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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나 빼 기지배야

by 뇌전증과삶

중학교 3학년 때 그래도 공부해서인지 원래라면 상고나 공고를 가야 했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내 뇌전증이 낫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뇌전증을 대하든 태도가 달라졌다. 나는 자신 있게 얘기했고 전염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내가 쓰러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얘기했다. 내가 보통 이 얘기를 하면 10명 중 8~9명은 부담스러워하며 나를 멀리했다. 아무래도 내 옆에 있는 짝꿍이 갑자기 눈 뒤집히면서 발작하면 다들 무서울 테니 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나는 혜미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내가 조심스럽게 뇌전증에 관해서 얘기하자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죽는 병도 아니잖아"

혜미는 단발머리에 키가 170 가까이 되는 큰 친구였다. 말투는 운동하는 아이 말투지만 막상 운동은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소녀였다.


나는 혜미의 말을 들었을 때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맞다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예전 의사 선생님의 말씀처럼 뇌전증은 죽는 병도 아니고 단지 가끔 쓰러지고 발작하기만 할 뿐 그 이상의 병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는 혜미의 단짝이 되었다. 보통의 아이들은 나를 환자라고 생각하여 항상 배려해줬지만 혜미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그냥 평범한 다른 친구들 대하듯 나를 대해주었다.


하루는 내가 뇌전증 때문에 앞으로 연애하기도 힘들고 결혼하기도 힘들 거라고 우울해했던 날이 있었다. 어떤 남자가 나처럼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여자를 좋아할까? 당연히 아무도 없을거라 생각했다. 이 얘기를 혜미에게 했을 때 혜미는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었다.


"살이나 빼 기지배야 "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혜미한테 뭐라 했지만 혜미는 오히려 더 당당하게 '살 빼고 남친 안 생기면 내가 무조건 소개시켜준다!'라며 큰소리쳤다. 그 당시 너무 짜증 나서 일기에도 쓰고 집에서 애꿎은 동생에게 나 살쪘냐고 화내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살 빼고 바로 2학년 선배가 매점에서 나오는 날 보고 말을 걸어왔고 나는 첫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


가끔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가 생각보다 별거 아닐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뇌전증으로 인해서 앞으로 결혼도, 연애도 못 할 거로 생각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연애를 못 했던 적은 없던 거 같다.(남자 꼬시는 법을 혜미에게 잘 배웠다)


앞으로 글을 쓰면 나오겠지만 연애와 결혼은 다른 거라 파혼은 2번 했다. 그러나 지금의 완벽한 남편을 만났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가졌으니 뇌전증은 내 삶에 단지 불편함이었지 내 삶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도 혜미를 만난다. 혜미는 딸 둘을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서 육아에 대해서 궁금하거나 장난감을 빌리러 갈 때 우리는 만나서 과거 고등학교 얘기하며 추억에 젖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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