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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위한 작은 몸부림

by 뇌전증과삶

중학생이 되면 내 뇌전증이 좋아지지는 않을까?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셔서 뇌전증이 낫게 해주지 않을까?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하리만큼 차가웠다.


나는 초등학생 때보다 더 많은 발작을 했고 결국 공부를 아예 내려놨다. 그렇다고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지도 못했다. 학교에서 자주 쓰러지자 ‘쟤 간질 환자래‘라며 나를 멀리 했고 직접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또 혼자가 되었다. 초등학생 때야 매번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과 얘기하며 항상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지만 지금 내 편은 아예 없었다.


부정이라는 가지는 마치 포도 줄기처럼 하나씩 하나씩 벽을 타며 올라갔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래도 사춘기 영향도 분명히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할까? 매일 내 스스로 질문했다.


질문을 하면 할수록 굳이 살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 하나 때문에 부모님은 눈물을 흘리고 어차피 나는 이 뇌전증으로 인해 학교를 졸업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못 할 것 같았다. 한 달에 적게는 4번 많게는 10번도 쓰러지는 사람을 과연 누가 써줄까? 이렇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바에는 내가 사라지면 오히려 짐 덩이가 사라지니 이게 더 나은 거 아닌가? 문제가 해결되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인생에 최종상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뇌전증은 나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방학 때 나는 부모님이 없는 주말에 내 생각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집에는 나와 내 남동생밖에 없었는데 남동생은 라면을 끓이면서 나에게 자기가 빌려온 만화책 좀 보고 있으라며 만화책을 던져주었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려고 마음먹기 직전인데 지금 생각하면 마지막 실행을 앞두고 나는 무서웠던 것 같다. 진짜 마음먹었다면 그 라면을 먹기 전에 그리고 만화책을 읽기 전에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저 마음 한구석에서 싹을 피우고 있었던 거 같다. 나는 동생이 준 만화책을 읽었고 동생과 함께 라면을 먹고 라면을 먹은 후 계속 만화책을 읽었다.


지금이야 만화책방이 엄청나게 프리미엄화되고 데이트 장소가 되면서 굉장히 비싼 취미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만화방에서 대여하면 10권에 1000원 이 정도로 쌌다. 그래서 내 동생은 보통 일주일치 용돈을 모아서 주말에 날을 잡고 한 번에 30~40권을 빌려오곤 했다.


나는 동생이 빌려온 만화책을 읽고 계속 읽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무언가에 빠졌다는 게 참 신기할 정도로 나는 푹 빠졌다. 공부하던 밥을 먹던 친구와 얘기하든 내 머릿속에는 항상 뇌전증으로 인해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있었는데 만화책을 읽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만화책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동생과 함께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만화책을 읽었고 부모님이 차려준 밥을 먹었다. 너무 오랜만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근심 걱정이 잠깐 머릿속을 비워두었고 뇌전증 또한 머릿속에서 잠깐이나마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만화책을 다 읽고 동생에게 한 마디 말을 건냈다.


'네 덕분에 나는 새로운 희망을 찾았어'나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와 같은 감동적인 말이 아니였다. 그저 담백하고 간단 명료한 말이었다.


"야 이거 다음 권 언제나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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