요.”

“어머니가 든든한 어드바이저시니까, 어머니 말만 잘 들으면 될 거야.”

상현이는 웃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기 믿지 말라고 하세요. 어드바이저만 따라가면 이익만 따지는 평면적인 소비자만 된다고 하셨어요.”

“이사장님답다.”

“그쵸. 이번에도 경매 보러가기 전에 카탈로그보고 작품이랑 작가를 다층적으로 조사하라고 과제 내주셨어요. 단지 작가가 죽을 때 다 돼서 가격이 오른다는 작품 말고 심도 있게 습득한 지식은 내공의 품위를 세운다고요.”

“상현이가 특별히 감동 받은 레퍼런스가 있었어?”

“작가 중에 ‘연인’을 주제로 연작을 만든 분이 계세요. 보통 우리가 연인이라고 하면 두 사람을 떠오르기 쉬운데 그 분은 다 죽어가는 기아, 노인, 환자, 동물을 그려요. 인터뷰를 보니까 이 사람이 나의 연인이어야 연민하지 않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래요. 그림을 그릴 때 그 사람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더 이상 연민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영혼으로 보인다고. 실제로 구호활동을 하기도 하시고요. 제 롤모델로 삼고 싶어서 작품을 구매했어요.”

우리는 평창동을 벗어났다. 그녀는 우리를 집이 아니라 한남동 5성급 호텔로 데려갔다. 그녀가 평소 가고 싶다고 했던 곳이었다. 가을과 침묵으로 분간할 수 없는 공기. 라디오에서 피아노의 단조로운 소리가 떠다녔다. 잘 익은 크루아상 냄새가 났다. 상현이는 수희와 팔짱 끼면서 딸처럼 친근하게 걸어 다녔다. 나는 그 뒤에 따라갔다. 다이닝층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디너코스를 먹었다. 앞서 부야베스, 도미구이가 나왔다. 디저트로 나온 요거트 샤벳. 분홍빛이 설산처럼 쌓였다. 수희는 잠시 화장실에 가겠다며 일어났다. 나도 따라 일어나려는데 그녀가 내 어깨를 누르며 앉아도 된다고 했다.

“어디 아파?”

“그냥 볼일 보러 가는 거야.”

둘만 남은 식탁. 나는 물을 마시고 유리컵을 내려놓는데 상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말했다.

“네 애인 섭섭하겠다.”

“걔가 왜?”

“나랑 저녁 먹는 거 알고 있어?”

“그걸 걔한테 왜 일일이 다 말해줘야 해?”

“걔 나 싫어하던데.”

그가 요거트 샤벳을 퍼먹으며 웃었다.

“우리는 비독점 관계야. 걔 나 말고도 다른 애랑 잘 때도 있어.”

나는 요거트 샤벳을 먹지 않아서 상현이 앞으로 밀었다. 상현은 물었다.

“넌 애인 없어?”

그가 묻는 질문에 나는 조금 뜸을 들였다.

“없어.”

우리는 실내아이스링크장에 갔다. 상현은 어렸을 때 이곳에서 생일파티를 한 적이 있다고 자랑했다. 수희는 나한테 DAY PASS라고 적힌 골드티켓 두 장을 주었다. 그녀는 구경만 하고 타지 않겠다고 했다. 꼬마전구들이 나뭇가지에 이팝나무 꽃처럼 피었다. Erik Satie의 곡이자 Henry Pacory가 시를 지은 가곡 Je te veux가 흘러나왔다. 여성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아이스링크장을 메웠다. 아이스링크를 둘러싼 펜스 바깥엔 핀란드 사우나처럼 생긴 스낵바와 여러 대의 테이블이 있었다. 파란색 스케이트를 빌려서 링크장으로 갔다. 어린아이들은 파란색 헬멧을 쓰거나 보조기를 끌고 다녔다. 푸른 조명이 빙판 위를 밝혔다. 나는 장갑 낀 상현의 손을 잡고 스케이트를 가르쳐줬다. 수희는 펜스 끄트머리에 기대서 우리를 보며 휴대전화를 들어 동영상을 찍었다. 우리 둘은 고깔을 따라 갔고 나는 그가 내 손을 놓고도 잘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너 거짓말하는 거지?”

