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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시간. 스포츠클럽에 가입한 학생들은 테니스 가방을 메고 노란색 포드 스쿨버스를 탔다. 우리 학교는 운동장이 없어서 공공스포츠시설을 이용했다. 스쿼시 라켓과 체육복이 담긴 운동 가방을 매고 스쿼시장에 갔다. 커다란 수조 같은 코트가 나란히 붙었다. 뒤에 나열된 회색 의자의 관중석. 학교에서 정한 체육복은 없어서 학생마다 입은 스타일이 달랐다. 나는 흰색 폴로 피케 셔츠에 삼단블록 바람막이 재킷, 검은색 5부 바지를 입었다. COURT A부터 COURT G까지 적힌 유리문. 학생들은 짝을 찾아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혼자 COURT F로 들어갔다. 뒤이어 상현이가 코트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서는 운동화와 바닥의 마찰음만 울렸다. T존에 자리를 잡고 정면을 보는데 상현이가 입을 열었다.
“어제 왜 그냥 내렸어? 걸어가려면 멀었을 텐데.”
그의 말은 낚시바늘처럼 날이 서있었다. 나도 점잖게 웃으며 응수했다.
“더러워서.”
“뭐?”
나는 라켓을 앞뒤로 바꾸며 혼자 공을 튀겼다.
“알잖아. 나 호모포비아인 거.”
“아직도?”
“경기 안 할 거야? 넌 여기 서.”
라켓으로 상현이에게 오른쪽 바닥을 가리켰다. 그는 라켓 손잡이에 떨어진 너덜너덜한 끈을 검지로 꼬며 내 말을 무시했다. 나는 혼자 서비스 라인에 공을 튀겼다. 문가에 있는 상현이한테 공을 안 보내려고 최대한 앞에서 스윙했다. 그가 말했다.
“혐오표현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거 알고 있지?”
공을 놓치는 바람에 침묵이 코트 안을 채웠다. 내가 라켓으로 공을 주웠다. 스쿼시 라켓을 아래로 향하게 두고 상현이에게 걸어갔다. 그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건 두렵지 않았다. 우리는 콜라주처럼 종이로 오려붙인 듯 세상과 동떨어져있는 것 같았다. 상현이의 눈에 증오가 서려있었다. 내가 말했다.
“넌 어제 왜 이민준 태웠는데?”
“…….”
“넌 원래부터 내가 호모포비아인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런 행동 싫어하는 것도 알고 있었잖아.”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는 나를 본 체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너 내가 누구랑 사귀는지 알고 있지.”
낮게 읊조리며 말하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몰라. 네가 안 말해줬잖아.”
“이민준이 안 말해줬어?”
“응.”
전직 스쿼시 선수였던 스포츠 강사가 문을 열어 왜 경기진행 안 하냐고 물었다. 나는 곧 하겠다고 했다. 상현이는 코트 밖으로 나갔다.
생물수업. 유럽제라늄 분홍꽃잎을 물에 불리고 표피를 면도칼로 벗겼다. 물기가 배어 나오는 면도칼을 보니 그녀가 생각났다. 슬라이드 글라스에 올렸다. 그리고 한 사람씩 번갈아가며 슬라이드를 보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고배율로 보기엔 너무 징그러워서 저배율로 관찰했다. 물을 머금은 은하수처럼 분홍빛의 알갱이가 돋아났고 서로 얽혀들었다. 나보다 작은 세포를 보면서 내가 더 왜소하게 느껴졌다. 세포 안에도 생태계가 있었다. 미미하고 거대한 사실 하나가 쉽게 떨어지고 찢어지는 얇은 몸속에 있었다. 비록 불확실한 육체지만 확실한 사소함 하나도 우리랑 분리될 수 없었다. 신비로운 프랙탈과 수많은 기공들. 나는 복숭아처럼 부드럽고 서글퍼졌다. 창가에 이사장이 기웃거렸다. 안나 모리나리 드레스를 입었다. 강사가 이사장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이사장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강사는 내 이름을 불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도도하고 영민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 방금 이 교수님한테 연락 왔어. 오른쪽 다리에도 힘이 없고 하루 종일 구토해서 오늘부터 입원하기로 하셨대.”
