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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더라도 변한 건 없다.

by 뇌전증과삶

좋은 담임 선생님과 혜미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혜미는 아이를 좋아해서 유아교육과로 갔고 나는 항상 도움을 받던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생각나 사회복지과로 가게 되었다.


대학에 처음 갔을 때 막 엄청나게 공부해서 대단한 사람이 돼야지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침 대학에 갈 즈음에 약이 효과를 받는지 발작이 한 달에 1~2번 정도밖에 쓰러지지 않았다. 달에 4회 이상 쓰러지는 것과 1~2번 쓰러지는 것은 엄청난 차이다.


내가 대학을 갈 때 즈음에 한 만화를 접하게 된다. 그 만화는 산을 타는 만화인데 고고한사람이라는 만화다. 그 만화는 산에 미친 사람들이 산을 타는 그런 내용인데 거기에서 한참 자유분방한 나를 깨우는 대사가 하나 나온다.


'남들이 하라는 대로 살면 그 정도 사람밖에 안 되는 거다'


사실 정확하게 저 대사인지 기억은 안 난다. 이걸 찾아보겠다고 남편이랑 주말에 아이 맡기고 만화방에 갔는데 워낙 옛날 책이기도 하고 마이너해서 찾지를 못했다. 하지만 대략 저런 내용이었다.


난 뭐 때문인지 저 대사에 깊이 공감했다. 뇌전증을 어릴 적부터 겪으면서 뭔가 억눌려있던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난 대학 가자마자 뇌전증 환자가 절대 하면 안 되는 행동인 음주를 해봤다. 뇌전증은 뇌의 긴장을 담당하는 인자가 과도하게 분비되어 발작을 일으키는 것인데 술을 마시면 그 조절 능력이 더 사라져서 더욱 심하게 발작하게 된다.


만약 주위에 뇌전증이 있는데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경증 뇌전증이거나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또한 운전도 매한가지로 극소수의 경증 뇌전증 환자만 운전할 수 있다. 나는 중증이기 때문에 면허 발급도 안 된다.)


뭔가 그때 정신줄을 놨던 것 같다. 마치 내 뇌전증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신입생 오티를 하거나 엠티를 갔을 때 술을 마셨는데 의외로 멀쩡했다.

그러나 역시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 나는 대학교 수업 도중 대발작을 하고는 응급실로 실려 갔다.

잠깐이지만 무언가에 취해서 내가 나았다고 생각했었다. 마치 만화 속에 주인공처럼 남들이 하라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을지 알았다. 응급실에 갔던 날 병원 입원실 많이 울었다. 그렇게 나는 완치라는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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