“아니, 진짜 무서워.”

그는 내 손을 꽉 잡았다. 결국 발목이 아프다고 했다. 수희가 우리를 불렀고 그녀의 손엔 핫초코 두 잔이 있었다. 상현은 핫초코를 나한테 맡기고 신발을 벗고 오겠다며 렌탈룸으로 향했다. 나는 링크장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스케이트날을 밀면서 수희한테 갔다. 나는 펜스에 팔꿈치를 올리고 상체를 기댔다. 그녀가 건넨 핫초코 안에는 마시멜로 세 개가 띄어있고 코코아 파우더가 뿌려졌다. 그녀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수고했어.”

그녀는 웃으며 내 앞머리를 정리해줬다. 나는 상현이 오는지 고개를 돌리며 자연스럽게 스케이트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날에 묻은 얼음 알갱이를 보며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계속 나랑 떨어져 있으려고 해.”

그녀는 대답 없이 내 손목을 만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까 내 옆에서 어떤 여자가 너희 둘 보고 뭐라고 한 줄 알아?”

음악 소리 때문에 그녀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핫초코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한테서 샌드우드향이 옅게 풍겼다. 그녀는 어떤 여자의 말투를 흉내 냈다.

“저 집은 아들만 봐도 배부르겠다.”

그녀의 모사실력에 나는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보조개를 보았다. 렌탈룸에서 상현이가 나왔다. 원래 신고 왔던 블랙 로퍼로 갈아 신었다. 나는 그녀와 체온을 떨어트리며 상현이한테 갔다.

욕실 내부는 회색돌로 겹겹이 이루어졌다. 각진 정사각형의 큰 욕조. 천장에 슬릿형태의 조명 하나가 어두운 공간을 은은하게 밝혔다. 좁은 틈새로 내리쬐는 빛. 나는 행복함에 가슴이 메었다. 우리를 둘러싼 이 공간이 새로웠다. 우리 둘만 살았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았다. 나는 그녀의 반려자였다. 그녀의 젖가슴 하단에 있는 암을 만져보니 조직검사 진단을 받았을 때보다 부드러워졌다. 암흑과 같았던 터널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본 것 같아 반가웠다. 하지만 그녀는 겨드랑이 쪽이 아프다고 했다. 통증 강도는 3 정도.

“팔이 차가워지는 것 같아. 이젠 저리는 게 아니라 아파.”

“내일 병원 갈래?”

“괜찮아. 다행히 식욕도 같이 커지고 있어.”

그녀는 병원에 가기 싫어했다. 병원에 가면 병을 듣기 때문이다. 그녀가 천장을 보며 말했다. 물방울이 그녀의 팔을 따라 흘러내렸다.

“상현이는 참 착한 아이인 것 같아. 그치?

“걔 원래 그런 취향이야.”

“나는 네가 상현이 같은 애 만나면 좋겠어. 내가 죽고나면.”

“너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그녀가 무심하게 웃었다. 나는 그녀의 목덜미를 만지며 다시 말했다.

“너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넌 아버지처럼 그러지마.”

“너는 나를 안 낳았으면 다른 사람이랑 사랑할 거야?”

“응, 그럴 것 같아. 사람은 혼자 있으면 케케묵으니까.”

“너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사는 게 싫어?”

“내가 너랑 왜 동등한 관계를 만든 줄 알아?”

“…….”

“모성애로는 너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더 큰 사랑이 필요했어. 내가 엄마로서 희생하지 않고도 너를 사랑할 수 있게. 네가 나를 보호자로 제약하는 게 두려웠어. 이런 상황이 오면 나는 널 책임지지 못해서 미안해야하고 너는 나의 무능함에 실망하겠지. 너에게 자식의 도리로 요구하는 게 많아지고 너는 엄마라는 이름 때문에 쉽게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는 하루하루 노여움만 품다가 죽겠지. 나는 남들처럼 너한테 아들의 본분을 강요하기 싫었어.”

나는 가만히 듣고 대답했다.

“나도 널 엄마로 사랑했다면 간병하기 싫을 거야. 자식의 명분으론 사랑이 모자라니까.”

“우리는 미쳤어.”

“간병도 미친 짓이야.”

부모라는 이름에 기대다가 무너진 적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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