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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걸렀네

by 뇌전증과삶

나는 자주 발작을 했지만 사귀고 있던 남자 앞에서는 항상 발작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전조증상(발작하기 전 증상 나같은 경우는 눈이 돌아가고 온 몸이 정지하고 가벼운 손떨림이 보인다. 이때는 어지러운 느낌이 있고 이게 심해지면 필름이 끊키듯 기억이 끊키면서 대발작을 한다이 있거나 뭔가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아예 만나는 것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데이트도중에도 택시를 타고 바로 집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사고가 발생했다. 한참 대학 생활을 즐길 때 나는 해서는 안되는 1시간 넘는 거리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보통 1시간 넘는 거리는 부모님 차로 언제든지 피곤하면 잘 수 있는 상태에서만 갔었는데 대학생에게 차가 있을리 만무했고 우리는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멀리까지 놀러 갔다.


처음에는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멀리 가는 첫 여행이고 남자친구와 가는 여행이라 너무 즐거웠다. 거의 2시간 반 정도 걸린 바닷가까지 간 우리는 정말 즐겁게 놀았고 맛있는 것을 먹었다.


문제는 오는길이였다. 항상 발작은 피로함이 끝까지 차올랐을 때 발생했다. 난 분명히 버스에서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발작을 했다. 전조증상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대발작을 했고 기억은 잘 안나지만 꾀 많이 했던 것 같다.


내가 눈을 떳을 때는 버스의 다른 승객들과 남자친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발작하는 것은 이미 익숙했지만 내기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발작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난 말이 잘 나오지 않아 어떻게든 일으켜 달라고 했다(발작 후에는 온 몸의 근육에 긴장이 풀려서 제대로 서기도 힘들고 발음도 잘 안 나와 발음이 샌다.)


나는 부축을 받고 버스 좌석에 다시 앉았다 버스 기사님이 괜찮냐고 했을 때 남자친구가 대신 답했던 거 같다. 나는 좌석에 앉아 남자친구의 눈을 보았다. 남자친구의 눈에는 너무나도 당황하기도 하고 앞으로도 이러지는 않을까?또 언제 발작이 생길까? 내가 초등학교 때 처음 발작한 날 아이들의 눈에 보였던 두려움이 가득차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버스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친구와는 그 후로도 계속 사겼다. 그러나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변했다는 것을 이제 온전히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는 것을 느꼈다.


결국 남자친구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물론 뇌전증 때문은 아니라고 우리 성격이 안 맞는 거 같다며 헤어지자고 한 것이다.


나는 그날 정말 많이 울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던 안 좋은 생각들이 다시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뇌전증 때문에 연애도 못하고 결혼도 못할 거라는 그 안 좋은 생각은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 덕분에 잠깐 고개를 숙인체 숨어있었던 것 뿐이다. 결국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끌어내리려고 했다.


나는 대학교 수업도 안 가고 택시를 타고 예전 초등학교 옆에 있던 병원에 의사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그래도 성인인지라 이번에는 전화를 미리 하고 찾아갔다. 이 상태로 대학교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간 병원은 리모델링을 했는지 인테리어가 새것처럼 바꼈고 간호사 언니들은 한 명만 빼고 전부 바뀌어 있었다. 그래도 간호사 언니가 나를 알아봐 주고는 다 컸다며 음료수도 주고 잠깐 기다리라고 얘기해줘서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 이였다.


내가 초등학생 때는 의사 선생님이 그냥 아저씨였는데 이제 의사 선생님은 내가 나이 먹은 것처럼 나이를 드셔서 노인의 느낌이 물씬 풍겼었다. 그러나 말투는 똑같았다. 환자를 무시하고 막 대하는 말투 그럼 에도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정말 실력이 있었던 거 같다.


의사 선생님은 여느 때와 같이 나를 보고는 다 컸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우리는 밖에 나가서 밥을 먹었다. 잘 생각은 안 나지만 중식을 좋아하셔서 그런지 볶음밥을 먹었던 것 같다.


나는 의사 선생님께 내가 겪은 일과 앞으로 연애도, 결혼도 못 할거라는 암울한 얘기들 했다. 의사 선생님은 항상 그렇듯 정말 별거 아니냐는 말투로 대답하셨다.


"잘 걸렀네"


의사 선생님은 볶음밥을 먹으며 말을 이어갔다.


"겨우 발작 한 번으로 돌아설 놈이면 어차피 결혼은 못하지 않겠냐?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병도 이해해줘야 하는 게 결혼인데 "


나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발작하는데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어딨냐고 다들 당황하고 나를 다르게 보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결혼은 네가 발작을 하던 암에 걸리던 변하지 않고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랑 하는 거야 그런 사람은 네가 찾아야지“


나는 의사선생님의 말이 말도 안되는 그저 책에서나 나오는 이상적인 얘기라고 생각했다. 어느 누가 발작하는 것을 보고 심경에 변화가 없을까? 그런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의사 선생님과 얘기를 마치고 뒤늦게 학교로 갔다. 고등학교와 달리 대학교는 수업 후에도 같이 모여서 공부를 하고 과제를 많이 했기 때문에 학교에 갔는데 가는 내내 버스에 앉아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다.


의사 선생님은 당사자가 아니니 그렇게 얘기하지 당사자라면 과연 그렇게 이상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난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쓰게 되겠지만 대부분 내가 만나던 남자 혹은 결혼하려던 남자들은 내가 발작하는 것 그리고 그걸 부모님에게 설득하는 것에서 다 포기했다. 2번에 파혼 후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연애를 했고 놀랍게도 그 사람은 내가 쓰러지던 뭐던 전혀 개의치 않고 나를 챙겨주었다.


그 사람은 임신했을 때 새벽에 화장실 가는 도중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항상 내 옆에서 쓰러지지 않는지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화장실 옆에 앉아서 무던하게 나를 챙겨주었다.

1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의사 선생님의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결혼이란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줄 수 있는 그리고 나 또한 목숨까지 내줄 수 있는 그런 사람과 해야 한다는 것을 삶이란 풍파 속에서도 웃으며 서로에게 농담할 수 있는 그런 사람과 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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