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동생과 즐겨봤던 만화책은 원피스라는 만화였다. 지금이야 우주 명작 소리를 듣지만 20년 전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였던 것 같다.(나는 그 당시에 꼭두각시 서커스라는 만화를 더 좋아했다)
원피스의 내용은 간단하다. 해적들이 원피스라는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행인데 여행도중 여러 동료들을 만나고 전형적인 소년만화가 그랬듯 항상 새로운 시련을 이겨내며 모험을 하는 내용이다.
소년만화의 특징이 복잡하지 않고 술술 읽힌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동생이 빌려온 원피스를 이틀만에 다 읽었다. 그 만화에서 나오는 누군가를 엄청 좋아하거나 혹은 원피스를 통해서 엄청난 것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뭔가 다음 권이 빨리 보고싶다는 생각에 잠을 못 이뤘었다.
그러다 문득 달빛이 창문을 통해서 나에게 쏟아져 내렸고 어떤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내가 무언가를 이토록 집중했던 적이 있었나? 뇌전증 때문에 공부도 하기 힘들고 친구들과 놀기도 힘들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니까, 스트래스 받으면 더 쉽게 발작하니까 나는 나도모르게 내 안에 벽을 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주말까지 원피스와 여러 만화들(대부분 남동생 취향이라 소년만화가 많았다)을 다 보고 월요일에 나는 시간을 내어 초등학교 옆 병원으로 의사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고 나도 전화를 미리 하고 가는 게 예의라는 것을 모르던 시절이라 그냥 무작정 찾아갔지만 의사선생님은 언제나 그렇듯 투덜대며 내 짜장면을 시켜주시면서 내가 하는 말을 다 들어주셨다.
나는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얘기를 했다.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것 그리고 웃기게도 라면이랑 만화책 때문에 그걸 잊어버린 것까지 가족에게도 할 수 없었던 얘기를 신기하게도 의사선생님 앞에서는 술술 얘기했다.
의사선생님은 내 얘기를 듣고는 짜장면을 먹으면서 대답해주었다. 그 당시 모습은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나무 젖가락을 흔들면서 하셨던 얘기는 간단했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안 좋은 생각 나면 네가 지금 재밌게 읽고있는 만회책들 최소한 완결은 보고 가야지 라고 생각해봐 하늘 가면 못 읽을껄?"
그러면서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말해주며 갈 때 이 돈으로 만화책 읽으라고 만원짜리도 챙겨줬다. 그 당시 만원은 엄청나게 큰 돈이였는데 내가 멍하니 돈을 두 손으로 잡고있자 내 손에 돈을 뺐어서 내 주머니에 넣어주고는 가라고 등을 툭툭 치며 나를 보내주었다.
"살면 재밌는게 많다. 네가 나중에 내 나이정도 되면 알게 될 거야 그 전까지는 쓸대없는 생각하지 말고 만화책 많이 봐라 그리고 원피스 말고 열혈강호같은 명작을 보고"
나는 알겠다며 인사를 크게 하고 나왔다. 집에가는 길은 너무나 가벼웠다. 내가 혹시나 뇌전증 때문에 쓰러지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아예 하지 않고 받은 돈으로 만화책 빌려봐야지 생각에 행복한 감정이 내 몸을 감쌌다.
누군가에게는 만화책이 정말 작은 취미일 수 있지만 나는 그 후로도 얼추 3000권 이상(만화책방이 망할 때 3700권 봤다고 했었으니.. 아마 더 봤을 것이다)만화책을 열심히 읽었고 삶에 의미를 되찾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엄마가 되어 어느덧 그 의사선생임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최소한 완결은 봐야하지 않겠냐 라고 했던 만화는 아직까지도 연재가 되고 있고 나 또한 삶의 의미를 만화 뿐 아니라 아이, 남편, 가족 등 많은 것을 찾아 행복을 느끼며 살고있다.
지금도 남편과 함께 부모님이 아이를 봐주시면 같이 만화방에 가서(만화카페는 비싸서 안 간다. 만화도 적고 비싸다) 만화를 읽곤 한다. 만화를 읽을 때면 예전에 즐거웠던 그리고 행복했던 순간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라서 너무 감사한 느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