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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다다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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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원 Sep 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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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주서기가 시끄럽게 털털댔다. 씻은 사과, 당근, 브로콜리, 토마토, 토란을 우겨넣었다. 텀블러에 가득 담았다. 검은 블라우스에 검은 슬랙스를 입고 작은 크로스백을 맸다. 그녀는 내가 만든 해독주스는 너무 쓰다며 조금씩 끊어 마셨다. 수희는 보라색 바람막이에 쉬폰재질의 흰색 롱주름치마를 입고 에코백을 걸쳤다. 남부버스터미널. 빨간색, 자주색, 초록색 바람막이 점퍼를 입은 노인들이 우리와 함께 올라탔다. 아마 우리가 이 중에서 가장 어렸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자리에 앉으면서도 그 동네엔 무슨 일이 있는지 웃고 떠들었다.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아들한테 안 데리러 와줘도 된다고 말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나는 그녀한테 창가자리를 내주었다. 그녀와 함께 나란히 앉았다. 나는 제일 먼저 안전벨트를 맸는데 그녀는 창밖을 보며 매지 않았다. 가평버스터미널. 외관상 오래된 사우나처럼 낡은 건물이었다. 하늘은 헝겊처럼 눅눅했다. 모든 먼지를 끌어 모아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시가지를 지났다. 아파트를 제외하고 3층 이상의 건물을 찾기 힘들었다. 낡은 식당이나 낮은 상가들. 빈 공간은 무인 주차장이 되었다. 민속놀이가 그려진 벽화와 주택. 자바라대문이 닫힌 고등학교. 그녀도 그 학교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점심으로 돼지고기를 먹자고 했다. 책에선 고기가 타며 생기는 성분이 암을 더 촉진시킨다고 했었다. 나는 미리 예약해둔 식당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자연촌산나물밥상. 옆자리에 산악동호회에서 온 사람들이 앉아서 우리는 대화를 나누기 힘들었다. 내 밥 위에 있는 취나물을 그녀의 밥 위에 절반 덜었다. 그녀가 도로 돌려놓아서 서로의 젓가락이 부딪혔다. 입에 있는 걸 다 삼키기도 전에 밥을 밀어 넣는 그녀한테 밥을 천천히 먹으라고 했다. 

우리는 휴양림 방향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산골산장. 사진에선 꽃이 예쁘게 핀 곳이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떡갈참나무와 소나무, 느티나무와 편백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그늘을 드리웠다. 주말이라 한 숙소에 한 가족들이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그녀가 앞장서서 걸어 올라갔다. 어느 소나무 앞에 서더니 나뭇가지 사이에 자란 넝쿨을 빼냈다. 

“뭐해?”

“어릴 때 이런 거 본 적 있었는데 넝쿨 때문에 나무가 못 자랐어.”

그녀가 빼낸 넝쿨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넝쿨을 저멀리 던졌다. 노을이 산의 등선을 따라 고르게 번졌다.

“다다, 힘들면 안 따라와도 돼.”

바람막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빨리 걸었다. 같이 발 맞춰 걷지 않고 먼저 앞으로 올라갔다. 나는 서둘러 그녀 옆에 걸으며 말했다.

“걸을 때 팔을 저으면서 가야 림프절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된대. 주머니에 손 넣으면 효과 없어.”

그녀는 마뜩찮은 얼굴로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팔을 휘저었다.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곳엔 가족들이 있었다. 그 모습이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들을 보며 올라갔다. 양지 바른 곳에 人자로 기대서 자라는 버섯나무들. 한 구석에 박혀있는 칼슘유화비료 자루와 나뭇가지들. 새소리와 위에서 내려오는 가족의 정다운 대화소리. 시냇물이 졸졸 흘러가는 소리가 청아했다. 풀잎이 우거진 곳은 초파리가 뭉쳐서 날아다니고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몸에 엉켰다. 사람들이 신발을 신고 걸어간 황토길을 지나 편백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멈춰 서서 그녀한테 말했다.

“이 나무의 피톤치드가 소나무의 몇 십 배래. 너도 숨 들이쉬고 마셔.”

그녀는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차피 뭘 해도 효과 없어. 너도 나 죽을 거 알면서 왜 그래?”

“그래도 한 번만 해봐.”

