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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하면 되잖아?

by 뇌전증과삶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내 또래 아이들은 하나같이 운전면허를 방학 동안 따야 한다며 운전면허 학원에 다녔다. 지금 따놔야 대학생 때 놀러 가기도 좋고 지금 아니면 시간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나 또한 면허를 따도 되는지 의사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단호하게 얘기해주셨다.


'1년 동안 한 번도 발작이 일어나지 않으면 따도 된다.'


한 달에 최소 1번 발작하는데 일 년 동안 발작 없는 날이 과연 있을까? 난 그 얘기를 듣고 바로 포기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른 것은 알았지만 이럴 때 더욱 그 다름을 크게 느꼈다. 자연스럽게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을 내가 못 할 때 예전처럼 엄청 우울하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좋지도 않았다.


대학을 가기 전 혜미랑 피시방에서 카트라이더를 하며 나도 운전하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다. 혜미는 내게 운전하면 되지 않냐고 하며 나를 데리고 피시방을 뛰쳐나왔다. 난 갑자기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됐지만, 혜미는 조금만 기다려보라며 나를 끌고는 골목 골목으로 들어갔고 내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오락실이었다.


혜미는 내 손을 붙들고는 여기서 운전하면 된다고는 운전하는 자동차 기계로 나를 끌고 갔다. 나는 이거 말고 진짜 운전하고 싶다며 투정 댔지만 한번 해보라며 돈을 넣고는 나를 반강제로 앉혔다. 내가 원하는 운전은 이게 아닌데. 난 어차피 돈이 들어갔기에 하는 수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 뭔가 굉장히 생소했다. 비록 오락실 안이지만 뭔가 묵직한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게 엑셀이고 이게 브레이크야 반대로 밝으면 안 돼! 그리고 양발 운전하면 욕먹으니까 한 발로 해야 해 이게 매너야"


그 시끄러운 오락실에서 거의 소리치듯 나에게 얘기하던 혜미는 잘해보라며 자동차 게임기에 기대어 내가 운전하는 것을 보며 계속 내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시했다.


처음에는 이게 운전이야? 게임이지라고 생각했지만, 게임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너무나도 어려웠고 나는 오기가 생겨서 더 열심히 하려고 운전대를 사정없이 휘두르며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밟았다.


혜미는 내가 항상 완주도 못 하고 게임이 끝날 때마다 돈을 넣어주며 '넌 무슨 돈먹는 하마냐 한판은 이겨야 집에 가든가 하지' 얘기하고는 내가 벽을 박거나 반대로 운전하는 것을 보며 깔깔 웃어댔다.


나 또한 하다가 재미가 붙기도 하고 오기가 생겨서 웃으며 열심히 운전했다. 내가 현실에서는 뇌전증 때문에 운전은 못 하지만 아마 운전한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하는데 혜미는 내가 레이스를 실패 할 때마다 돈을 넣어서 그런지 저녁값도 다 탕진했다. 내가 갑자기 밀려오는 미안함 때문에 어떡해. 얘기했지만 혜미는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아 너무 재밌어 야이 기지배야 넌 운전하면 큰일 나겠다 ㅋㅋㅋ 집에 가서 엄마한테 라면이나 끓여달라고 하자"


혜미가 웃자 나 또한 웃음이 나왔다. 실제 차로 운전은 못 했지만 정말 원 없이 운전해서 운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거기다 벽을 너무 박아서 내가 운전에 재능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혜미네 놀러 가서 같이 라면을 먹었고 우리는 같이 티비를 보며 수다를 떨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혜미가 넣어줬던 돈은 학생에게 굉장히 큰돈이다. 한 두 번이 아니라 거의 1시간 동안 계속 돈을 넣어줬으니 말이다.(자동차처럼 큰 기계는 일반 오락기처럼 100원이 아니라 500원이였다)그러나 혜미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 돈을 나를 위해 써주었다.


뇌전증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려고 할 때마다 내 주위 사람들이 항상 나를 구원해줬다. 내가 운전을 못 해서 우울해할 때 혜미가 나를 구원해줬고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할 거 같았을 때 선생님이 나를 구원해줬다.

엄마가 된 지금 이 글을 쓰며 참살만 한 세상이라고 느낀다. 배려와 관심은 나와 같이 아픈 사람을 늪에서 끌어올리는 밧줄과도 같다. 그런 관심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사회구성원으로서 재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아이도 아픈 친구가 있을 때 아무런 대가없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아이가 됐으면 좋겠다. 지금은 너무 어려서 가르쳐줄 수 없지만 엄마가 뇌전증이 있다는 것과 그리고 혜미라는 이모 덕분에 많이 힘이 됐다고 너희도 그런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싶다.


여담이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운전에 대한 생각이 더욱 사라졌다. 옆에서 피곤에 쩔어 어떻게든 잠에 들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이며 운전하는 남편을 보고 있자면 이건 즐거움이 아니라 노동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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