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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장애인이 되었다.

by 뇌전증과삶

대학교 생활은 빛처럼 빨리 지나겠다. 나는 어느새 사회인이 되었고 취업의 문을 두들겨야 하는 22살이 되었다. (2년제를 나왔다)

나는 많은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생각보다 나를 불러주는 곳은 별로 없었다. 항상 자기소개서에 뇌전증을 써놔서 그런지 면접 때 뇌전증에 관해서 물었고 몇 번 쓰러지는지 그리고 쓰러지면 얼마나 발작하는지 대답해주었다.


주위 동기들이 하나둘 취업을 마쳤는데 나는 취업을 못 하고 아르바이트만 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고 싶었는데 내 맘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주기적으로 뇌전증으로 인해 대학병원에 다녔다. 그리고 그때도 어김없이 대학병원을 갔는데 신경과 의사 선생님이 내 증상에 관해서 얘기하다가 의사 선생님은 내게 장애등급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나는 처음에 '장애'라는 말을 들었을 때 화들짝 놀라며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장애등급을 받으면 복지 카드가 따로 지급되고 그 복지 카드를 지참 때 장애인에 대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지금이야 등급 받는지 오래돼서 장점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그 어린 시절에는 나를 장애인 취급하는 것이 너무 못마땅했던 거 같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차분하게 얘기해주었다. 아무래도 초등학교 때부터 뇌전증 때문에 3개월마다 봤던 선생님이라 친절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를 잘 아셔서 일부러 유하게 말해주신 그것 같다. (원래는 친절하신 분이 아니다)

"손가락 4개인 사람에게 손가락 5개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은 잘못된 거지 이 장애등급이 손가락 4개인 사람들에게 손가락을 하나 더 달아주는 거란다."


이렇게 얘기하며 장애등급 아무나 해주는 거 아니라고 나중에 본인에게 고마워할 거라고 했다. 나는 정말 많이 고민하고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장애등급을 받으면 어떤 게 좋은지 그리고 어떤 게 나쁜지

장애등급을 받는다고 명찰에 '장애인' 붙여놓고 다니지는 않는다. 장애등급은 말 그대로 취업하기 힘든 장애인끼리 경쟁하는 면에서도 좋고 각종 주차장 그리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광지가 50~70% 할인된다.

어린 마음에 장점을 알았지만 그런데도 조금 망설여졌다. 이걸 한 번 받으면 이제 나는 평생 공식적인 '장애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생각을 했고 결국 장애등급을 받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규모가 있는 회사에는 장애인을 무조건 일정량 채용해야 하는 것도 있다. 취업하려면 그리고 사회적 배려받으려면 등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받은 것은 경증 장애였다. 중증 장애는 거동이 힘들거나 일상생활이 아예 안되는 경우이고 나는 손가락이 없거나 혹은 눈 한쪽이 없는 것처럼 일상생활은 되나 장애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다.

장애등급을 받고 놀랍게도 바로 복지관에 취업이 됐다. 물론 너무 힘들어서 금방 때려치웠지만(매일 9시까지 야근했다. 토요일 일요일도 근무하는 경우가 많아서 너무 자주 쓰러졌고 못 버텨서 나왔다) 그래도 취업이 됐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는 이제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첫발을 내디딘 것과 같았다.


지금은 돈은 많이 못 받지만, 공공기관에서 일을 하고 있고 장애등급이 있는지라 가끔 아프거나 급하게 병원에 가는 것도 다 이해해주는 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물론 다 이해해주는 것은 페이가 적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최저시급보다 조금 더 받는다)


세상에는 내 노력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뇌전증은 노력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큰 산이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공존이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내 한계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즐겁게 사는 것 그것만으로도 매우 즐겁고 행복한 것이 많다.


나는 이제 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가끔은 남편한테 '내가 장애가 있어서 못 치우겠어 네가 해줘….'라며 나만 할 수 있는 드립을 하기도 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또한 어떻게 보면 암울한 현실 속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오늘 저녁 마트에서 할인하는 반찬과 사무실에서 먹으라고 준 곱창 김을 남편과 함께 먹으며 거창하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하루를 마무리한 것처럼 뇌전증이 있어도 그리고 나를 억누르는 스트레스가 있어도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았던 것처럼 모두가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행복을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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