수희는 숨을 들이쉬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하고 숲체험장에 있는 운동기구를 이용했다. 야영장에 있을법한 통나무 놀이기구들이 있었다. 인적이 드물어서 잡초가 자라났다. 그녀는 줄을 잡고 땅에서 높이가 낮은 외다리통나무를 건너는데 중심을 못 잡아서 발이 계속 닿았다. 그녀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지겨워서 끝까지 가지 않았고 나는 건너편 지점까지 넘어갔다. 우리는 정상까지 오르지 못하고 ‘쉼터1’이라는 곳에 마지막 발자국을 찍었다. 그녀한테 나름 여기까지 온 기념으로 푯대가 나오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배고프다며 빨리 내려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녀한테 미소가 보일 때까지 사진을 찍었다.

숙소로 가기 전, ‘로컬푸드’에 들어갔다. 편백나무향이 코에 닿아서 주변을 살펴보니 편백나무 조각을 솜 대신 넣어 만든 베개를 팔았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서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와 말리는 아버지를 보았다. 원목가판대에 유기농, 무농약이라 적힌 채소와 과일들이 진열되었다. 그녀는 아까 고기를 먹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지 소시지 코너를 맴돌았다.

이곳은 공용불판을 이용해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하얀 접시와 가위, 집게, 바비큐 소시지 팩을 들고 공용불판이 있는 구역으로 갔다. 환풍기가 달린 돔 형태의 공간 안에 열 대 정도 있는 바비큐그릴. 이미 아버지들이 다 차지했다. 야외오두막에서 저녁 먹는 가족이 많았다. 접시를 들고 자리가 빠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수희는 정면을 보았다. 아버지가 잘 구운 고기를 일회용 접시에 담으면 아이들이 나르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그 자리에 낄 수 없었다. 우리는 오붓한 연인이었다. 집게로 소시지 하나를 집어서 피노키오처럼 그녀의 콧잔등 앞에 댔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머리카락을 쓸고 물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무슨 생각해.”

“다시는 이곳에 내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해.”

그녀를 달래기 위해 볼을 만졌다. 흩어지려는 가루를 모으는 것처럼. 그녀는 내 손길을 더 기억하고자 손이 가는 방향에 따라 고개를 미미하게 움직였다. 나는 손등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게끔 그녀의 목덜미를 따라 유방을 지나고 아랫배까지 자연스럽게 훑으며 내려갔다. 그녀가 간지럽게 웃었다. 나는 약하고 그녀는 강했다. 그녀가 능글맞게 말했다.

“우리 이거 굽지 말고 생으로 먹을까?”

그때,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화가 난 어머니는 어디론가 전화를 했고 심드렁한 아들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 돌을 굴렸다.

“너는 내가 동생 잘 챙기라고 했잖아! 고등학생이나 돼서 동생 하나 못 챙겨? 그니까 왜 여기까지 와서 싸워!”

“걔가 내 자식이야? 엄마가 낳았으니까 엄마가 책임져야지.”

어머니는 아들의 사나운 대꾸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민준. 나는 낯익은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민준은 계속 우리를 보고 있었다. 비릿한 미소를 보였고 나는 그가 먼저 시선을 거둘 때까지 쳐다보았다. 수희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며 수군거렸다. 고기를 들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만류에 겨우 진정되었다. 가족은 현실이었다. 새로 산 반팔 티가 색 바래고 늘어나면 잠옷으로 쓰는 것처럼. 그는 휘파람을 불며 발걸음을 돌렸다.

비가 왔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녀가 말했다.

“너 덕분에 암에 대한 두려움이 희석되어 가는 것 같아. 나만의 건강을 위해 하루를 소비해본 적이 있었나 싶어.”

“오늘 잘 올라가던데.”

“아니야, 너무 힘들었어. 기를 쓰고 오른 거야. 네 몸은 정말 건강하고 활동적인 것 같아서 한편으로 부럽기도 해. 너도 몸이 가벼워지는 걸 인식하는 것 같고. 너한테선 늘 좋은 냄새가 나는데 나한테선 죽음의 냄새가 나.”

“나는 네 냄새 좋아해.”

우리는 밤 열 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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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고통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죽음으로 압도된다. 그녀는 몸 전체가 마비된 듯이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머리 들기 힘들어.”

경직된 채 누워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급기야 수희는 짜증을 냈다.

“구급차 빨리 부르던가, 뭐라도 해. 나 진짜 죽을 것 같다고.”

