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의 어머니 즉 시어머니를 만난 것은 강남의 레스토랑이였다. 그곳의 나무 향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그 만큼 그 기억은 강렬했고 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실내는 은은한 조명으로 조용하게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였고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양측 부모님이 잘 차려입고 오셨고 이제 상견례가 시작되었다. 나는 평범한 가정처럼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술도 한 잔하고 결혼을 축하해줍시다 그렇게 흘러갈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한 없이 냉정했다.
'아들이 꼭 나와야 한다고 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저는 이 결혼 안 하는게 좋아 보입니다'
정확한 단어는 기억이 안 나지만 시어머니가 꺼낸 첫 마디는 그거였다. 아마 음식이 나오기 전에 빨리 마무리를 하려는 것 처럼 보였다. 남자친구가 시어머니에게 왜 그러냐고 뭐라고 하자 시어머니는 버럭 화를 내며 얘기를 했다
'너 같으면 니 자식을 아픈 사람에게 장가보낼 수 있니?사지 멀쩡해도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을 수 있는데 간질은 낫지도 않은 병이라메!'
내가 너무 당황해서 정확치는 않지만 대략 저런 얘기였다. 남자친구는 시어머니가 버럭 화내자 아무말도 못했다. 나는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멈추면 안되지..네가 나서야지..네 부모잖아 계속 외쳤다. 그러나 그 외침은 당연히 전달되지 않았고 시어머니의 말에 우리 부모님도 화가 너무 나서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남에 귀한 딸을 데려가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하는 건 경우가 아니죠'
난 우리 어머니가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나는 애써 우리만 잘 살면 되지 않냐고 말씀드렸지만 우리 부모님은 맘이 상할데로 상하셨고 시어머니 또한 절대 허락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렇게 내 생애 첫 상견례는 음식도 시키기 전에 끝났다.
나는 어떻게든 부모님을 설득했다. 부모님은 내가 계속 설득하자 굉장히 험난한 결혼생활이 될거라며 처음에는 반대하셨지만 계속되는 설득에 결국 허락을 해주셨다.
그러나 문제는 남자친구였다. 그게 어려웠던 것 같다. 남자친구는 부모님의 말에 동조됐고 우리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첫 번째 파혼을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번째 파혼도 똑같았다. 정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
'아이에게 간질이 옮으면 어떡할거니'
'잘 시작해도 이혼하는 판국에 시작부터 삐걱거리면 결혼생활이 잘 되겠니?'
'나중에 간질 때문에 치매가 빨리오면 어떻게 할거니'
결국 두 번째 결혼도 파혼으로 끝났고 나는 많이 울었다. 세상이 미웠다. 난 왜 이렇게 아프게 태어났지?왜 어른들은 이해를 못해주지?지금이야 엄마가 된 입장이라 그때 시어머니가 했던 말을 좀 이해하지만 당시에는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