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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나온 Jan 15. 2021

커리어와 일상 사이에서

커리어와 일상 사이에서


예전엔 미처 몰랐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 볕이 좋은 날, 식물들을 옮겨 햇살을 비춰주고, 물을 주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지. 물 빠짐을 신경 써주어야 하는 애들, 바람을 맞게 해주어야 하는 애들, 분갈이를 해주어야 하는 애들, 화분이 늘어갈수록 번거로움이 늘어났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행복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크리스마스 연휴라 해도 외출조차 힘든 이 시기에 이 초록이들과 햇빛이 나에게 커다란 기쁨을 준다. 오늘은 볕이 좋아 그리 춥지 않았다. 내친김에 오랜만에 뒷 테라스에 나가 빈 화분들을 정리하고 노지 월동을 하는 녀석들을 돌보며 손에 흙을 묻혔다. 번거로운 일이기도 하지만 신기하게도 기분이 좋아진다.


예전에 커리어 쌓는 일만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 시기 비슷한 생각을 했던 선배와  꿈을 응원하며, 서로 의지를 많이 했었다. 선배는 커리어에서 멋지게 성공하며 꿈을 이뤘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지나왔기에 선배의 성공은 나의 성공처럼 자랑스럽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커리어에서의 성공은 정말 멋진 일이다. 늘 고마운 선배에게 햇살 좋은 날 누리는 나의 행복감을 나누었다.  선배의 응답은 나의 행복감을 존중하면서도 한편으로 소박한 행복에 만족하여 커리어 쌓기를 그친 사람을 꾸짖는 느낌이었다. 그 시절 꿈을 위해 커리어 쌓기를 채근하고 다그쳤던 생각이 났다. 그때의 관점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커리어와 일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다. 성취에 애달파하거나,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채근했던 불안과 긴장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 나도 나이지만 , 가족들에게까지  미안해진다. 그때는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커리어에 온 마음을 쓰며 분주하였지만 일상의 감사와 여유 없이 시간이 송두리째 매몰되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지금 일상의 일들을 묵묵히 수행하며 느끼는 행복감이 참으로 곱고 감사하다.

커리어와 일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과거엔 내 꿈을 위한 일만 일이었다면, 이제는 나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모든 생명, 그들의 성장과 행복을 돕는 일도 나의 일이 된 것이다. 집안의 식물의 성장까지도 이젠 나의 일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성과가 보이지 않는 집안일, 별로 티도 나지 않는 반복된 일상의 일들에 화가 나기도 했고, 시간도 아까웠다. 마음 가지 않는 일상의 일들은, 어느 것 하나 말끔 한 게 없었다. 정리도 청소도 요리도 그랬다.



일상감사


그런데, 어느 날 화분에 뾰족하게 올라온 연두 잎에서, 창 너머 불어오는 깨끗한 바람에서, 맛있게 요리를 먹어주는 남편의 모습에서 일상의 일들이 참으로 소중한 것임을 눈뜨게 되었다. 자아실현의 목적도 결국 이러한 행복감을 위해서구나. 그러자 그간 커리어 쌓는 일만 일로 보였던 관점이 확장되었다. 하루에 깃든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이 다 나의 소중한 일들로  다가왔다. 그 안에 이렇게 많은 행복감이 숨어 있는 줄 이제 막 알게 된 것이다.

정리하는 법, 청소하는 법, 사랑하는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을 따뜻하게 해주는 법, 일상에는 지금은 서툴지만 알아갈수록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것들이 보물처럼  숨겨져 있었다.


물론 내가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커리어를 쌓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활력 넘치게 쓸 수 있는 에너지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나 지금의 일상 일들에서 얻는 행복감이 커리어를 통해 얻으려는 것과 크게 다르거나, 적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복감이 나를 좋은 곳들로 데려다줄 것을 나는 믿는다.

 크리스마스 연휴에도 출근해서 일하고 돌아올 남편을 위해

빵을 굽고 생선을 구워야겠다.

시금치와 감자를 올리브유에 볶아야겠다.

초 하나 켜 놓고 맛있는 음식이 있는 따뜻한 작은 식탁을 차려야겠다.

일상이 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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