나는 구급차를 불렀고 구급대원 세 명이 왔다. 한 구급대원이 그녀의 상태를 듣고 머리를 양쪽으로 잡아 일으켜줬다. 수희는 조금만 흐트러져도 쉽게 아프다고 소리 질렀다. 구급대원은 접이식 의료용 침대를 폈고 그녀는 거의 우는 얼굴로 구급차에 실렸다. 한 구급대원이 구급차에 올라타기 전 나한테 말했다.

“보호자님은 지금 같이 가실 건가요, 아니면 나중에 오실 건가요?”

“지금 갈게요.”

이 불안한 상황에서조차 그녀가 성마르게 소리쳤다.

“넌 학교나 가.”

그녀가 구급차에 실리기 전까지 상태를 확인하느라 미처 교복을 입지 못했다. 구급대원은 비상연락망으로 내 연락처를 가져갔다. 구급차를 보고 달려온 사람들이 몇 명 서있었다. 세 살짜리 아이도 있었으나 내가 가장 어린 것 같았다. 나는 혼자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조용한 방. 그녀가 누웠던 하얀 침구는 잔뜩 흐트러졌다. 베개에 묻은 긴 머리카락. 나는 조금 어지러운 정신으로 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방을 챙겼다. 침구를 바르게 갰다.

크리틱 수업은 다른 강사가 대체했다. 이사장은 그녀가 ‘유방암 3기 목뼈전이’라고 말해줬다. 미국계 한국인 남성 교수가 들어왔다. 그는 전위예술 미술전문지 편집장이었다. 아르마니 수트를 입었다. 오십 대 초반인 그는 세련되고 박식한 외모였다. 우리가 인쇄된 자료로 보는 작품의 컬러칩과 실제 작품은 깊이감이 미세하게 다르다며 우리를 한가람 미술관으로 데려갔다. 노란색 포드 스쿨버스를 탔다. 프리다 칼로 전시회. 사람들이 많았다. 중장년이 도슨트를 끼고 그림을 보러왔다. 상현이가 내 옆에 붙어서 사람이 너무 많아 그림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교수는 우리들을 먼저 <망가진 척추> 앞에 데려갔다. 마치 의사에게 우리를 병을 진단해달라는 것처럼. 북어처럼 두 쪽으로 갈라진 상반신에 와인 오프너처럼 커다란 철골이 박혀있는 끔찍한 그림이었다. 얼굴과 온몸에 옷핀처럼 박힌 못과 절개된 몸 사이로 보이는 붉은 살덩어리. 뒤로 펼쳐진 땅은 녹슨 문처럼 부스러기가 나올 듯이 건조했다. 헐벗은 가슴이 훤히 드러난 반나체,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이 슬픔으로 고이고 나를 보며 여러 가닥의 눈물을 흘렀다. 교수는 이 작품의 조형 양상과 사조, 사회적 배경을 조곤조곤하게 설명했다. 상현이를 비롯하여 학생들은 수첩에 그림만큼 밀도 있게 필기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혼자 전시장을 돌아다녔다. 어느 작품이든 사람이 모여 있어서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마지막 전시장에 <인생 만세>가 걸려있었다. 작품 앞으로 다가갈수록 수박의 매끈함이 보이지 않았다. 작품과 거리를 두어야 ‘인생 만세’라는 말을 외칠 수 있을 정도로 싱그러운 핏기의 작품이었다. 수박은 파인애플 껍질처럼 억센 느낌이 강했다. 빨간 속은 싱싱한 과즙이 아니라 혈처럼 보였다. ‘피떡’이 된 것처럼. 수박은 만찬처럼 여러 모양으로 준비되었지만 식용이 불가능해보였다. 맛도 의심되었다. 고통은 당도 없는 과육이다. 그러나 예술과 만나면 감동의 매개체가 되어 맛을 만든다. 연민과 공감의 미각. 형극에서 그치지 않고 푸른 열매를 맺었다. 그림을 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출구에 서있던 직원이 친절하게 말했다. 

“나가면 재입장 불가능하십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왔다. 기프트샵이 보이는 검은색 쿠션의자에 앉아 수희한테 전화를 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계속 들어왔는데도 신호음이 끊기고 난 다음 들릴 그녀의 목소리를 생각하면 불현듯 긴장이 되었다. 로맨스의 막이 열리는, 관객이 아닌 그 붉은 천막 뒤에 선 배우의 심정으로. 손에 쥔 팸플릿을 열었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이 나열되었고 나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신호음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그녀의 목소리가 빛처럼 번쩍 울렸다. 나는 조금 겁이 났다. 실망이나 서운함을 느끼는 목소리가 들린다면 다시 친해지기 어려울까봐. 내가 저지른 순진한 실수로 인해 그동안 모아둔 관계의 내밀함이 김빠지듯 새어나갔을까봐. 그러나 그녀는 명량했다.