일상으로 무장할 때 다가오는 육중한 시간.
“혼자 병원에 가셨어요?”
“아니, 머리에 통증이 심해져서 구급차 부르셨대. 짐을 못 챙겨왔다고 네가 학교 끝나고 속옷이랑 생리대랑 슬리퍼 캐리어에 챙겨오라고 하더라. 정원 물 못 주고 왔다고 물도 주고 오라고 하셨어.”
내가 바닥 파일을 보며 심각해진 표정을 짓자 그녀는 미소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표정으로 이 교수님한테 가면 안 돼.”
이사장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학생들을 보며 물었다.
“다다, 상현이는 어디 있어?”
그는 우리가 꽃잎 표피를 벗겨낼 때 쯤 기저귀를 챙겨 나갔다.
“화장실 갔을 거예요.”
우리집 정원에 있는 노란색 국화는 핼쑥해졌다. 크로스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호스를 열어 꽃에 물을 주었다. 혈색 잃은 국화가 몸을 겨우 가누며 섰다. 이파리를 만졌다. 늘어지는 팔과 다리, 수척한 육체. 또 일주일 가까이 물을 못 줄 텐데 그동안 나를 기다릴 국화들이 불쌍했다. 수건 여러 장을 이어 붙었다. 분수대에 수건 끄트머리를 담구고 정원에 내려두었다. 물은 수건을 적시며 흙으로 스며들었다. 이것도 책에서 본 생활정보였다. 집을 잠시 비울 때 쓸 수 있는 방법. 그러나 삼일 이상은 무리라고 했다. 방법에만 의지하면 오래 살 수 없었다.
캐리어를 탈탈 끌고 대학병원에 도착했다. 바캉스를 하는 기분이었다. 접수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환자복을 입고 MRI실로 향하는 사람들, 링겔대를 끌고 다니는 사람, 허리에 두꺼운 걸 싸매고 워커 보행기를 끌고 다니는 사람, 온 몸에 붕대를 감싼 채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람. 세상에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았다. 병과 고통이 모여 있었으나 화려한 로비는 마치 백화점 같았다. 밝은 조명과 넓은 공간, 은은한 대리석 바닥. 엘리베이터에 누가 내리고 타는지 관찰했다. 중년의 환자가 침대에 실려 나왔다. 이불 틈으로 살갗이 보였다. 곧 수술대에 들어갈 사람처럼 머리에 비닐도 썼다. 여긴 다 아팠다. 아픈 게 멀쩡한 곳이었다. 죽음도 ‘일’로 처리했다. 사람이 아픈 게 대수롭지 않은 곳이었다.
그녀는 6인실 병실 841호에 있었다. 병실에는 할머니 세 분과 중년 여자 한 명이 있었다. 내가 멋쩍게 인사하니 달갑게 응수했다. 수희는 다행히 창가자리였는데 혼자 커튼을 치고 있었다. 보조기 한 대가 밖으로 나왔다. 내가 조심히 커튼을 여니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운 채 휴대전화 화면에 뜬 영화를 보고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내가 왔는지 몰랐다.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처음으로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이어폰을 빼고 느리게 돌아보았다. 그녀는 침대 등받이를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자동이 아닌 수동이었다. 오른쪽으로 몇 바퀴 감았다. 그녀는 혼자 일어나기 버거웠다. 그녀의 등을 손으로 받쳐주었다. 그녀가 애잔했다. 캐리어의 짐을 꺼내 서랍을 정리했다.
“이제 계속 병원에 있어야 해?”
“응, 간병인 쓰면 돼. 너는 공부하고.”
“챕터1 테스트 마치면 2주간 방학이야.”
“그땐 못 읽었던 책 읽어야지.”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아직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