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서 장소는 인물의 내면 공간이 된다. 의미를 거부하는 예술적 사조가 아니라면 캐릭터와 공간은 긴밀하다. 태아가 있어야 하는 곳이 자궁인 것처럼 특정한 캐릭터가 그 장소에 있으면서 장면이 건축된다. 언어의 개입이 없어도 그 장소에 있음으로써 공간적인 서사가 양상 된다. 건축이라는 분야 자체가 총체적인 학문이기에 복합적인 인간의 감정과 유사하다. 공간에 나를 투사시킨다.
이-푸 투안은 공간을 가리켜 '가치의 중심지'라고 칭한다. 문화적으로 형성되는 욕망 속, 나에게 적절한 공간은 어디인가. 물건 하나로 나의 지위나 가치관을 알 수 있다는 보편적인 마케팅 언어는 오히려 취향을 단순하게 만든다. 본질을 제약시켜 사람을 정형화시킨다. 감성을 무디게 하고 균형을 잃는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이라는 풍조를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취급하지 않고 추종자가 되어 경제적 여건에 맞지 않는 북유럽 가구로 재배치하는 낭비를 한다. 사회적인 의식을 하며 사는 삶에 무슨 고독의 공간이 들어서겠는가.
작가는 '포착하기 어려운 과거의 순간들을 현실에서 우리 가까이로 끌어와 영속성이라는 도구를 획득'하게 한다. 일반 사람들이 다루기 서툴고 어려운 재료를 가지고 면밀하게 형태를 제작한다. 취미가 '독서'라는 건 결코 진부하지 않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능동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이니까. 남들이 자신의 지위를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쓰고 돈을 쓸 때 자신의 인식을 확장시키고 영속성에 접근한다.
일반 사람은 광활한 설원 위에서 눈보라를 맞으면 공포에 추상적으로 압도되지만 에스키모인들은 '지형 간의 관계, 눈과 얼음에 생긴 균열의 형태, 공기의 특징, 바람의 방향을 관찰'하면서 길을 찾는다. 다독과 경험의 이중주는 바로 이런 실마리를 제공한다. 작가는 결코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하루키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대로 자신이 작품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었다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300페이지 분량 되는 작가의 긴 논술형 문제에 독자는 논술형으로 생각해야 한다. 채점자가 없이 토론만 있다.
아이가 유치원 선생님을 유치원이 아닌 시내에서 만나면 당황한다. 그 이유는 공간의 분류체계를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내 작품도 부디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다면. 익숙한 길을 갈 때면 경로가 단순해지고 최소한의 생각만 한다. 하지만 각도를 이탈시켜주면 자신의 목적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언어를 통해 공간의 의미가 증폭된다.
우리는 늘 '바람직한 생각'만 할 수 없기에 '익숙함'이라는 과거의 이미지를 버리고 경험적인 지식을 쌓아야 한다. 단순히 'do'의 의미가 아니라 타인의 경험을 존중하고 배우는 것을 뜻한다. 안식처로서의 집 역할이 부각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집에 잘 들어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