-어, 왜.

“몸 어때? 전화 받을 수 있어?”

-응, 방금 택시 타고 집에 왔어. 진통제주사 맞으니까 통증은 좀 줄었어.

“미안해.”

-뭐가.

“같이 병원 안 가줘서.”

-내 죄야. 사실 얼마 전에 병원 갔을 때 의사가 X-ray찍고 MRI찍어보자고 했는데 내가 말을 안 들었어.

그녀가 원망스러웠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보고 싶어.”

상현이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학교로 돌아갈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진작 내 통화를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이따 보자고 했다.

학교 뒤쪽에는 잔디 위에 학생들의 회화 작품과 청동상이 전시되었다. 평평한 돌 위에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서있는 비너스상. 로댕처럼 남녀의 나체를 본 딴 동상. 하교하기 전, 키가 큰 학생들이 번갈아가면서 청소했다. 재킷과 백팩을 잔디 위에 벗어놓고 셔츠를 걷어 올렸다. 반석을 딛고 올라가면 나체의 연인과 키가 얼추 맞았다. 무용수처럼 균형감 있는 여인의 몸에 낙엽과 새똥이 묻었다. 마른 수건으로 등의 경사를 닦았다. 상현이가 백팩을 메고 이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가 벗어둔 재킷을 들고 팔에 걸쳤다. 밑에 서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키가 더 작아보였다.

“몇 분 더 걸릴 것 같아?”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내가 태워줄게. 이제 교수님 못 오시잖아.”

그는 그녀가 못 온다는 걸 강조했다.

“걸어가면 돼.”

“할 말 있어.”

나는 마른 수건으로 여인의 종아리를 닦았다. 그는 표정이 조금 뾰로통했다.

“애인이랑 싸웠어?”

“민준이가 말해줬어. 너 애인 있다고.”

나는 마른 수건을 떨어트릴 뻔했다.

“왜 나한테 먼저 말 안해줬어? 없다고 했잖아.”

“없으니까.”

상현이는 실망보다 분노로 가득 찬 눈초리였다. 

“너는 나중에 아이 낳을 거야?”

그가 헛된 질문을 한다고 생각해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니. 왜?”

“넌 아빠가 되고 싶은가해서.”

“걔가 이상한 말 했구나.”

마른걸레를 들고 내려와 옆에 서있는 학자 동상으로 향했다. 상현이도 내 옆에 붙어 따라왔다. 그가 내 팔뚝을 세게 꼬집었다. 그를 제지하지 않고 얼굴을 쳐다봤다. 왠지 그가 다 알고 왔단 느낌이 들었다. 내가 동상 위에 올라가기 전까지 계속 꼬집었다. 그는 집요했다.

“손 안 아파?”

“너 아프라고. 아파서 뒤지라고.”

“뒤지면 네가 묻어 줄 거야?”

그가 대답을 주춤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응, 친구한테 비밀을 말하지 않은 죄야.”

검은색 독일제 세단 차량. 브라운 가죽시트. 이 차는 두 번째 타보는 것이었다. 다섯 개의 버튼이 있는 도어 판넬. ROOF, DIV., BLIND, SEAT, HEAT. 뒷좌석에는 상현이와 나, 그리고 가운데에 이민준이 있었다. 둘만 시시덕거리며 이야기했다. 이민준은 슬라이드 150장이 있는 클리어파일을 들고 있는데 이걸 6주 안에 제목과 재료, 제작연도가 적힌 캡션까지 외워야 한다고 투덜댔다. 자기는 그림만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상현이가 우리 때는 200장이었다며 달랬다. 나는 턱을 괴고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더니 애써 꾹 참아내는 신음이 들렸다. 새벽 호수의 표면처럼 쉬쉬거리며 숨소리가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기사가 룸미러로 이쪽을 힐긋 보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오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민준은 아직 내 옆에 똑바로 앉아 있었다. 자세를 고쳐 잡느라 엉덩이와 시트가 마찰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민준이 내 어깨를 손등으로 쳤다. 나는 그제야 오른쪽을 보았다. 상현이의 교복 바지 버클이 벌어졌고 이민준의 두툼한 오른손이 수직을 감싸고 있었다. 물레 위의 흙을 만지는 것처럼 손이 둥글게 움직였다. 상현이는 도어판넬 손잡이 가죽에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붙잡았고 로퍼 신은 발을 꼿꼿이 세우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이민준은 나에게 명령하듯 왼손 검지로 BLIND를 올리라고 했다. 나는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BLIND 스위치를 켰다. 운전석 파트와 뒷좌석 파트를 나누고 있던 판넬 속에서 거울이 위로 올라와 완전히 닫혔다. 거울 속에 비친 상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입술을 꽉 물고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다시 BLIND 스위치를 닫아, 기사에게 여기서 내리겠다고 했다. 차는 멈추었다.

