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연탄난로가

잠실 아파트 겨울--거실에는 연탄난로를 피우고

by 황금바늘

지금 잠실에 살아요 하면 다들 좋은 곳에서 사네요 한다 그러나 예전의 잠실 일대는 낮은 아파트가 가득했고 우리 가족이 십 수년을 살았던 잠실 4단지는 5층짜리 서민아파트였다. 잠실 일대를 빙 둘러서 5층 정도의 낮은 아파트 대단지가 형성되었고 장미아파트와 5단지가 고층의 시대를 열기 전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70년대 중후반 4단지가 분양을 시작했고 재테크를 시작한 엄마의 투자로 우리도 새 아파트에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정말 골목마다 넘쳐흘렀고 학교는 금세 아이들이 가득 차서 5단지 고층아파트에서 자리 잡은 신천 초등학교로 원정을 가서 잠시 3부제를 하기도 했었다. 입학식 후 정말 무서웠던 것은 학교의 재래식 화장실로 큰 언니들이 검은 구멍 사이로 귀신이 나온다고 겁을 주었던 것과 불결한 냄새였다.

한 반에 아이들은 100번대까지 넘어갔는데 아들의 초등 1학년 담임 선생님은 그 당시 새내기 교사 시절 학생의 수는 많았어도 그때가 더 수월하고 좋았다고 하셨다. 지금은 25명 남짓인 교실에 같은 크기였다니 103번 104번까지 어떻게 앉아서 공부를 했을까.

5층짜리 아파트는 연탄을 태우던 구조라 각자 현관 앞에는 작은 광이 하나씩 딸려 있어서 그곳이 비어 있을 때는 우리들의 숨바꼭질 공간으로, 겨울에는 연탄창고로 썼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집집마다 연탄을 사서 쟁여놓기 시작했고 지게를 지고 리어카에 잔뜩 연탄을 실은 아저씨들이 옷에 까만 탄을 바르고 동네를 돌아다니셨다. 엄마들은 만나면 쌀이랑 연탄을 팔아놓았냐고 겨울 준비 안부를 물으셨고 나는 왜 산다고 하지 않고 팔았다고 하는 표현이 이상해서 궁금해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이사를 가서 고등학교 중간에 보일러 공사를 했으니 우리의 잠실 아파트 연탄의 역사는 10여 년이 넘어갈 정도로 길었다. 엄마는 겨울에 연탄을 갈기 위해서 새벽에도 잠시 일어나 연탄을 관리하셨다. 가끔 불이 꺼져서 번개탄을 태워 연탄 사이에 불을 피우실 때면 우리 남매들은 뱅 둘러서서 불구경을 하곤 했는데 아빠보다 엄마가 더 능숙하게 불을 잘 피우셔서 존경스러웠다. 밤새 하얗게 다 타버린 하얀 연탄은 겨울에 눈이 와서 미끄러운 길에 던져서 같이 밟으며 뿌려주었다. 아파트마다 아주머니들이 주방 옆 쓰레기 통로에 넣어 버리지 않고 미끄럽지 말라고 하나씩 연탄집게에 타고난 연탄을 집어 들고 길에서 같이 밟아 부셔주었다. 어스름히 학교에서 아니면 직장에서 들어오는 골목길 아이와 남편들이 미끄러워 다칠까 염려했던 엄마의 마음들이 짐작된다.

겨울 연탄의 하이라이트는 17평 작은 거실의 난로였는데 해마다 엄마는 아빠의 도움 없이 연통을 사고 조립하는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연통이 잘못 연결이 된 적이 있어서 시험 삼아 태운 번개탄의 불꽃과 연기가 가득 차 서둘러 다시 조립을 한 일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절 아빠들은 집안일에 무심해서 엄마들이 씩씩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거실의 겨울 난로는 정말 대단한 물건이어서 밥을 짓거나 가래떡을 굽거나 노릇한 쥐포와 군고구마가 익어가는 냄새가 맛있는지를 알려 주었다. 거실을 가로지른 연통에는 빨래가 김을 내면서 바짝 말랐고 종일 올려놓은 주전자에서는 따끈한 보리차가 항상 가득했다. 눈 장난을 하고 들어오면 젖은 장갑과 양말을 난로 아래에 놓으면 이내 눈이 녹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추워서 빨간 얼굴이 불 앞에서 더 빨개졌다. 볼과 손발이 간지러워지는 느낌과 엄마가 건네주는 군고구마의 뜨거움이 섞여 앗 뜨거와 간지러를 반복하며 깔깔 웃어댔다. 밥을 푸고 남은 밥을 냄비째로 난로에 올려놓으면 서서히 바닥의 밥이 눌어붙으면서 누룽지가 되었는데 열이 골고루 전달이 되어서인지 냄비 모양대로 딱 들어 올려지는 바삭바삭하게 기가 막힌 누룽지가 되어 주었다. 어떤 누룽지 기계도 흉내 낼 수 없는 맛이었다.

엄마의 노동과 불편을 지불했지만 찬바람이 부니 어린 시절의 잠실 4단지 아파트 연탄난로가 문득 그리워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