기사가 내려준 곳은 수희가 다녔던 여자고등학교 앞이었다. 춘추복, 혹은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둘씩, 혹은 무리지어 나왔다. 칼라가 둥근 흰색 셔츠, 검은색 끈 리본, 회색 조끼, 무릎을 완전히 가리는 플리츠 치마. 나는 정문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열아홉 살 수희를 상상했다. 어떤 얼굴로 나왔을지, 어떤 고민이 가득 했을지. 마치 나는 시간여행자처럼 덩그러니 서있었다. 여학생들이 정문을 나오면서 내 교복을 한 번씩 쳐다보고 갔다. 여학생들과 같이 횡단보도에 섰다. 여학생들 대화 속엔 종일 배고프다는 말만 있었다. 배고파. 뭐 먹을래. 웃음소리가 모두 제각각이었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사랑을 생각하자, 나는 가망 없이 눈물을 터트렸다.

집에 돌아오니 수희는 목보호대를 찼다. 그녀는 베개를 등에 대고 있었다. 그녀는 목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어서 꼿꼿한 몸으로 무릎에 올려두었던 노트북을 힘겹게 내려놓았다.

“걸어왔어?”

“아니, 상현이랑 같이 왔어.”

“저녁은?”

“너랑 먹어야지.”

그녀가 내 팔을 움켜쥐었다. 침대에서 다리를 빼 조심히 일어났다. 작은 손으로 내 팔을 당기는 그녀의 힘. 양손으로 그녀의 팔뚝을 그러쥐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일어났다. 나는 그녀를 받치며 말했다.

“왜, 앉아있어.”

“나 너랑 같이 먹고 싶어.”

“내가 상을 가져올게.”

“아니, 환자처럼 먹기 싫어. 가서 먹을래.”

 내 가슴팍에 오는 머리가 그대로 안아달라고 빗줄기처럼 들이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나를 올려다볼 수 없었다. 빳빳하게 굳은 몸으로 고개는 문을 향하고 눈만 굴렸다. 여전히 내 팔을 꽉 잡고 있었다. 그녀의 팔을 잡고 가마를 태우듯 천천히 부축하며 다이닝룸으로 걸어갔다. 브라운 상판의 다이닝 테이블에 앉았다. 도자기 안에 담긴 음식과 스텐에 티타늄 코팅이 된 손잡이가 가느다란 수저. 식탁에 도착하자 가채를 쓴 여인처럼 매우 느리게 앉았다. 손을 놓자 그녀는 대략 내가 있는 쪽으로 손바닥을 위아래로 휘저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허리는 괜찮아?”

“누워있는 것도 힘들어.”

기다린 도자기 접시 위에 담긴 쥬키니. 반으로 잘라 속을 파낸 쥬키니에 다진 양념소고기와 토마토를 채우고 오븐에 넣은 요리. 올리브오일에 볶은 그린빈과 샬롯을 주변에 둘렀다. 그건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나는 그녀 옆에 앉아서 완성된 음식을 잘게 잘라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며 스스로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녀가 물었다.

“오늘 크리틱은 어땠어? 나보다 잘 가르치지?” 

“나는 적어도 큐레이터는 안 할 거야. 왜 네가 교단으로 돌아왔는지 알 것 같아.”

그녀가 웃다가 음식을 흘렸다. 나는 휴지로 그녀의 허벅지에 묻은 붉은 소스를 닦았다. 단단한 근육 없이 물렁했다. 나는 휴지를 둥글게 감싸며 물었다.

“이제 입원하는 거야?”

“아직은. 항호르몬제 받았어.”

“좋은 거야?”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이었으나 그녀는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고통만 없애는 거야. 병은 남아있고.”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긴머리카락을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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